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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림 속의 은인과 들보 위의 기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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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華山)의 겨울은 혹독한 서리와 함께 찾아온다. 장서각의 낡은 기와 틈새로 스며든 밤바람은 뼛속까지 시리게 만들었고, 서고 구석에 쌓인 고서들의 매캐한 종이 먼지는 차가운 공기 속에서 서글프게 부서져 내렸다.


백무기는 이른 아침부터 빈 속을 움켜쥐고 장서각 마당을 쓸고 있었다. 꼬르륵거리는 배꼽시계 소리가 고요한 마당에 크게 울려 퍼졌다. 전날 밤새도록 마당의 낙엽 궤적을 밟으며 낙엽소청보(落葉掃淸步)를 연습하느라 온몸의 뼈마디가 쑤시고 아렸지만,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위장을 쥐어짜는 듯한 극심한 굶주림이었다.


삼장로 제갈우의 아들, 제갈충이 내린 고사 작전은 잔인하리만치 철저했다. 장서각으로 향하는 모든 식량과 생필품의 보급이 완전히 끊긴 지 사흘째였다. 늙은 노복 아복이 공양간에 쌀을 받으러 갈 때마다, 제갈충의 사주를 받은 주방 일꾼들은 썩은 감자 몇 알조차 던져주지 않으며 그를 매질해 쫓아냈다. 장서각 삼인방에게 허락된 것은 오직 우물가의 차가운 생수뿐이었다.


무기는 손때 묻은 대나무 목검을 품에 안은 채, 장서각 뒤뜰의 마른 장작더미 옆에 주저앉았다. 소년의 뺨에는 며칠 전 제갈충 무리에게 맞아 생긴 피멍 자국이 푸르스름하게 남아 있었고, 밤새 목검을 깎느라 찢어진 양손바닥에는 굳은살과 피고름이 엉겨 붙어 있었다. 배고픔에 지친 무기의 눈동자는 다시 바보처럼 흐릿해져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서고 문턱에 앉아 있던 독고풍은 그런 제자의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잘려 나간 오른팔 소매를 허리춤에 단단히 묶은 회색 마의 차림의 노검사. 그의 깊고 어두운 눈망울 속에 형언할 수 없는 슬픔과 비장한 살기가 번뜩였다. 의형제 백천성의 유일한 혈육을 자신의 무력함 때문에 굶겨 죽이고 있다는 자책감이 노인의 가슴을 난도질했다.


독고풍은 왼손으로 낡은 대나무 빗자루를 꽉 쥐었다. 당장이라도 금침을 해방해 공양간을 쓸어버리고 식량을 빼앗아오고 싶은 충동이 일었으나, 이내 이빨을 깨물며 살기를 억눌렀다. 지금 내력을 드러내는 것은 제갈우와 그 배후에 있는 사마무극에게 자신들의 목을 바치는 꼴이었다. 철저히 숨어야 했다. 그것만이 이 바보 제자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었다.


배고픔을 참지 못한 무기가 마침내 주먹을 꽉 쥐고 일어섰다. 소년은 어리숙한 걸음걸이로 화산파 공양간 주방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머릿속에는 오직 스승인 독고풍과 늙은 아복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대접하고 싶다는 순수한 열망뿐이었다.


화산파 공양간 주방은 이른 아침부터 만두를 찌는 하얀 김과 고소한 고기 국물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거대한 가마솥 아래에서 장작불이 타오르고 있었고, 수십 명의 주방 일꾼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무기가 낡은 나무 바루를 들고 주방 문턱을 넘어서자, 뚱뚱한 주방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앞을 막아섰다.


"어라? 이 바보 새끼가 또 기어들어 왔네?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발을 들여놓느냐!"


주방장의 호통에 주변에 있던 하급 제자들과 주방 일꾼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무기를 비웃기 시작했다.


"야, 저 땟국물 흐르는 얼굴 좀 봐라. 장서각에서 굶어 죽어가니까 밥 달라고 구걸하러 왔나 보네."


"삼장로님의 명령이다. 장서각의 벙어리 늙은이와 바보 새끼에게는 물 한 모금도 주지 말라 하셨다. 당장 꺼지지 못할까!"


무기는 그들의 모욕적인 언사에도 묵묵히 나무 바루를 내밀었다. 소년의 뺨에 난 푸른 상처를 본 주방장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찜기에서 막 꺼낸 뜨거운 고기 만두 하나를 집어 들었다. 만두의 고소한 향기가 무기의 코끝을 자극했다.


"밥이 먹고 싶으냐? 그렇다면 개처럼 짖으며 마당을 기어봐라. 그럼 이 만두 하나쯤은 던져줄 용의가 있다."


