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꺾인 대나무와 백치 소주의 첫 목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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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 일당이 장서각의 서책들을 약탈해 떠난 뒤, 늦은 가을의 황혼은 붉은 피처럼 화산의 옥녀봉을 물들였다. 사문 너머로 멀어지는 배진의 오만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당 중앙에 서 있던 독고풍의 왼손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가 쥔 다 닳은 대나무 빗자루 끝에서 보이지 않는 미세한 기류가 일어 지면의 흙먼지를 조용히 갈라놓았으나, 이를 알아챈 자는 아무도 없었다. 독고풍은 이내 전신을 감싸고 있던 분노의 살기를 역천폐맥공의 심연 속으로 깊숙이 밀어 넣었다. 지금은 참아야 했다. 아직 의형제의 마지막 핏줄을 지킬 방패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인은 무릎을 꿇고 흙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백무기에게 다가갔다. 소년의 이마에서는 배진의 거친 발길질에 찢어진 상처를 타고 붉은 피가 흘러내려 투명한 눈망울을 적시고 있었다. 무기는 아픔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듯, 그저 이마를 훔치며 독고풍을 향해 바보처럼 헤헤 웃었다.


"하, 할아버지…… 아포. 할아버지도 아포?"


독고풍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는 10년 전 이 장서각에 은거한 이후로 철저히 벙어리 행세를 해온 몸이었다. 노인은 묵묵히 왼손을 뻗어 무기의 가벼운 몸을 안아 올렸다. 오른팔 소매가 텅 빈 채 허리춤에 초라하게 묶인 노병의 실루엣은 쓸쓸하기 그지없었으나, 소년을 지탱하는 그의 단 하나의 왼팔만큼은 태산처럼 단단하여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독고풍은 무기를 장서각 1층 모퉁이에 놓인 딱딱한 목판 침대에 눕혔다. 늙은 노복 아복이 절뚝거리며 따뜻한 물을 대접에 담아왔고, 독고풍은 품속에서 낡은 마포 종이에 싸인 약재를 꺼냈다. 화산파 약선당의 하급 약사 장운이 제갈우의 눈을 피해 몰래 전해 주었던 어혈 소고약(瘀血 消膏藥)이었다. 독고풍은 손끝에 고약을 묻혀 무기의 이마 상처에 조심스럽게 발라주었다. 차가운 약재가 살갗에 닿자 무기는 몸을 움츠리면서도 독고풍의 마의 자락을 꽉 쥔 손을 놓지 않았다. 그 맑고 순수한 신뢰 앞에서 독고풍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죄책감과 애틋함을 동시에 느꼈다.


밤이 깊어 장서각 사위에 차가운 안개가 내려앉자, 독고풍은 침상에 누운 무기의 등 뒤에 조용히 앉았다. 그는 왼손의 검지와 중지를 모아 소년의 척추 중간에 위치한 신유혈을 짚었다. 역천폐맥공으로 단단히 닫아두었던 그의 단전에서 아주 미세하고 정순한 도가의 진기가 한 가닥 실처럼 흘러나와 소년의 꼬여 있는 대기만성형 태극경맥 속으로 침투했다. 머리로 향하는 기맥의 봉인을 풀기 위한 밤마다의 은밀한 인도법이었다. 진기가 맥을 짚을 때마다 무기는 읍, 읍 하며 앓는 소리를 냈으나, 이내 이마의 열기가 가라앉으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소년의 두뇌를 가두고 있던 짙은 안개가 아주 미세하게 걷히는 순간이었다.


이튿날 아침, 가을 햇살이 먼지 낀 장서각 마당을 차갑게 비추었다. 독고풍은 어제 배진이 난장판으로 만들고 간 마당을 다시 쓸기 시작했다. 잘려 나간 오른팔 소매를 허리춤에 묶은 채, 왼손 하나로 대나무 빗자루를 잡고 묵묵히 낙엽을 쓸어내는 노인의 동작은 지극히 평범해 보였다. 무기는 마당 한구석에서 흙을 뭉쳐 놀며 바보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평화로운 아침의 침묵을 깨뜨린 것은 장서각 사문을 흔드는 사나운 사냥개들의 짖는 소리였다.


"크르릉! 왈! 왈!"


장서각의 낡은 나무 대문이 거칠게 열리며, 이빨을 드러낸 사냥개 세 마리가 마당으로 난입했다. 개들은 흙바닥을 헤집으며 독고풍이 정성껏 쓸어 모아둔 낙엽 더미를 순식간에 사방으로 흐트러뜨렸다. 그 뒤를 따라 화려한 비단 도포를 걸치고 허리에 옥대를 찬 청년 무인이 거만한 걸음걸이로 들어섰다. 삼장로 제갈우의 외아들이자 화산파 정식 제자인 제갈충(제갈충)이었다. 그의 허리에는 금박으로 장식된 청풍검(청풍검)이 번뜩이고 있었다.


제갈충은 장서각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코를 찡그리며 사나운 눈빛으로 독고풍을 쏘아보았다.


"쯧, 역시 이 더러운 서고 구석은 개를 풀어놓기에도 냄새가 고약하군. 야, 외팔이 늙은이! 마당을 이따위로 청소해 놓은 게냐? 내 사냥개들이 발을 더럽히지 않았느냐!"


제갈충은 사냥개들의 목줄을 놓아주며 장서각을 멸시했다. 개들이 으르렁거리며 흙장난을 치던 무기를 향해 달려들려 하자, 독고풍은 즉시 몸을 움직여 무기를 제 등 뒤로 숨겼다. 그리고 제갈충의 앞을 가로막으며 비굴하게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조아렸다.


