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점소이와 삼류 검객
북서풍이 몰고 온 황량한 흙먼지가 낙엽촌의 유일한 대로를 뿌옇게 뒤덮고 있었다. 사시사철 메마른 바람이 부는 이곳은 무림맹의 말단 지부인 흑호방(Heukho-bang)의 가혹한 지배 아래 신음하는 변방의 피민촌이었다. 길모퉁이에 겨우 매달린 낡은 목조 간판 하나가 바람에 흔들리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낙엽헌(Nakyeop-heon).
그 허름한 찻집 안에서, 서태경은 조용히 삼베 행주로 찻잔을 닦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은 낡고 때 묻은 검은 천으로 단단히 가려져 있었다. 과거 무림맹 중앙 서고이자 천하의 모든 비급이 모여 있던 장서각을 집어삼킨 붉은 불길 속에서 잃어버린 시력이었다. 그러나 태경은 눈이 멀었음에도 어둠 속에 갇혀 있지 않았다. 오히려 시각의 상실은 그의 다른 감각들을 소름 끼치도록 예리하게 벼려놓았다.
‘찻주전자의 끓는 물소리, 기포가 터지는 주기... 앞으로 세 번 더 터지면 물이 가장 알맞게 우러날 온도다.’
태경은 보이지 않는 눈 대신 귀를 기울였다. 찻집 바닥의 미세한 떨림, 문틀의 삐걱임, 그리고 손님들의 숨소리가 그의 머릿속에서 완벽한 삼차원의 공간으로 재구성되었다. 태경이 짚고 다니는 대나무 지팡이 ‘청풍죽(Cheongpung-juk)’은 겉보기엔 초라했으나, 지면에 닿을 때마다 미세한 진동을 그의 손끝으로 전달하는 영리한 도구였다.
그때, 낙엽헌의 낡은 문이 거칠게 부서질 듯 열렸다.
쿵, 쿵, 쿵.
가죽 장화 뒷굽에 박힌 쇠못이 바닥을 짓밟는 무겁고 둔탁한 소리. 거친 가죽 옷의 마찰음과 비린내가 찻집의 은은한 찻향을 단숨에 찢어발겼다. 흑호방의 행동대장, 왕칠(Wang-chil)이었다.
"어이, 눈먼 점소이! 이번 달 장터 상납금이 아직 안 들어왔는데, 귀까지 처먹은 건 아니겠지?"
왕칠의 목소리에는 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오만한 살기가 섞여 있었다. 그의 심장 박동은 분당 여든 번이 넘게 뛰고 있었다. 탐욕과 포악함으로 가득 찬 삼류 무사의 전형적인 맥박이었다. 태경은 행주를 쥔 손을 미세하게 떨며, 겁에 질린 평범한 맹인 점소이의 표정으로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아, 아이고, 왕대협... 낙엽촌에 폭설이 내린 뒤로 손님이 끊겨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도 벅찬 형편입니다. 며칠만 기한을 더 주신다면 어떻게든..."
"닥쳐라! 내 사정 봐주다가 방주님께 내 목이 날아갈 판이다. 당장 은화 세 냥을 내놓지 않으면 이 찻집을 통째로 불태워버리겠다!"
왕칠이 거구의 흑철도를 탁자 위에 내리찍었다.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찻잔들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구석에 앉아 있던 가난한 주민들이 겁에 질려 신음을 흘렸다.
그때, 찻집 한구석에서 낡은 무복을 입은 청년이 의자를 젖히며 일어섰다. 설소백(Seol So-baek)이었다.
"그쯤 해두지, 왕칠."
소백의 목소리는 우직했으나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태경은 소백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척추는 선천적으로 기형적으로 뒤틀려 있었다. 숨을 깊이 들이마실 때마다 왼쪽 허리 부근의 근육이 비정상적으로 조여들며 약한 마찰음이 발생했다. 정통 무공의 기준으로는 평생 삼류(Third-Class)의 벽을 넘지 못할 저주받은 체질이었다.
왕칠이 고개를 돌려 소백을 비웃었다.
"하! 설소백이 아니냐?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해 삼류 검객 무리에 겨우 껴 밥 벌어먹는 놈이 감히 대협 흉내를 내는군. 네 놈의 부러진 철검으로 내 도를 막아설 셈이냐?"
