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正義)라는 이름의 장기말
남궁휘의 가죽 장화가 낙엽헌의 낡은 문턱을 밟는 순간, 태경은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손을 떨었다.
딸랑, 하는 낡은 구리 종소리가 찻집의 정적을 깨뜨렸다. 문틈으로 밀려든 차가운 겨울 바람과 함께, 범상치 않은 압도적인 정종(正宗)의 기세가 낙엽헌 내부를 무겁게 짓눌렀다. 남궁세가의 비전인 창궁신공(蒼穹神功)을 수련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단단하고 일정한 발소리였다.
벅, 벅, 벅.
태경은 안대 뒤에서 두 눈을 감은 채, 오른손에 쥔 청풍죽(Cheongpung-juk) 지팡이에 신경을 집중했다. 비록 지난 배칠성의 기습으로 인해 지팡이 몸체에 미세한 균열이 가 있었으나, 땅을 디디고 있는 지팡이 끝은 여전히 태경의 가장 예민한 눈이 되어주고 있었다.
‘심음 감청술(Heartbeat Listening Technique) 가동.’
태경의 귓가에 남궁휘의 심장 박동 소리가 또렷하게 맺혔다.
두근. 두근. 두근.
분당 예순여덟 번. 소름 끼칠 정도로 일정하고 굳건한 고동 소리였다. 명문가에서 나고 자라 단 한 번도 기맥의 흐트러짐을 겪지 않은 오만한 엘리트 무인의 심음. 태경은 그의 발걸음이 만들어내는 대지의 미세한 진동을 통해, 남궁휘가 지금 낙엽헌 내부를 날카로운 안광으로 훑어보고 있음을 파악했다.
남궁휘의 시선은 가장 먼저 카운터 뒤에 서 있는 태경에게 닿았다. 기운 흔적이 역력한 회색 삼베옷, 두 눈을 가린 검은 천 안대, 그리고 결정적으로 왼쪽 뺨에서부터 목덜미까지 끔찍하게 일그러진 채 진물이 겨우 마른 화상 흉터. 그것은 태경이 맹인 점소이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배칠성의 끓는 찻물 기습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얻은 처절한 대가였다.
남궁휘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명문 정파의 의협을 신봉하는 그의 눈에, 태경의 몰골은 변방의 폭력 집단인 흑호방에게 처참하게 수탈당하고 짓밟힌 가엾은 민초의 전형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궁휘는 쉽게 경계를 푸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었다. 그는 천천히 태경의 앞으로 다가와 허리에 찬 보검의 칼집 끝으로 태경이 짚고 있는 청풍죽 지팡이의 머리 부분을 가볍게 툭 쳤다.
스윽.
지팡이가 옆으로 미끄러지자, 태경은 짐짓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중심을 잃고 탁자 모퉁이를 짚었다.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빈 찻잔들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태경은 바닥을 더듬으며 벌벌 떠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아, 아이고! 손님, 어서 오십시오! 눈이 어둡고 귀가 먹먹하여 손님이 들어오시는 것도 미처 몰랐습니다. 찻집이 워낙 누추하여 대협 같은 귀한 분을 모시기에 송구할 따름입니다! 개똥아야! 당장 물을 끓이거라!"
주방 구석에서 눈치를 보던 고아 소년 개똥이(Gae-ttong-i)가 태경의 외침에 움찔하며 낡은 걸레를 들고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아, 예! 서 선생! 금방 아궁이에 불을 지피겠습니다!"
남궁휘는 태경의 뼈와 관절의 움직임을 조용히 관찰했다. 지팡이가 미끄러질 때 태경의 신체 반응에는 단 1리의 내력이나 무공의 흔적도 섞여 있지 않았다. 몸의 무게중심은 완전히 흐트러졌고, 손가락 끝은 추위와 두려움으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게다가 뺨의 끔찍한 화상 흉터는 흑호방의 가혹한 폭력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물증이었다.
남궁휘의 심박이 미세하게 느려졌다. 경계심이 한풀 꺾였다는 신호였다. 그는 탁자 앞 의자에 위엄 있게 걸터앉으며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맹인 점소이라... 뺨의 상처가 무척 깊어 보이는군. 흑호방 놈들의 소행이냐?"
태경은 몸을 움츠리며 가슴팍의 삼베옷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목소리를 한층 더 낮추어 가냘프게 대답했다.
"말씀드리기 송구스럽지만... 장터 세금이 단 하루 늦었다는 이유로 그들이 끓는 솥을 엎어버렸습니다. 낙엽촌의 가난한 백성들은 그저 목숨을 부지하는 것만으로도 하늘의 은혜라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협, 부디 저희 같은 가여운 무지렁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남궁휘의 심음 속에서 분노의 고동이 일어났다. 정의감에 불타는 청년 검사의 가슴에 Heukho-bang의 포악함에 대한 강한 혐오감이 싹트는 소리였다. 남궁휘는 검자루를 지그시 쥐며 말했다.