제자들이 배를 잡고 폭소를 터뜨렸다. 무기는 그들의 조롱 속에서도 눈동자의 깊은 영기를 숨긴 채, 묵묵히 주방장의 손에 들린 만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굶주린 스승에게 이것이라도 가져다주고 싶었다.


"어디서 감히 더러운 손을 밀어내!"


주방장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무기의 가슴을 강하게 밀쳐냈다. 내공이 실리지 않은 거친 완력이었으나, 굶주림으로 기력이 쇠한 무기는 뒤로 크게 비틀거리며 공양간 바닥의 흙더미 위로 보기 좋게 처박혔다.


쿵!


무기의 얼굴이 차가운 흙바닥에 묻혔고, 오른쪽 뺨에 붉고 푸른 타박상이 새로이 새겨졌다. 나무 바루는 바닥을 뒹굴며 먼지투성이가 되었다. 제자들의 비웃음 소리가 주방 가득 울려 퍼지는 가운데, 무기는 묵묵히 일어나 흙을 털어냈다. 복수하고 싶은 불꽃이 내면에서 꿈틀거렸으나, '어떤 모욕도 침묵으로 견디라'던 독고풍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소년은 조용히 바루를 줍고 장서각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장서각으로 돌아온 무기의 몰골을 본 독고풍의 심장은 찢어지는 듯했다. 노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벙어리였기에, 오직 거친 왼손으로 무기의 뺨에 묻은 흙먼지를 닦아줄 뿐이었다. 무기의 새로 생긴 뺨의 타박상 위로 독고풍의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무기는 헤헤 웃으며 스승의 옷자락을 쥐었지만, 두 사람의 위장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그날 밤, 화산 산자락에 차가운 겨울비가 진눈깨비로 변해 내리기 시작했다. 사방이 칠흑 같은 어둠에 잠기고 순찰 도사들의 발걸음마저 뜸해진 야심한 시각.


장서각 뒤뜰의 땔감 장작더미 뒤로 작은 그림자 하나가 은밀하게 움직였다. 양갈래 머리를 땋고 볼에 그을음이 잔뜩 묻은 어린 여종, 삼월이였다.


삼월이는 주방에서 일하며 무기의 맑고 순수한 성정을 아끼던 유일한 친구였다. 그녀는 낮 동안 무기가 공양간에서 굴욕을 당하고 처박히는 모습을 보며 남몰래 눈물을 흘렸었다. 삼월이는 사방을 초조하게 두리번거리며 품속에서 거친 무명천에 싸인 뭉치 하나를 꺼냈다.


그것은 삼월이가 감시 도사들의 눈을 피해, 대형 가마솥 바닥을 긁어 모아 만든 딱딱하고 고소한 누룽지였다. 들키면 공양간에서 쫓겨나고 가혹한 태형을 당할 수 있는 신분적 위험이 따랐지만, 삼월이는 굶주리는 친구를 위해 목숨을 건 모험을 감행한 것이었다.


삼월이는 누룽지 주머니를 장작더미 깊숙한 틈새에 조심스럽게 밀어 넣은 뒤, 소리 없이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바람결에 실려오는 미세한 곡식의 단내를 맡은 무기가 본능적으로 뒤뜰로 걸어 나갔다. 장작더미 틈새를 뒤적이던 소년의 손에 따뜻한 무명천 뭉치가 잡혔다. 주머니를 열자, 갓 긁어내어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바삭하고 노르스름한 누룽지 조각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무기는 누룽지를 품에 안고 급히 서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서고 구석에서 추위에 떨고 있던 독고풍의 앞에 무기가 누룽지 주머니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으, 으으……."


무기는 어눌한 소리를 내며 누룽지 한 조각을 집어 독고풍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스승이 먼저 먹어야 자신도 먹겠다는 고집스러운 눈빛이었다.


독고풍은 제자의 피 묻은 손과 누룽지를 번갈아 바라보며 목이 메어왔다. 비천한 여종이 전해준 이 소박한 구휼 식량은, 위선으로 가득 찬 화산파의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 고결하고 따뜻했다. 노인은 누룽지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고소하고 바삭한 식감이 입안 가득 퍼지며 얼어붙었던 위장을 따뜻하게 녹여내기 시작했다.


독고풍이 먹는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무기도 누룽지를 입에 넣고 바삭바삭 소리를 내며 씹어 먹었다. 딱딱한 누룽지가 목구멍을 넘어갈 때마다 소모되었던 기력이 단전 밑바닥에서부터 미세하게 솟구치는 것이 느껴졌다. 삼월이의 따뜻한 온기가 무기의 꼬여 있던 태극경맥을 부드럽게 자극하며 체온을 회복시켜 주었다.