"읍, 읍…… 으읍……."


말을 못 하는 벙어리 특유의 어눌한 신음 소리만이 노인의 목구멍을 타고 흘러나왔다. 노인은 철저히 무력하고 비천한 잡역부의 표정을 지으며 제갈충의 자비를 구하는 시늉을 했다. 제갈충은 그 비굴한 모습을 보며 실소를 터뜨렸다.


"하하! 삼촌 배진이 말한 대로 정말 볼품없는 폐물 늙은이로군. 오른팔도 잃고 말도 못 하는 병신 늙은이가 아직도 장서각에 붙어 화산의 곡식을 축내고 있다니, 내 아버님이 장문인과 비급을 나누지 않으셨다면 벌써 늑대 먹이로 던져졌을 놈이."


제갈충은 오만한 표정으로 다가와 독고풍이 쥐고 있던 다 닳은 대나무 빗자루를 가죽 장화 굽으로 사정없이 짓밟았다.


콰직!


10년 동안 독고풍이 장서각 마당을 쓸며 세월의 흔적을 묻혔던 유일한 대나무 빗자루가 허무하게 부러졌다. 부러진 대나무 줄기의 날카로운 파편 하나가 공중으로 튕겨 오르더니, 독고풍의 주름진 뺨을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노인의 하얀 백발 아래 뺨을 따라 미세한 붉은 선이 그어지더니, 이내 선명한 핏방울이 맺혀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그 광경을 본 백무기의 눈빛이 찰나의 순간 돌변했다.


할아버지의 얼굴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목격한 순간, 소년의 머릿속을 지배하던 어둠과 안개가 거짓말처럼 거두어졌다. 가슴속 깊은 곳에 봉인되어 있던 대기만성형 태극경맥이 처음으로 격렬하게 요동치며 전신 골격이 우두둑 소리를 냈다. 소년의 눈망울은 밤하늘의 심연처럼 깊고 날카롭게 빛났고, 그의 등 뒤로 희미한 태극의 기류가 폭발하듯 일렁였다.


무기는 바닥에 떨어진 부러진 빗자루 자루를 움켜쥐고 제갈충을 향해 돌진하려 했다. 제자의 폭주를 감지한 독고풍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금 힘을 드러내면 제갈우와 사마무극의 포위망이 장서각을 덮칠 것이며, 무기는 개각을 완성하기도 전에 압살당할 터였다. 노인은 철저히 인내해야 했다.


독고풍은 은밀하게 발을 뻗어 무기의 발목을 가볍게 걸었다.


퍽 소리와 함께 무기는 흙바닥에 볼품없이 넘어졌다. 독고풍은 즉시 바닥에 쓰러진 무기의 어깨를 왼손으로 지압하며, 그의 꼬인 경맥 속으로 차가운 진기를 주입해 폭주하려는 태극 기류를 강제로 억눌렀다. 무기는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이빨을 깨물며 제갈충을 노려보았다.


제갈충은 순간적으로 기이한 공포를 느꼈다. 무기의 깊고 투명한 눈동자 속에서 뿜어져 나온 차가운 살기가 자신의 청풍검마저 얼려버릴 듯한 위압감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제갈충은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찰나의 움츠림을 느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으며 소리를 질렀다.


"뭐냐, 그 눈빛은? 바보 새끼가 감히 장로의 아들을 노려보는 게냐?"


제갈충은 사냥개들을 불러 모으며 침을 뱉었다.


"흥, 더러운 곳에 더 있다가는 내 검마저 더러워지겠군. 조심해라, 다음번에는 이 서고를 통째로 불태워 버릴 테니."


제갈충은 오만한 비웃음을 남긴 채 장서각 사문을 나섰다. 제갈충의 발자국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마당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가라앉아 있었다.


제갈충이 떠난 뒤, 무기는 흙바닥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맑았으나, 머릿속의 안개는 완전히 걷히지 않은 채 다시 몽롱한 상태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소년의 손은 부러진 대나무 자루를 굳게 쥔 채 놓지 않았다. 무기는 말없이 장서각 뒤편의 바위틈으로 걸어가, 날카로운 돌멩이 하나를 주워 들었다.


그리고 마당 구석에 주저앉아 대나무 자루를 깎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돌멩이가 거친 대나무 겉가죽을 깎아내는 거친 소리가 장서각에 울려 퍼졌다. 무기는 밥을 먹지도, 물을 마시지도 않은 채 오직 대나무를 깎는 데만 몰두했다. 그의 손바닥이 거친 대나무 자루에 쓸려 살가죽이 벗겨지고 피고름이 맺히기 시작했다. 붉은 피가 흘러내려 대나무 자루를 적셨지만, 소년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 비정상적인 집중력으로 검의 형태를 벼려 나갔다. 꼬여 있던 태극경맥의 봉인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가문 대대로 전수되던 검에 대한 천재적인 본능이 무의식적으로 발현되고 있는 것이었다.


밤이 깊어 차가운 가을바람이 장서각의 문을 흔들 때, 무기는 마침내 자신만의 첫 대나무 목검을 완성했다. 소년은 손때와 피로 얼룩진 조잡한 목검을 두 손으로 굳게 쥐고 허공을 향해 조용히 찌르기 자세를 취했다.


장서각의 어두운 그늘 속에서, 오른팔 소매를 흔들며 서 있던 독고풍이 그 모습을 묵묵히 응시했다. 노인의 깊은 눈동자 속에 제자가 걸어가야 할 검의 길에 대한 비장하고 숭고한 책임감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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