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부를 훔치는 그림자
남궁휘의 조사단 마차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장터 대로변을 가로지르는 순간, 태경은 품속에서 청동 패를 고쳐 쥐었다.
쿠르릉거리는 마차 바퀴 소리가 낙엽헌의 낡은 문틀을 미세하게 흔들다 이내 멀어졌다. 정의감과 명예욕에 눈이 먼 무림맹의 젊은 사냥개가 드디어 움직인 것이다. 남궁휘의 감찰 무사들이 요란한 기세를 풍기며 전만평의 창고 전방을 압박할 터였다. 호랑이를 굴 밖으로 유인하는 조장성동(調虎離山)의 격렬한 서막이었다.
태경은 차갑게 식어버린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시간이 없다. 사냥개가 전방에서 요란하게 짖어대는 동안, 우리는 가장 은밀한 곳에 숨겨진 진짜 사냥감을 물어와야 한다."
그의 목소리는 주방 구석의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곳에는 이미 태경의 지시를 받고 대기하던 첫 번째 제자 설소백과, 고양이 같은 기민함을 지닌 도둑 소녀 아영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태경은 보이지 않는 눈 대신, 손가락 끝으로 균열이 간 대나무 지팡이 청풍죽(Cheongpung-juk)을 가볍게 두드렸다. 톡, 하고 울리는 미세한 진동이 태경의 손바닥 신경을 타고 역류했다. 후각을 완전히 상실한 태경에게는 오직 이 미세한 음파와 상대의 숨소리만이 세상을 읽는 유일한 열쇠였다.
"소백아, 아영아. 전만평의 창고 후방은 지하 수로와 연결되어 있다. 남궁휘가 전방의 무사들을 몰아치는 찰나, 창고 후문의 경비는 단 두 명으로 줄어들 것이다. 아영이 네가 먼저 침투해 삼중 잠금장치를 해제하고 진짜 가죽 장부를 확보하거라. 소백이는 그 뒤를 엄호하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라."
"예, 스승님."
소백이 우직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허리에 찬 묵풍검의 자루를 굳게 쥐었다. 돌쇠가 청강석을 녹여 주조해 준 변칙 편형검의 푸른 자력이 어둠 속에서 미세하게 명멸했다.
아영 역시 영악한 미소를 지으며 소매 안의 얇은 철사 다발을 만지작거렸다.
"걱정 마세요, 서 선생. 자물쇠 따는 것만큼은 금릉성에서도 저를 따라올 자가 없으니까요. 대신... 제 가슴을 짓누르는 이 빌어먹을 맥 폐색(Blocked Meridians)을 치료해 줄 약재는 꼭 챙겨주셔야 해요."
"약속은 지킨다. 가거라."
태경의 묵직한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영의 신형이 바람 소리조차 내지 않고 창문 너머로 날렵하게 사라졌다. 그 뒤를 따라 소백 역시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 * *
같은 시각, 전만평의 대형 창고 전방 대로변.
"이 비열한 흑호방의 무리들아! 당장 문을 열고 무림맹의 공식 수색에 협조하라!"
남궁휘의 우렁찬 사자후가 창고 전면을 뒤흔들었다. 은색 경갑을 입은 감찰 무사들이 창고 정문을 에워싸고 횃불을 밝히자, 전만평의 수하 무사들이 당황하여 무기를 쥐고 대치하기 시작했다. 대로변 전체가 남궁휘가 뿜어내는 일류 고수의 시퍼런 내력 기세로 가득 찼다.
그 대혼란을 틈타, 창고 우측 골목길에서 기이한 소동이 추가로 발생했다.
"아이고! 배고파 죽겠네! 흑호방 놈들이 우리 먹을 곡식을 다 훔쳐갔다!"