"무고한 백성들을 겁박하는 짓은 정파의 의리가 아니다. 검을 거둬라."
소백이 허리춤에서 이가 빠진 낡은 철검을 뽑아 들었다. 슥, 하는 파공음조차 그의 뒤틀린 어깨 관절 때문에 궤적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태경은 안대 뒤에서 속으로 나지막이 탄식했다.
‘어리석은 놈. 몸의 뼈가 정방향으로 자라지 않았거늘, 명문 정파의 정형화된 검로를 억지로 흉내 내려 하니 검 끝이 흔들릴 수밖에.’
왕칠이 흉포한 미소를 지으며 흑철도를 비스듬히 치켜들었다.
"네 놈의 뼈를 통째로 으깨주마!"
왕칠이 대지를 박차고 돌진했다. 그의 도가 위에서 아래로 수직으로 쏟아졌다. 둔탁하지만 강력한 외공의 힘이 실린 일격이었다. 소백은 정통 검술의 방어 초식인 ‘철벽수호’를 전개하며 검을 가로질러 막아서려 했다.
깡!
무거운 쇳소리가 낙엽헌 내부를 흔들었다. 소백의 낡은 철검이 왕칠의 도날에 찍히는 순간, 소백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뒤틀린 등뼈가 왕칠의 강맹한 내력을 받아내지 못하고 힘의 불균형을 일으킨 것이다. 소백의 어깨 관절이 삐걱거리며 극심한 통증을 유발했다.
"우욱!"
소백이 단전에서 억지로 내력을 끌어올려 버티려 했다. 그러나 뒤틀린 기맥 속에 갇힌 기운이 갈 길을 잃고 꼬여버렸다. 기혈의 역류. 소백의 입술 사이로 붉은 선혈이 울컥 뿜어져 나왔다.
"하하하! 내력조차 제대로 운기하지 못하는 쓰레기 같은 몸뚱이로 누굴 지키겠다는 거냐!"
왕칠이 도를 밀어붙이며 소백을 압박했다. 소백의 무릎이 바닥에 닿을 듯 비틀거렸다. 그의 낡은 검신에 미세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이대로 3 숨만 지나면 소백의 척추 경맥이 완전히 파열되어 폐인이 될 판이었다.
태경은 손에 쥔 찻잔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무공을 쓸 수 없는 육체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장서각에서 외운 천하 모든 무학의 사각지대와 약점 분석도가 실시간으로 회전하고 있었다.
‘왕칠의 도법은 투박하다. 하체에 내력을 집중시키느라 상체의 중심이 오른쪽 뒤꿈치로 쏠려 있어. 소백이 지금 정면으로 막으려 하니 뼈가 부러지는 것이다. 힘의 방향을 흘려야 한다.’
태경은 겁에 질려 발을 헛디딘 척하며, 손에 쥐고 있던 찻잔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쨍그랑!
날카로운 파열음이 찻집 바닥을 때렸다. 그와 동시에 찻잔 파편이 바닥을 튕기며 왕칠의 가죽 장화 뒷굽을 가볍게 때렸다. 아주 미세한 방해였지만, 힘을 극도로 쥐어짜던 왕칠의 오른쪽 뒤꿈치 무게중심이 찰나의 순간 흔들렸다.
동시에, 태경은 바닥의 찻잔 조각을 쓰는 시늉을 하며 소백의 귀에만 들릴 정도로 나지막하게, 그러나 쇠가 울리는 듯한 기묘한 주파수의 구결을 읊조렸다.
"우측 이 보 회피. 검을 비스듬히 눕혀 칼날을 타고 흘려라. 뼈의 뒤틀림을 탄성으로 삼아라."
그 목소리는 소백의 귓전을 때리는 청량한 종소리 같았다. 주화입마의 위기 속에서 혼미해지던 소백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소백은 왜 자신이 그 맹인 점소이의 목소리를 따랐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몸은 이미 지시에 따라 본능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소백은 억지로 버티던 힘을 단숨에 뺐다. 그리고 몸을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회전시키며 검날을 왕칠의 도날 측면에 가볍게 비벼댔다.
슥!
왕칠의 묵직한 흑철도가 소백의 검신을 타고 미끄러지듯 옆 허공을 갈랐다. 정면으로 부딪치던 거대한 힘이 허공으로 흩어지며, 중심을 잃은 왕칠의 거구가 앞으로 크게 비틀거렸다. 힘의 완벽한 역이용이었다.
