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녀봉의 만장절벽과 허실상생의 신법
화산(華山)의 밤은 차가운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옥녀봉(玉女峰)의 가파른 산등성이를 따라 불어오는 밤바람은 살을 에는 듯 매서웠고, 짙은 안개는 산등성이 전체를 집어삼킬 듯 쉴 새 없이 몰려들었다. 늦은 밤, 어스름한 달빛조차 안개 장막에 가려져 한 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운 시각이었다.
백무기는 평소처럼 어리숙한 걸음걸이로 비틀거리며 옥녀봉의 외진 산길을 걷고 있었다. 그의 오른쪽 뺨에는 낮에 공양간 주방에서 밀쳐져 생긴 푸른 피멍 자국이 거뭇하게 남아 있었고, 품속에는 낮의 소동 속에서도 기어코 지켜낸, 낡은 무명 붕대로 촘촘하게 감아 보수한 대나무 목검이 소중하게 안겨 있었다.
무기는 침을 흘리며 바보 같은 미소를 지은 채 터덜터덜 걸었으나, 그의 내면은 낮의 소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요했다. 설도인이 장서각에 나타나 장문인의 신표를 들어 보이며 제갈우 일파의 누명을 꺾어주었던 대낮의 풍경. 그리고 스승 독고풍의 왼손을 잡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던 은밀한 목소리가 소년의 귓가를 맴돌았다.
‘독고성(獨孤成)의 아들이 살아있었구려.’
그 말의 무게를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무기는 자신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야 할 스승의 어깨 뒤에 얼마나 거대하고 슬픈 과거가 얽혀 있는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단전 깊숙한 곳에서 태극경맥의 정순한 기류가 마치 스승의 부드러운 손길처럼 따뜻하게 운기되며,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도 소년의 온몸을 굳건하게 보호하고 있었다.
스스스슥.
그때, 가파른 옥녀봉 산길 옆 울창한 잡목림 사이에서 기이한 바람 소리가 일었다. 단순한 밤바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의 옷자락이 나뭇가지를 스치는 서늘한 기척이자, 강한 살기를 품은 화산파 고유의 내공 흐름이었다.
무기가 우뚝 걸음을 멈추기도 전에, 안개 장막을 뚫고 한 사내가 검을 빼 들며 길목을 가로막아 섰다.
비단 도포를 걸치고 허리에 화려한 옥대를 찬 청년, 제갈충이었다. 그의 뒤로는 험악한 인상의 하급 제자 세 명이 살기 어린 눈빛으로 무기를 에워쌌다.
제갈충의 얼굴은 낮에 장서각에서 설도인의 신표에 밀려 겪었던 굴욕 탓에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의 손에 쥔 청풍검(靑風劍)의 푸른 검신이 서늘한 달빛을 받아 번뜩였다.
"바보 새끼. 낮에는 그 늙은 장로놈의 치마폭 뒤에 숨어 목숨을 건졌지만, 이 깊은 밤 옥녀봉 절벽 끝까지 나를 피해 도망칠 수 있을 것 같더냐?"
제갈충이 이를 갈며 검을 비스듬히 겨누었다.
"아버님께서 말씀하셨다. 장서각에 숨은 고수의 정체가 무엇이든, 우선 그 배후의 유일한 약점인 이 바보 핏줄을 소리 소문 없이 치워버리면 제아무리 대단한 놈이라도 스스로 기어 나오게 되어 있다고. 오늘 밤, 너는 이 만장절벽 아래로 발을 헛디뎌 추락사한 가여운 바보가 될 것이다!"
제갈충은 문파의 공적인 사법 권력인 규율당이 설도인에게 막히자, 사적인 암습을 통해 무기를 사고사로 위장해 제거하려는 극단의 선택을 내린 것이었다.
"아우으……? 충이 형아…… 검 놀이 하는 거야……?"
무기는 침을 흘리며 멍청한 표정으로 웅얼거렸지만, 그의 발끝은 이미 낙엽소청보의 기틀을 다지며 무게중심을 낮추고 있었다. 품속에 안긴 붕대 감긴 목검을 쥔 손목에 힘이 들어갔다.
"죽어라, 더러운 개자식!"
제갈충이 기합 소리와 함께 청풍검을 휘두르며 번개처럼 쇄도했다. 화산파의 유운검법(流雲劍法)이 날카로운 파공음을 내며 무기의 목덜미를 향해 사선으로 베어 들어왔.
무기는 바보처럼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로 크게 엎어지는 척했다.
깡!
무기가 반사적으로 들어 올린 붕대 감긴 목검이 청풍검의 날카로운 측면을 아슬아슬하게 비껴 막아냈다. 그러나 제갈충은 삼류 극처의 단단한 내공을 지닌 화산의 정식 제자였다. 검과 목검이 부딪치는 순간 뿜어진 강한 반탄력이 무기의 얇은 마의를 찢고 들어왔다.
무기는 비틀거리며 뒤로 서너 걸음 물러섰다. 발뒤꿈치 끝에서 흙바닥이 바스러지며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바로 등 뒤는 떨어지면 뼈도 추릴 수 없다는 만장절벽, 옥녀봉의 끝자락이었다.
"막아섰느냐? 바보 새끼 주제에 제법 질긴 목숨이구나!"
