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실의 그림자와 보이지 않는 장벽
배진의 부하들이 비명을 지르며 장서각의 낡은 사문을 박차고 안개 속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손목 뼈가 완전히 바스러진 외문 집사 배진은 흙바닥을 기어 다니며 단검마저 내팽개친 채 비명을 질러댔다. 장서각 대청에 가득했던 긴장감은 일순간 기괴한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백무기는 쪼개진 대나무 목검을 쥔 채, 도망치는 자들의 등 뒤를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응시했다. 소년의 오른쪽 뺨에는 공양간 주방바닥에 처박힐 때 생긴 푸르스름한 피멍 타박상이 선명했고, 배진의 부하들과 부딪치며 다친 왼쪽 어깨가 욱신거렸으나 소년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단전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던 정순한 태극의 진기가 서서히 가라앉으며, 매서웠던 안광 역시 본래의 흐릿한 바보 소주의 눈빛으로 되돌아갔다.
‘스승님을 모욕하는 자는 그 누구라도 내 검 끝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내 뺨의 피멍보다 스승님의 얼굴에 새겨진 손자국이 만 배는 더 아프다.’
무기는 내면의 다짐을 삼키며, 다시 어깨를 흐느적거리고 어눌한 바보의 표정을 지었다.
독고풍은 묵묵히 걸어와 무기의 어깨를 부드럽게 짚었다. 텅 빈 오른팔 소매를 허리춤에 묶은 노인의 눈빛에는 제자를 향한 깊은 대견함과 동시에, 앞으로 닥쳐올 거대한 폭풍에 대한 냉철한 경계심이 교차하고 있었다. 노인은 마당 구석에 처박혀 있던 낡은 대나무 빗자루를 왼손으로 주워들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배진이 흘린 핏자국과 흩어진 먼지들을 빗자루 끝으로 쓸어내기 시작했다. 장서각의 벙어리 청소부 노인으로 돌아가는 일상의 의식이었다.
무기는 스승의 무언의 지시를 이해하고, 바닥에 주저앉아 쪼개진 대나무 목검의 끝부분을 내려다보았다. 배진의 단단한 양계혈을 타격하는 과정에서 대나무 결이 완전히 일어나 부러진 상태였다. 무기는 자신의 양손바닥에 감겨 있던, 밤샘 작업의 피고름을 막아주던 낡은 무명 붕대를 천천히 풀었다. 그리고 부러진 목검의 쪼개진 끝부분과 손잡이를 붕대로 단단히 동여매기 시작했다. 거친 붕대가 목검의 깨진 결을 촘촘히 감싸 안자, 조잡하지만 기묘한 형태의 붕대 감긴 목검이 완성되었다. 무기는 이 부러진 무기를 품에 소중히 안았다.
오후가 지나고 밤이 깊어지자, 화산의 찬바람은 장서각의 허름한 창살을 두드리며 음산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배진의 참패 소식은 이미 옥녀봉의 삼장로 제갈우에게 보고되었을 터였다. 제갈우는 외문 집사 배진이 바보 소주에게 일격에 패했다는 사실에 극도의 경악과 의심을 품었을 것이 분명했다. 장서각 내부에 자신들의 눈을 피해 은밀히 움직이는 일류 고수가 숨어있다는 확신.
독고풍은 어둠이 깔린 장서각 대청의 바닥돌을 조용히 들어 올렸다. 비밀 홈 내부에는 독고세가 선조들의 비밀 위패와 함께, 무기가 천장 대들보에서 찾아낸 화산조사의 친필 비급 ‘검의록’이 숨겨져 있었다. 노인은 한쪽 소매를 휘날리며 지하 서고로 통하는 은밀한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 서고는 빛 한 점 들지 않아 이끼와 먼지 냄새가 자욱한 냉골이었다. 독고풍은 시조의 검의록에 적혀 있던 정종 구결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노인은 왼손 손가락 끝에 미세한 진기를 모아 지하 석실의 입구 전면에 허공을 가로지르는 궤적을 그렸다.
스스스슥.
노인의 손가락 끝이 지나간 자리에 투명한 공기가 미세하게 일그러지며, 마치 먹물이 물에 번지듯 반투명한 검은색 기류의 실선들이 촘촘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화산파 시조 백장천의 검의를 운용하여 만든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의 장벽, 묵흔검벽(墨痕劍壁)이었다. 역천폐맥공으로 닫아둔 단전에서 진기를 억지로 우회시켜 장벽을 형성하자, 독고풍의 심장 경맥에 뼈를 깎는 듯한 기혈 역류의 통증이 엄습했다. 노인은 이빨을 깨물며 신음 소리를 삼켰다. 제자 무기와 가문의 마지막 유산인 검의록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의 육체적 대가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장벽을 완성한 독고풍은 어둠 속으로 몸을 감추었다.