"무림맹의 가호를 받는 강호 영토에서 이토록 비열한 수탈이 자행되고 있었다니, 내 가슴이 찢어지는구나. 내 반드시 이 마을의 부패를 뿌리 뽑을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그보다, 목이 타는군. 차를 한 잔 내오거라."
"예, 대협! 저희 찻집의 유일한 자랑인 낙엽차(Nakyeop Tea)를 따뜻하게 우려 올리겠습니다."
태경은 허리를 굽히며 주방으로 향했다.
후각을 완전히 잃어버린 태경의 코에는 찻잎의 향긋한 냄새도, 아궁이에서 피어오르는 매캐한 연기 냄새도 전혀 닿지 않았다. 하지만 태경에게는 뇌리 속에 각인된 수천 권의 비급과 절대적인 청각이 있었다.
그는 물이 끓는 주전자의 미세한 기포 소리를 통해 물의 온도를 정확히 가늠했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음파가 백 도에 도달하는 찰나, 태경은 정밀한 손놀림으로 낙엽찻잎과 함께 심신 안정 효과가 있는 들풀의 줄기를 정확히 10대 1의 비율로 배합했다. 이 들풀은 뇌 신경을 이완시켜 이성적인 판단력은 유지하되, 상대의 의심과 경계의 날을 무디게 만드는 태경의 은밀한 지략용 도구였다.
태경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정갈하게 차를 우려내어 찻잔에 담았다. 후각이 마비되었기에 향기를 맡을 수는 없었으나, 찻잔을 타고 전해지는 온기와 무게만으로도 완벽한 낙엽차가 완성되었음을 확신했다.
다만, 끓는 찻주전자를 만지느라 배칠성의 기습 때 입었던 왼쪽 뺨의 화상 흉터 부근에 뜨거운 열기가 닿자, 뇌 신경을 자극하는 지독한 두통의 전조가 관자놀이를 조여왔다. 태경은 이를 악물고 도가 정심 호흡법을 운기하여 뇌의 열을 아래로 가라앉혔.
태경은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로 남궁휘의 탁자 앞으로 다가와 찻잔을 내려놓았다.
"대협, 투박하지만 저희 마을 야산에서 채취한 낙엽차입니다. 부디 고단한 여정의 피로를 푸십시오."
남궁휘는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은은하고 깊은 향기에 미간을 풀었다. 들풀의 미세한 기운이 섞인 낙엽차의 향이 그의 콧방울을 타고 뇌 신경으로 스며들었다. 남궁휘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키자, 그의 전신 경맥에 흐르던 팽팽한 내력이 부드럽게 이완되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두근...
남궁휘의 심장 박동 소리가 한층 더 느긋하고 평온하게 변했다. 의심의 날이 완전히 무뎌진 순간이었다. 남궁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태경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변방의 초라한 찻집치고는 차를 우려내는 솜씨가 제법이군. 마음이 맑아지는 기분이다."
"가여운 맹인의 유일한 생계 수단입니다. 대협의 입맛에 맞으시니 더할 나위 없이 기쁩니다."
태경은 비굴하게 손을 모으며 탁자 옆에 다소곳이 섰다. 남궁휘는 차의 기운에 취해 긴장을 푼 채, 최근 낙엽촌에 돌고 있는 기이한 소문에 대해 넌지시 묻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점소이, 최근 이 낙엽촌 뒤편 안개 숲에서 기이한 무공을 쓰는 검객이 나타나 흑호방의 무사들을 도륙했다는 소문이 돌더군. 선천적으로 뼈와 경맥이 뒤틀린 괴물 같은 자라던데... 혹시 그 자에 대해 아는 바가 있느냐?"
태경의 머릿속에서 장서각 비급 데이터베이스가 날카롭게 회전했다. 남궁휘는 소백의 역기맥 무공을 사마외도의 마공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소백의 존재를 두둔하거나 무공의 정체를 아는 척했다가는, 남궁세가의 예리한 추적망에 소백의 역천 체질이 완전히 노출될 터였다.
태경은 즉시 두 손을 내저으며 극도로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아이고, 대협! 사마외도라니요! 저희 같은 무지렁이들이 어찌 그런 무서운 무림의 일들을 알겠습니까! 그저 안개 숲에서 귀신이 나타나 흑호방 무사들을 홀렸다는 흉흉한 소문만 장터에 돌 뿐입니다. 저희는 그저 매일 밤 가슴을 졸이며 문을 걸어 잠글 뿐이지요."
"귀신이라... 흑호방주 조대포가 자신의 실패를 덮기 위해 헛소문을 퍼뜨린 것일 수도 있겠군."
남궁휘는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의 목소리에는 흑호방에 대한 깊은 불신이 깔려 있었다. 관문 앞에서 습득한 임태수의 비리 장부 조각 때문에,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흑호방이 온갖 비리와 거짓말을 일삼는 썩은 집단으로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태경이 설계한 이호경식의 덫이 남궁휘의 무의식 속에서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태경은 이 찰나의 틈새를 놓치지 않고, 복수의 두 번째 단계를 실행하기 위해 은밀하게 혀를 움직였다.