땟물이 흐르는 얼굴의 소년, 개방 낙엽촌 분타의 타구랑 혁이(Hyeok-i)가 수십 명의 거지 아이들을 이끌고 흙덩이와 돌멩이를 창고 경비원들을 향해 무차별로 던지기 시작했다.
"이 거지 새끼들이 미쳤나! 당장 저놈들을 잡아 가두어라!"
정방의 남궁휘 군대와 측면의 거지 아이들 소동이 겹치자, 전만평 창고의 경비 병력은 완전히 이성을 잃고 전방으로 쏠려 나갔다. 태경이 설계한 완벽한 방어 공백의 순간이었다.
창고 후방의 음습한 지하 수로 입구.
단 두 명만이 남은 후문 경비원들이 전방의 소란에 고개를 돌린 찰나, 지붕 처마 위에서 짙은 회색 옷을 입은 아영이 고양이처럼 가볍게 뛰어내렸다.
사각.
풀잎 하나 밟는 소리조차 나지 않는 완벽한 풍신경(Wind God Footwork)의 신형이었다. 아영은 소매 속에서 가느다란 비수를 꺼내 들고 순식간에 경비원의 등 뒤로 파고들었다. 퍽, 하고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경비원 한 명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소백 역시 기민하게 움직여 남은 한 명의 목덜미를 쳐 기절시켰.
"솜씨가 제법이군, 아영이."
소백이 나직하게 칭찬하자, 아영은 콧방귀를 뀌며 후문의 두꺼운 나무 문을 열고 안으로 잠입했다.
창고 내부는 어둡고 퀴퀴한 한방 약재 냄새와 밀무역 염료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아영은 바람 소리도 내지 않고 천장의 대들보를 타고 전만평의 비밀 밀실이 위치한 지하 금고 입구로 침투했다. 소백은 어둠 속에 몸을 감춘 채, 기압의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며 주변 경계를 섰다.
비밀 밀실의 중심부에는 강철과 두꺼운 자단목으로 제작된 거대한 금고가 놓여 있었다. 금고 문에는 기이한 황동 톱니바퀴 세 개가 맞물려 있는 삼중 잠금장치가 채워져 있었다.
"하, 제법 머리를 썼네. 하지만 내 손끝을 벗어날 순 없지."
아영은 쇠로 된 얇은 철사 다발을 꺼내 자물쇠 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손가락 끝의 감각과 귀를 자물쇠 표면에 바짝 대었다.
틱. 티딕. 틱.
미세한 쇠붙이의 마찰음이 아영의 고막을 두드렸다. 태경이 사전에 일러준 삼중 잠금장치의 기계적 회전 주기가 그녀의 머릿속에 입체적으로 그려졌다. 첫 번째 기어가 맞물리는 순간, 아영은 철사를 미세하게 비틀어 고정했다.
틱, 하고 묵직한 소리가 나며 첫 번째 자물쇠가 풀렸다.
이어 두 번째, 세 번째 황동 톱니바퀴가 아영의 신들린 손끝 놀림 앞에 차례로 무력화되었다. 마침내 찰칵! 하는 경쾌한 파열음과 함께 거대한 금고 문이 스르륵 열렸다.
금고 내부에는 눈부신 황금 금원보들과 함께, 전만평이 철검문과 부패 관청 임태수에게 상납한 뇌물 내역이 상세히 적힌 진짜 가죽 장부, 즉 철검문의 밀무역 장부(Smuggling Ledger)가 놓여 있었다.
"찾았다! 진짜 장부야!"
아영이 희열에 찬 미소를 지으며 가죽 장부를 품속에 깊숙이 밀어 넣었다. 이것만 있으면 철검문과 흑호방의 목줄을 동시에 쥘 수 있었다.
그러나 장부를 품에 안고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최악의 돌발 변수가 발생했다.
"윽...!"
아영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가슴팍 기경팔맥이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내리기 시작했다. 선천적으로 전신의 주요 혈도가 꽉 막혀 기운이 흐르지 못하는 맥 폐색(Blocked Meridians)의 치명적인 한계 발작이었다.
