사냥개의 비열한 결단
설소백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등에 업힌 아영의 몸은 이미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전만평의 비밀 금고에서 한진우의 포위망을 뚫고 지하 하수구의 차가운 오수를 가르며 탈출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지옥과 같았다. 소백의 어깨 경맥은 다시금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뿜어냈고, 돌쇠가 청강석을 섞어 단조해 준 묵풍검의 검신에는 한진우의 묵직한 강기를 받아내느라 미세한 균열이 가 있었다.
하지만 그 처절한 사투의 대가는 확실했다. 아영의 품속 가죽 주머니에는 철검문과 부패 관청 임태수 포교의 밀무역 내역이 고스란히 적힌 진짜 가죽 장부, 즉 ‘철검문의 밀무역 장부’가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태경이 낙엽헌에서 미리 설계해 둔 어둠의 전령망이 가동되었다. 하수구 출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개방 낙엽촌 분타의 타구랑 혁이와 거지 아이들이 소백으로부터 장부를 신속하게 인계받았다. 그들은 남궁휘의 정예 호위 무사들이 삼엄하게 경비를 서고 있던 무림맹 특별조사단의 임시 처소 문앞에 장부를 던져두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 * *
쿵!
무림맹 특별조사단장 남궁휘는 서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단단한 자단목 탁자가 일류 고수의 내력에 의해 쩍 갈라지며 먼지를 뿜어냈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가죽 장부에는 낙엽촌의 고혈을 짜낸 세금 갈취 내역과 금릉성 철검문으로 흘러 들어간 밀무역 자금, 그리고 결정적으로 포교 임태수가 조대포에게 받은 황금 명패의 일련번호까지 낱낱이 기록되어 있었다.
“감히... 감히 무림맹의 비호를 받는 관청의 포교와 삼류 방파 놈들이 결탁하여 이토록 거대한 조반(造反)의 자금을 굴리고 있었단 말인가!”
남궁휘의 눈동자에 시퍼런 창궁검기가 일렁였다. 명문 남궁세가의 자제로서 지닌 오만한 정의감이 부패의 실체를 마주하자 맹렬한 분노로 화했다. 그는 곁에 서 있던 감찰 무사들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당장 집행령을 발동한다! 감찰 무사 전원은 검을 뽑아라. 흑호방 본영을 전면 압수수색하고, 방주 조대포와 포교 임태수를 무림맹 법률 위반 및 반역 혐의로 즉각 체포한다! 저항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멸구(滅口)해도 좋다!”
“존명!”
은색 경갑을 입은 무림맹 정예 무사들이 일제히 발도하며 임시 처소를 나섰다. 낙엽촌의 밤하늘 위로 무림맹의 공식 집행을 알리는 차가운 횃불들이 길게 늘어서기 시작했다.
* * *
같은 시각, 흑호방 본영 지하의 음습한 밀실.
사방이 묵직한 돌벽으로 막힌 방 안에는 조대포와 책사 갈풍만이 마주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는 흑호방의 마지막 비상 금고에서 꺼낸 황금 수십 냥이 담긴 궤짝이 열려 있었으나, 두 사람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패배의 그림자와 극도의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
“방주님, 전만평의 창고가 완전히 털렸습니다.”
갈풍이 염소수염을 파르르 떨며 주판을 내려놓았다. 그의 영악한 눈동자는 공포로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단순히 금원보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철검문주 장문인께 바치던 밀무역 장부의 진짜 실물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 남궁휘의 특별조사단 무사들이 횃불을 들고 이쪽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장부가 남궁휘의 손에 들어간 것이 분명합니다!”
“으드득...!”
조대포가 이빨을 갈았다. 멧돼지처럼 거구의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흑호공의 내력이 밀실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의 거친 손가락이 탁자 모퉁이를 움켜쥐자 돌가루가 으스러져 내렸다.
“남궁휘... 그 애송이 놈이 감히 내 목을 치러 오겠다고? 철검문주 장문인께서 내 배후에 계시거늘, 일개 특별조사단장 따위가 감히!”