"이, 이놈이?!"
왕칠이 당황하여 도를 거둬들이려 했다. 소백은 이 기회를 잡아 반격하려 했다. 그는 정통 정파 검술의 기초 초식인 ‘낙엽일참’을 전개하며 검을 앞으로 찔렀다.
하지만 아차 하는 순간, 소백의 뒤틀린 기형 골격이 다시 발목을 잡았다. 정방향으로 무리하게 어깨를 뻗는 순간, 뚝! 하는 섬뜩한 마찰음과 함께 오른쪽 어깨 관절이 탈구되어 버린 것이다. 극심한 통증에 소백의 검 끝이 허공에서 크게 흔들렸다.
"크윽!"
검을 떨어뜨릴 뻔한 소백이 비틀거렸다. 반격의 타이밍을 완전히 잃어버린 순간이었다.
중심을 회복한 왕칠의 안광이 살기로 번뜩였다.
"잔꾀를 부려봤자 삼류는 삼류일 뿐이다!"
왕칠이 도를 회전시키며 소백의 가슴을 향해 무자비하게 내리찍었다. 소백은 탈구된 어깨를 감싸 쥐며 간신히 부러진 철검으로 막아섰으나, 무거운 외공의 파괴력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날아가 탁자를 부수며 처박혔다.
콰직!
소백의 낡은 삼류 철검의 이가 크게 빠지며 바닥으로 뒹굴었다. 소백은 가슴을 움켜쥔 채 붉은 피를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지독한 무력감과 패배의 굴욕이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가문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강해지고 싶었으나, 뒤틀린 육체는 그에게 삼류의 쇠사슬을 채워놓았을 뿐이었다.
왕칠은 바닥에 떨어진 소백의 철검을 장화로 짓밟아 부러뜨렸다. 그리고 찜찜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목을 매만졌다. 방금 전 소백이 자신의 검강을 완벽한 각도에서 흘려보냈던 그 기이한 회피의 감각이 여전히 손끝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방금 그 흘리기는 삼류 검객 따위가 펼칠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배후에 사파의 고수라도 숨어 있는 건가?’
왕칠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찻집 내부를 샅샅이 훑었다. 그의 시선이 구석에서 벌벌 떨며 깨진 찻잔 조각을 줍고 있는 눈먼 점소이 태경에게 닿았다. 태경은 손가락 끝에 피를 묻혀가며 겁에 질려 웅크려 있었다. 아무런 내력도, 살기도 느껴지지 않는 완벽한 일반인의 몸뚱이였다.
"쳇, 쓸데없는 의심이었군."
왕칠이 침을 뱉으며 도를 거뒀다.
"설소백, 오늘은 이 정도로 봐주마. 하지만 사흘 뒤에도 상납금을 내지 못한다면, 네 놈의 누이와 병든 모친을 흑호방의 사설 뇌옥으로 끌고 가겠다. 명심해라!"
왕칠이 가죽 장화를 삐걱거리며 찻집을 빠져나갔다. 그의 뒤로 흑호방 무사들의 거친 웃음소리가 멀어졌다.
찻집 안에는 무거운 침묵과 마른 먼지만이 감돌았다. 주민들은 서둘러 자리를 피했고, 소백은 부러진 검 조각을 쥔 채 바닥에 엎드려 어깨를 떨었다. 스스로의 나약함에 대한 끓어오르는 분노와 절망이 찻집 바닥을 적셨다.
슥, 슥.
대나무 지팡이가 바닥을 가볍게 짚는 소리가 소백의 머리맡으로 다가왔다.
태경이 천천히 다가와 소백의 앞에 멈춰 섰다. 찻잔을 닦던 태경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안대 뒤에 숨겨진 보이지 않는 눈이, 소백의 뒤틀린 경맥 속에서 폭발하듯 요동치던 기운의 궤적을 고스란히 그려내고 있었다.
태경이 나지막하게, 그러나 소백의 영혼을 흔드는 차가운 음성으로 속삭였다.
"뒤집힌 뼈를 가졌으면서 하늘의 정방향 길을 고집하니 피를 토하는 법이다. 살고 싶다면, 네 기맥을 뒤집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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