"다만... 대협. 사마외도의 마두는 잘 모르겠지만, 요즘 장터 상인들 사이에서 아주 이상한 소문이 하나 돌고 있습니다."
남궁휘가 찻잔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이상한 소문? 무엇이냐."
태경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시늉을 하며, 목소리를 기어가는 듯한 소리로 낮추었다. 오직 남궁휘의 예리한 귀에만 들릴 정도의 미세한 음성이었다.
"장터 상인들 사이에서 고리대금과 수탈을 도맡아 하는 전만평(Jeon Man-pyeong)이라는 악덕 상인이 있습니다. 그 자가 흑호방주 조대포의 비자금을 관리하는 자금책이라 하더군요. 최근 흑호방 무사들이 밤마다 전만평의 개인 창고에서 무거운 궤짝들을 은밀히 옮기는 것을 장터 거지 아이들이 목격했다고 합니다."
남궁휘의 미간이 날카롭게 좁혀졌다. 심박 소리가 순간적으로 빨라졌다.
"무거운 궤짝이라...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다는 말이냐?"
"저희 같은 천한 놈들이 어찌 알겠습니까마는... 무사들이 궤짝을 옮기며 나누던 대화를 엿들은 아이의 말로는, 그 자금의 최종 목적지가 남방의 거대 상업 도시인 금릉성(Geumneung Castle)의 거대 상권이라 하더군요. 그 비자금으로 철검문(Cheolgeom-mun)의 거물들에게 줄을 대어 낙엽촌을 영구히 자신들의 사설 영지로 삼으려 획책하고 있답니다. 흑호방이 무림맹 특별조사단의 눈을 피해 그 막대한 금원보와 장부들을 전만평의 창고 지하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쿵, 하고 남궁휘의 심장이 크게 고동쳤다.
정의감과 명예욕에 불타는 남궁세가의 엘리트 검사에게, 이 정보는 단순한 소문이 아니었다. 흑호방과 임태수의 유착을 넘어, 금릉성의 거대 문파인 철검문까지 얽힌 거대한 부패 카르텔의 실마리였다. 만약 이 비자금 장부와 금원보를 직접 확보해 맹의 본청에 보고한다면, 자신은 변방의 단순한 감찰관을 넘어 무림맹의 영웅으로 등극할 수 있을 터였다.
남궁휘는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의 눈빛에는 흑호방의 자금줄을 단숨에 끊어버리겠다는 서슬 퍼런 정의감의 살기가 번뜩이고 있었다.
"전만평의 창고... 흑호방의 비자금줄이 바로 그곳에 숨겨져 있었군."
남궁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은색 경갑이 철컥이는 쇳소리를 내며 찻집의 공기를 차갑게 갈랐. 그는 주머니에서 무림맹 집행관의 권위를 상징하는 청동 패를 꺼내 탁자 위에 툭 던져놓았다.
"눈먼 점소이여. 너의 그 투박한 차와 소박한 소문이 강호의 거대한 악을 밝히는 결정적인 열쇠가 되었구나. 내 남궁세가의 명예를 걸고, 오늘 밤 전만평의 창고를 급습하여 그 추악한 비자금 장부를 천하에 폭로할 것이다. 이 청동 패를 지니고 있으면 흑호방의 무사들도 감히 이 찻집을 건드리지 못할 터이니 보관해 두거라."
태경은 바닥에 엎드리며 청동 패를 더듬어 쥐고,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는 연기를 펼쳤.
"아이고, 대협! 이 은혜를 어찌 다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시고 강호의 정의를 실현해 주십시오!"
남궁휘는 태경의 비굴하고 감격 어린 몰골을 보며 오만한 만족감을 느꼈다. 그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찻집 문을 열고 폭풍처럼 밖으로 나갔다. 관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무림맹 특별조사단 무사들에게 전만평의 창고로 즉각 진격하라는 호령 소리가 낙엽헌 내부까지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벅, 벅, 벅.
남궁휘의 군마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전만평의 창고 방향으로 맹렬히 달려가는 소리가 멀어졌다.
고요해진 낙엽헌 내부.
바닥에 엎드려 있던 태경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비굴하던 얼굴에서 가여운 점소이의 표정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안대 뒤에 감춰진 보이지 않는 눈동자는 깊고 아득한 심연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태경은 손끝으로 남궁휘가 남겨준 청동 패의 차가운 질감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뺨의 화상 흉터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만지며, 안대 뒤에서 소리 없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남궁휘... 정의라는 이름의 장기말이 드디어 내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추기 시작하는구나.’
그는 주방 구석의 어둠을 향해 나직하게 읊조렸다.
“개똥아야. 소백이와 아영이에게 전하거라. 사냥개가 사냥터의 전방을 요란하게 흔드는 사이에, 우리는 전만평의 금고 뒤편으로 들어가 진짜 사냥감인 진짜 장부를 가로챌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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