“방주님, 이성적으로 생각하셔야 합니다!”
갈풍이 조대포의 소매를 붙잡으며 다급하게 속삭였다.
“장부의 실물이 무림맹 본청으로 넘어가는 순간, 철검문주님께서도 방주님을 꼬리 자르기로 버리실 겁니다. 임태수 포교는 이미 겁에 질려 관복을 벗고 도망칠 궁리만 하고 있습니다. 지금 상황을 뒤집을 방법은 단 하나뿐입니다.”
조대포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갈풍을 노려보았다.
“그게 무엇이냐?”
“증거를 가진 자와 증거를 쫓는 자를 모두 이 낙엽촌의 어둠 속에 묻어버리는 것입니다. 남궁휘를 암살하여 관청과의 유착을 완벽히 은폐하고, 그 기형적인 검술을 쓰는 삼류 검객 설소백과 낙엽헌의 눈먼 점소이 놈의 목을 베어 장서각의 남은 비급을 탈취해야 합니다. 맹주님께서 그토록 찾으시는 장서각 생존자의 목을 철검문에 바친다면, 장부 유실의 죄는 오히려 거대한 공으로 뒤바뀔 것입니다.”
갈풍의 비열한 제안에 조대포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올라갔다.
“하지만 남궁휘는 일류 고수다. 게다가 그의 감찰 무사들의 진법을 깨부수고 소백이 놈의 변칙 검술까지 단숨에 숨통을 끊을 자가 이 변방에 있단 말이냐?”
“그래서... 제가 평생 모은 인맥과 황금을 털어 사파(Sapa)의 가장 잔인한 살수 형제를 이곳으로 불렀습니다.”
갈풍이 밀실 벽면의 특정 벽돌을 누르자, 쿠르릉 소리와 함께 숨겨진 암문이 열렸다.
어둠 속에서 두 개의 기이한 신형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한 명은 얼굴 절반이 끔찍한 화상 흉터로 뒤덮인 거구의 사내였다. 그의 온몸에는 굵고 무거운 흑철 쇠사슬이 주렁주렁 감겨 있었고, 그 사슬 끝에는 피비린내를 풍기는 거대한 대도가 매달려 있었다. 흑풍쌍살(Heukpung-ssangsal)의 형, 장만태(Jang Man-tae)였다.
그의 뒤에는 대조적으로 왜소하고 날렵한 체구에 음산한 미소를 지은 사내가 서 있었다. 그의 양손 소매 끝에는 치명적인 칠보단혼독이 발라진 미세한 독침 사출 장치가 장착되어 있었다. 동생 장만수(Jang Man-su)였다.
두 사내가 밀실로 들어서는 순간, 등등한 살기가 돌벽을 타고 흘러내려 촛불의 불꽃을 검붉게 물들였다. 조대포마저 그들의 압도적인 사파 살기에 움찔하며 뒤로 반 걸음 물러설 정도였다.
“흐흐흐... 조 방주, 우리 형제를 부르기 위해 비상 금고를 통째로 털었다지?”
장만태가 굵은 목소리로 웃자, 그의 몸에 감긴 쇠사슬이 섬뜩한 쇳소리를 내며 요동쳤다.
조대포는 침을 꿀컥 삼키며 탁자 위의 황금 궤짝을 그들 앞으로 밀어 던졌다.
“황금 수십 냥이다. 내 전 재산이지. 계약 조건은 간단하다.”
조대포가 살기 어린 목소리로 지시했다.
“첫째, 무림맹의 남궁휘를 암살하여 낙엽촌 외곽 계곡에 시체를 묻어라. 둘째, 설소백의 초가를 습격해 그의 누이 설예진을 인질로 잡고, 소백이와 낙엽헌의 눈먼 점소이 서태경의 목을 베어라. 특히 그 맹인 놈의 품을 뒤져 기이한 요철이 새겨진 목패와 서책들을 모두 회수해 와야 한다.”