과도한 경공 전개와 기어 해제를 위해 손가락 끝의 신경을 극도로 집중한 대가였다. 전신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지독한 한독(寒毒)이 그녀의 심장을 향해 역류했다.
"아, 안 돼... 하필 지금..."
아영의 무릎이 꺾였다. 사지가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지며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전신 마비 상태가 찾아왔다. 그녀가 들고 있던 철사 다발이 바닥에 떨어지며 쨍그랑! 하는 날카로운 쇳소리를 냈다.
그 쇳소리는 고요한 창고 내부에 거대한 경보음처럼 울려 퍼졌다.
"누구냐! 지하 금고 쪽에 침입자가 있다!"
창고 외부에서 들려오는 거친 고함 소리와 함께, 수십 명의 무거운 장화 소리가 지하 밀실을 향해 빠르게 조여들기 시작했다. 최악의 포위망이 형성되는 순간이었다.
어둠 속에 대기하고 있던 소백이 사태의 심각성을 직감하고 창문을 깨부수며 밀실 안으로 난입했다.
콰창!
"아영이! 일어서라!"
"소, 소백아... 몸이... 움직이지 않아... 기맥이 완전히 막혔어..."
아영의 창백한 입술 사이로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그녀의 피부는 이미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지하 밀실의 두꺼운 나무 문이 거칠게 부서지며, 철검문의 푸른 무복을 입은 정예 무사들이 칼을 뽑아 든 채 들이닥쳤다. 그 선두에는 차갑고 예리한 안광을 지닌 사내, 철검문의 밀무역 책임자 한진우(Han Jin-woo)가 서 있었다.
"쥐새끼 같은 놈들이 감히 철검문의 재산에 손을 대는구나. 당장 그 장부를 내려놓고 목을 바쳐라!"
한진우의 검 끝에서 정종 철검술의 무겁고 묵직한 강기가 피어올랐다. 일류 고수의 압도적인 내력 중압감이 좁은 밀실 내부를 가득 채웠다.
소백은 이를 악물었다. 스승 태경의 가르침이 머릿속을 스쳤다.
'강한 힘 앞에서는 정면으로 맞서지 마라. 뒤틀린 네 뼈의 탄성을 이용해 적의 힘의 궤적 자체를 비껴 흘려보내야 한다.'
소백이 묵풍검을 전방으로 비스듬히 세우며 발도했다. 스슥! 하는 기이한 파공음과 함께 묵풍검의 검신이 뱀처럼 기묘한 각도로 휘어지며 푸른 잔상을 그렸다. 한진우의 무사들이 뿜어내는 직선적인 검로들이 소백의 변칙적인 탄성 검막에 부딪혀 옆 돌벽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콰과광! 하는 폭음과 함께 밀실 벽면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소백의 묵풍검 역시 무거운 강기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미세한 이 빠짐 소리를 내며 균열이 갔다. 부상당한 어깨 경맥에서 지독한 통증이 다시 한번 발작했다.
소백은 굳어버린 아영을 한 손으로 낚아채 자신의 등 뒤로 업었다. 품속의 장부와 아영을 동시에 지켜내야 하는 절체절명의 배수진이었다.
"내 뒤에 꽉 붙어 있거라, 아영아. 스승님이 주신 이 검으로 반드시 뚫어낼 테니."
소백이 묵풍검을 가슴 높이로 고쳐 쥐며 전방의 적들을 향해 살기를 뿜었다. 그러나 밀실 출구 너머, 창고의 거대한 철제 대문 앞에는 한진우가 직접 정예 검사들을 이중삼중으로 정렬시킨 채 그들의 퇴로를 완전히 봉쇄하고 있었다. 붉은 횃불의 불빛 아래에서 번뜩이는 수십 자루의 칼날이 소백과 아영의 목줄기를 겨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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