기운을 차린 무기는 밤 깊은 시각, 장서각 내부의 청소를 시작했다. 몸을 계속 움직여야 추위를 이길 수 있었고, 스승이 남겨준 신법의 궤적을 몸에 온전히 새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무기는 다 닳아빠진 대나무 빗자루를 잡았다. 소년의 눈빛은 다시 맑고 영롱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무기는 장서각 1층의 먼지를 쓸어내고, 고서적들의 먼지를 조심스럽게 털어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어두컴컴한 장서각 천장 대들보를 향했다.


대들보 위에는 수십 년 동안 쌓인 자욱한 먼지와 끈적이는 거미줄이 가득했다. 보통의 잡역부라면 감히 올라갈 엄두도 내지 못할 높은 곳이었으나, 무기는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스으으슥.


무기의 발끝이 지면을 스치듯 미끄러졌다. 전날 밤 깨우친 소리 없는 보법, 낙엽소청보(落葉掃淸步)의 신묘한 기틀이었다.


소년은 장서각의 굵은 목조 기둥을 가볍게 디디며 솟구쳐 올랐다. 그의 신형은 바람에 휘날리는 깃털처럼 가벼웠고, 발자국 소리는 단 한 줌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기둥을 딛고 허공을 가볍게 회전한 무기는 천장 꼭대기의 굵은 대들보 위에 소리 없이 안착했다. 아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독고풍의 눈동자가 경탄으로 가늘어졌다. 무기는 이미 이형환위의 기초를 신체에 완벽히 체득하고 있었다.


무기는 대들보 위에 서서 대나무 빗자루 끝으로 거미줄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백 년 묵은 먼지 더미가 자욱하게 쏟아져 내려 눈 앞을 가렸지만, 소년은 침착하게 빗자루를 밀어냈다.


사각, 사각.


빗자루 자루 끝이 대들보의 가장 깊고 어두운 틈새, 나무와 나무가 엇갈려 물려 있는 비좁은 공간을 훑고 지나갔다.


탁.


무언가 딱딱하고 묵직한 물체가 빗자루 끝에 걸렸다. 먼지와 거미줄에 싸여 대들보와 같은 색으로 변해 있어 육안으로는 결코 찾을 수 없었던 물건이었다. 무기가 빗자루를 가볍게 비틀자, 대들보 틈새에 끼어 있던 단단한 가죽 뭉치가 중심을 잃고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툭, 타아앙!


가죽 뭉치가 장서각 대청 바닥의 차가운 돌바닥 위로 무거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자욱한 먼지 구름이 일며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무기는 가볍게 신형을 날려 바닥으로 착지했다. 독고풍이 이미 그 가죽 뭉치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백 년의 세월 동안 잊혀졌던 차가운 침묵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독고풍은 떨리는 왼손으로 가죽 뭉치를 감싸고 있던 거미줄과 먼지를 쓸어내렸다. 그것은 세월의 흐름 속에 검게 변색된 두꺼운 사슴 가죽 주머니였다. 주머니의 입구는 낡은 가죽 끈으로 단단히 묶여 있었고, 그 표면에는 화산파 시조가 사용하던 고대 도가의 태극 문양이 희미하게 양각되어 있었다.


노인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이것은 화산파의 그 어떤 역사서에도 기록되지 않은, 선대 장문인 현각도인이 삼장로 일파의 탐욕을 피해 장서각 가장 높은 곳에 숨겨두었던 화산의 진짜 혼이었다.


독고풍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가죽 끈을 풀었다. 주머니 내부에서 낡고 누런 종이책 한 권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책의 표지에는 거칠고 호방한 필체로 세 글자가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검의록 (劍意錄).


화산파 시조 백장천의 친필 비급이었다. 현대 화산파가 잃어버렸던, 형식과 초식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자연의 기운을 담아 마음으로 검을 부리는 진짜 화산정종 무학의 원형이 마침내 백 년의 봉인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독고풍은 경외감에 가득 찬 얼굴로 서책의 첫 장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서스스슥.


낡은 종이가 넘어가며 해묵은 묵향(墨香)이 장서각 내부의 차가운 공기 속으로 뿜어져 나왔다.


그 순간, 서책의 첫 페이지에 새겨진 시조 백장천의 친필 묵흔(墨痕)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하고 정순한 검의(劍意)의 기류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자욱하게 가라앉아 있던 서고의 먼지들이 그 기세에 밀려 사방으로 어지럽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


독고풍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굳어버렸다. 서책에서 흘러나온 시조의 영적인 기운이 노인의 왼손 손가락 끝을 타고 올라가, 그의 끊어지고 망가진 경맥을 거칠게 진동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검의의 파동이 노인의 뼈와 단전을 사정없이 때리며 강력한 공명을 일으키고 있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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