동생 장만수가 자신의 손목에 찬 독침 사출 장치를 가볍게 튕기며 음산하게 웃었다.
“무림맹의 도련님과 눈먼 점소이라... 식은 죽 먹기군. 형님, 오늘 밤 낙엽촌의 야간 통행 금지령은 우리 형제를 위한 붉은 멍석이 되겠소.”
장만태가 거대한 사슬 대도를 어깨에 메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 지고 안개가 깔리면 움직인다. 단 한 명의 생존자도 남기지 않겠다.”
두 살수의 신형이 다시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스며들었다. 조대포와 갈풍은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비열하고도 광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파멸의 직전에서 선택한 사냥개의 비열한 발악이었다.
* * *
같은 시각, 낙엽헌의 깊은 침소.
찻집 내부에는 고요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소백과 아영은 탈출 후 장 노인의 약방 밀실에서 치료를 받으며 숨어 있었고, 찻집에는 오직 눈먼 태경만이 홀로 남아 있었다.
태경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
“으윽...!”
뇌가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신경통이 관자놀이를 사정없이 짓눌렀다. 남궁휘를 움직이고, 장부를 탈취하고, 흑호방의 내적 분열과 수로 탈출 경로까지 수백 수천 가지의 변수를 동시에 연산하느라 그의 완전기억능력이 한계 임계점을 돌파한 탓이었다. 안대 틈새로 검붉은 피가 한 방울 흘러내려 그의 왼쪽 뺨에 남은 끔찍한 화상 흉터를 타고 흘러내렸다.
태경은 떨리는 손으로 장 노인이 달여 전해준 ‘정신 안정 비약’을 입가로 가져갔다.
후각을 완전히 상실한 그에게는 약탕의 쌉싸름한 냄새조차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미각마저 마비되어 혀끝에는 오직 얼음장처럼 차가운 냉기만이 감돌 뿐이었다. 비약을 한 모금 들이켜자, 타들어 가던 뇌의 열기가 급속도로 냉각되며 폭주하던 기억의 파편들이 가라앉았다.
비약의 부작용으로 일상적인 최근의 기억 일부가 머릿속에서 영구히 지워져 가고 있었지만, 태경은 멈출 수 없었다. 그의 품속에는 장서각 화재 현장에서 타다 남은 동료들의 잿가루 주머니가 묵직하게 만져지고 있었다.
태경은 부러진 대나무 지팡이 청풍죽(Cheongpung-juk)을 지그시 쥐었다. 지팡이 끝을 방바닥에 가볍게 대자, 미세한 대기의 진동이 그의 손바닥 신경을 자극했다.
‘바람의 흐름이 바뀌었다.’
후각은 죽었으나, 그의 초감각적인 청각과 기감은 오히려 안개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낙엽촌 전역에 야간 통행 금지령을 알리는 타종 소리가 고요하게 울려 퍼진 직후였다. 평소라면 고요해야 할 밤바람 속에서, 기이하게 무겁고 불규칙한 쇠사슬의 마찰음이 태경의 귀에 포착되었다.
사라락, 사락.
갈대밭의 서걱임이 아니었다. 살기를 머금은 쇳덩이가 지면을 스치며 내는 섬뜩한 파공음이었다. 뒤이어 공기 중에 미세하게 퍼지는 치명적인 사독(蛇毒)의 음산한 한기가 태경의 피부 세포를 자극했다.
사파의 절정 살수들이 이 마을의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음을 직감한 순간이었다. 그들의 칼날이 향하는 종착지가 어디인지, 태경의 머릿속 연산 장치는 단 1리의 오차도 없이 결론을 도출해 냈다.
설소백의 초가집. 그리고 그곳에 홀로 남겨진 소백의 누이 설예진.
어두운 침소 안, 검은 천으로 두 눈을 가린 채 정적 속에 앉아 있던 맹인 필사가 서태경은, 안대 너머로 보이지 않는 눈동자를 번쩍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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