같은 시각, 장서각 지붕 위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제갈우의 조카이자 기민한 신법으로 화산파 내부의 은밀한 암살과 밀탐을 전담하던 제갈휘였다. 그는 검은 복면을 쓰고 은빛 가죽 갑옷을 걸친 채, 제갈세가 방계 심법인 추풍신법(秋風身法)을 전개하여 장서각 내부로 침투했다. 그의 목표는 장서각 내부에 숨겨진 고수의 실체와 진짜 비급의 행방을 알아내는 것이었다.
제갈휘는 고양이처럼 유연한 동작으로 1층 서고를 지나 지하 서고의 차가운 계단으로 내려갔다. 그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빛났다. 그는 책장 구석구석을 수색하던 중, 장 서방의 기문 미장술로 교묘하게 위장된 책장 뒤편의 기문둔갑형 은폐 벽돌을 발견했다.
‘여기에 비밀 통로가 있었군.’
제갈휘의 입가에 탐욕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가 은폐 벽돌을 정교하게 움직이자, 스르릉 하는 미세한 마찰음과 함께 시조의 비밀 검실로 통하는 흙벽의 입구가 서서히 열렸다. 석실 내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묵직하고 고결한 기운이 제갈휘의 피부를 자극했다. 그는 이곳에 제갈우가 그토록 갈망하던 화산의 진짜 비전 비급이 숨겨져 있음을 직감했다.
제갈휘는 탐욕에 눈이 멀어 검실 내부로 급히 발을 디뎠다.
그 순간, 허공에 아무것도 없던 공간이 일그러지며 먹색의 촘촘한 기의 그물망이 번뜩였다. 묵흔검벽의 방어 기류가 발동한 것이다.
"앗?!"
제갈휘는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끼고 소매 속에서 한철로 단조된 예리한 야간 침투용 단검을 꺼내 장벽을 찢으려 매섭게 휘둘렀다.
쨍――!
귓전을 때리는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제갈휘가 쥔 강철 단검이 묵흔검벽에 닿는 찰나 무참하게 부러져 나가며 허공으로 튕겨 올랐다. 장벽은 깃털처럼 유연해 보였으나, 그 본질은 절정 고수의 단단한 강기와 대종사의 검의가 조화를 이룬 거대한 무쇠벽이었다.
동시에 묵흔검벽에서 뿜어져 나온 거대한 무형의 반탄력이 제갈휘의 전면을 강타했다.
콰아아앙!
둔탁한 기의 타격음이 지하 서고의 차가운 공기를 진동시켰다. 제갈휘는 마치 거대한 철퇴에 가슴을 정면으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끼며 신형이 뒤로 날아갔다. 그의 가슴뼈가 삐걱거리며 어긋나는 소리가 좁은 통로에 울려 퍼졌다.
장벽의 가공할 만한 반탄력은 제갈휘의 체내 경맥으로 파고들어 그의 기경팔맥을 뒤흔들었다. 역류한 진기가 단전을 때리자, 제갈휘는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검붉은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우두둑.
"끄아악……!"
제갈휘는 가슴을 움켜쥔 채 비명을 질렀다. 전신의 경맥이 갈가리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사지가 마비되는 공포가 그를 덮쳤다. 눈앞이 붉게 흐려지는 와중에도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 장벽에 담긴 기운은 최소 화산파 장로급 이상, 아니 삼장로 제갈우마저 압도할 수 있는 절정 고수의 내공이었다.
"이, 이곳에 진짜 괴물이 숨어있었어……!"
제갈휘는 부러진 단검 잔해와 피비린내 나는 바닥을 뒤로한 채, 부서진 가슴뼈의 통증을 참으며 추풍신법을 억지로 전개했다. 그는 비틀거리는 신형을 이끌고 장서각 지하 통로를 빠져나가 야간의 짙은 안개 속으로 간신히 도망쳤다.
다음 날 새벽, 장서각 주변을 뒤덮었던 지독한 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독고풍은 잘려 나간 오른팔 소매를 흔들며 장서각의 낡은 대청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섰다. 노인의 왼손에는 다 닳아빠진 대나무 빗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노인이 빗자루를 쓸기 위해 마당 중앙으로 걸어갔을 때, 차가운 돌바닥 위에 흩뿌려진 붉은 흔적이 노인의 깊은 눈동자에 들어왔다.
돌바닥 위에는 제갈휘가 내상을 입고 도망치며 흘린 검붉은 핏자국이 장서각 사문 밖을 향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아침 햇살에 반사되어 번뜩이는 붉은 핏자국은, 조카의 부상에 격노한 제갈우가 다음 날 아침 장서각을 완전히 쓸어버리기 위해 감행할 대대적인 압수수색을 불길하게 예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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