제갈충이 광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검을 거두고, 전신의 진기를 오른발 끝으로 집중시켰다. 그의 발끝에서 화산파 외공의 붉은 진기가 이글거리며 피어올랐다. 제갈충이 허공을 박차며 무기의 가슴을 향해 매서운 발차기를 날렸다.
무기는 절벽 끝 바위를 왼손으로 잡으려 했으나, 축축한 이끼에 미끄러져 손끝이 찢어지며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지탱할 곳을 잃은 무기의 가슴팍으로 제갈충의 묵직한 가죽 장화 굽이 사정없이 내리꽂혔다.
쿵!
가슴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거대한 충격이 전해졌다. 설도인이 무기의 옷 안감에 몰래 꿰매어 두었던 북해산 사슴 가죽 현갑피(玄岬皮)가 타격의 충격을 100% 흡수하지 못하고, 미세한 긁힘과 함께 무기의 신형이 뒤로 붕 떠올랐다.
허공이었다.
무기의 몸이 옥녀봉의 자욱한 안개 장막을 뚫고, 만장절벽 아래의 차갑고 어두운 심연 속으로 속절없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하하하! 떨어졌다! 드디어 저 더러운 핏줄을 내 손으로 지워버렸다!"
절벽 끝에 선 제갈충의 미친 듯한 웃음소리가 밤바람을 타고 멀어져 갔다.
추락하는 찰나, 무기의 주변을 감싸고 돌던 밤바람이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으로 변해갔다. 사방의 어둠이 소년을 집어삼키려 장막을 넓히던 바로 그 순간, 무기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쓸쓸히 마당을 쓸던 스승 독고풍의 낮고 묵직한 음성이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무기야, 세상의 모든 초식은 허(虛)와 실(實)이 공존하는 법이다. 눈에 보이는 궤적은 허상이요, 마음으로 디디는 발끝의 흐름만이 진짜 실체다. 바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바람을 디디고 서라.’
무기는 허공에서 질식할 것 같은 공포를 지워내며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단전 깊은 곳에 봉인되어 있던 대기만성형 태극경맥이 폭주하듯 요동치며, 얼음처럼 차가운 음기와 뜨거운 양기를 전신 경맥으로 방출하기 시작했다.
소년은 추락하는 신체의 무게중심을 억지로 우회시켰다. 발바닥의 용천혈을 통해 미세한 진기를 뿜어내며, 바람의 저항을 디딤돌 삼아 방향을 비틀었다.
이형환위 - 허실상생(虛實相生)의 극의였다.
허공 속에서 무기의 신형이 순간적으로 물안개처럼 흐릿하게 일그러졌다. 제갈충의 눈에는 무기가 비명을 지르며 끝없는 안개 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허상(虛像)'만이 맺혔을 뿐이었다. 진짜 무기의 '실체(實體)'는 바람의 흐름을 타고 절벽 안쪽의 가파른 바위벽으로 신속하게 우회하고 있었다.
스스스슥.
추락의 속도가 극에 달했을 때, 무기는 절벽 바위틈 사이로 기적처럼 튀어나와 있는 작은 소나무 가지를 발견했다.
소년은 몸을 회전시키며 가볍게 발끝으로 소나무 가지를 디뎠다. 답설무흔(踏雪無痕)의 경공 기틀이 발현되며, 나뭇가지 하나 부러뜨리지 않고 가볍게 신형을 탄력적으로 솟구쳐 올렸다.
현갑피 가죽이 절벽의 날카로운 바위 모서리에 쓸리며 찌르릉 하는 마찰음이 일었으나, 무기는 손가락 끝의 찢어진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움켜쥐며 깃털처럼 가볍게 허공을 날아올랐다. 소년의 몸은 마치 계곡 아래에서 불어 올라오는 강력한 상승기류를 타고 비상하는 한 마리 매처럼, 소리 없이 절벽 위를 향해 수직으로 상승했다.
절벽 가장자리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승리감에 도취해 있던 제갈충은 여전히 광기 어린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이제 장서각의 그 외팔이 늙은이 차례다. 아버님께 보고하여 당장 그 서고를……."
스스스슥.
제갈충의 등 뒤로, 자욱한 안개를 헤치고 단 한 줌의 바람 소리조차 내지 않는 그림자 하나가 조용히 내려앉았다.
비에 젖은 진흙 바닥을 디뎠음에도 발자국 소리는 전혀 나지 않았다.
무기는 말없이 서서, 품속에서 꺼낸 붕대 감긴 대나무 목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리고 물 안개 속에서 은밀하게 빛나는 목검 끝을 제갈충의 목덜미 바로 뒤, 서늘한 살갗에 가만히 가져다 대었다.
차가운 목검의 감촉이 목덜미에 닿는 순간, 제갈충의 웃음소리가 뚝 끊겼다.
피가 얼어붙는 듯한 기괴한 살기가 그의 등 뒤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제갈충은 침을 삼키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안개 속에서 드러난 소년의 얼굴은 더 이상 바보의 그것이 아니었다. 밤하늘의 심연처럼 투명하고 차갑게 빛나는 깊은 두 눈망울이 제갈충의 영혼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Chưa có bình luận nào. Hãy là người đầu tiê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