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자백과 소리 없는 단죄
도원의 손가락 끝이 청동 종의 밧줄에 닿기 직전이었다. 축축한 지하 통로의 정적을 찢고, 독고풍의 왼손 손가락이 바람조차 일으키지 않으며 도원의 목뒤 대추혈(大椎穴)을 향해 소리 없이 파고들었다.
팍!
무성(無聲)의 지압이었다. 단전에서 역류해 올라온 정순한 진기가 도원의 굵은 목덜미를 관통하는 순간, 도원은 비명 한 자락 지르지 못하고 온몸의 힘이 풀린 채 쓰러졌다. 눈동자가 뒤집히며 손끝이 허공에서 맥없이 꺾였다. 독고풍은 텅 빈 오른팔 소매를 허리춤에 묶은 채, 오직 왼손 하나로 도원의 거구를 가볍게 받아 안아 벽면에 기대어 눕혔다. 움직임 하나하나가 흐르는 물처럼 매끄러웠다.
노인은 도원의 가죽 품속을 재빠르게 수색하여 묵직한 철쇠 열쇠 꾸러미를 소리 없이 빼냈다. 쇠붙이끼리 부딪치는 아주 미세한 쟁강 소리조차 노인의 왼손 끝에 서린 기운에 눌려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했다.
독고풍은 눈을 지그시 감고 심안 청음(心眼 聽音)을 극대화했다. 눅눅한 돌벽 너머, 지하 감옥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음산한 소리들이 그의 귓전을 때렸다.
휙! 팍! 촤아아악!
가죽 채찍이 허공을 가르고 살점을 찢어발기는 소리. 그리고 이어서 들려오는 농축된 소금물의 끈적한 마찰음.
“말해라, 바보 놈아! 네놈에게 옥녀봉 절벽에서 살아 돌아올 신법을 가르친 자가 누구냐! 장서각의 그 외팔이 늙은이더냐, 아니면 문파 내부의 다른 배신자더냐!”
고문 집행관 갈 사형의 가학적인 호통 소리가 좁은 지하 석실을 울렸다.
“아우으…… 아파아…… 무기 아파아…….”
이어 들려오는 백무기의 어리숙한 신음. 소년은 등 가죽이 갈가리 찢겨 나가는 극통 속에서도 스승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빨을 깨물고 있었다. 소년의 옷 안감에 숨겨진 어린 사슴 가죽 ‘현갑피’가 채찍의 가혹한 파괴력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심장과 내장의 파열을 간신히 막아내고 있었으나, 피부 표면의 고통까지 없애줄 수는 없었다. 무기는 몽롱해지는 의식 속에서도 혀를 깨물며 스승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았다. 바보 같은 울음소리 뒤에 숨겨진 굳건한 침묵이었다.
독고풍의 깊은 동공 속에서 푸른 진기의 불꽃이 이글거렸다. 분노가 그의 전신 경맥을 타고 들끓었다. 목뒤 아문혈에 꽂힌 은빛 금침이 노인의 끓어오르는 살기에 공명하듯 파르르 떨렸다. 금침제맥술로 강제로 이어붙인 경맥이 비명을 지르며 심장 부근에 날카로운 통증을 유발했으나, 노인은 개의치 않았다.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피투성이가 된 채 묶여 있는 제자의 처참한 실루엣뿐이었다.
스으으윽.
독고풍의 신형이 유령처럼 움직였다. 지하 감옥의 철문 앞, 두꺼운 무쇠 자물쇠 구멍에 열쇠가 소리 없이 맞물려 돌아갔다. 스르릉 하는 철문의 마찰음이 채찍 소리에 묻히는 찰나, 독고풍은 고문실의 무거운 목조 문을 향해 왼손 바닥을 내밀었다.
쾅!
무시무시한 경력(勁力)이 실린 일격에 두꺼운 나무문이 안쪽으로 사정없이 폭발하듯 뜯겨 나갔다. 부서진 목조 파편들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자욱한 먼지를 일으켰다.
“누구냐!”
채찍을 치켜들고 있던 갈 사형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형틀 옆 의자에 앉아 차가운 눈빛으로 취조를 참관하던 규율당주 조웅 역시 허리춤의 철혈령 신표를 움켜쥐며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지와 비린내가 가득한 안개 속에서, 백발이 성성한 초라한 외팔이 노인이 걸어 들어왔다. 거친 회색 마의를 걸치고 오른팔 소매를 허리춤에 묶은, 장서각의 늙은 청소부 독고풍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만큼은 평소의 흐리멍덩한 노인의 것이 아니었다. 밤하늘의 심연처럼 차갑고, 검성(劍聖)의 살기처럼 예리한 안광이 고문실 내부를 압도했다.
“서고지기 늙은이……? 네놈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 와!”
갈 사형이 이빨을 드러내며 소금물이 뚝뚝 떨어지는 가시 채찍을 독고풍을 향해 사정없이 휘둘렀다. 채찍 끝이 뱀처럼 허공을 가르며 노인의 목덜미를 채 가려 했다.
독고풍은 피투성이가 된 채 형틀에 묶여 혼절 직전인 무기를 바라보았다. 손톱 밑에 박힌 쇠바늘과 등 뒤의 찢어진 상처들이 노인의 이성을 완벽하게 끊어놓았다.
‘단죄하리라.’
독고풍은 검을 쥐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노인은 왼손의 검지와 중지를 모아 허공을 향해 가볍게 튕겼다.
지검(指劍)의 기틀.
스으으으! 팍!
바람 소리도, 기광(氣光)도 없었다. 오직 고도로 압축된 무형의 미세한 검기(劍氣)가 실선처럼 허공을 갈랐을 뿐이다.
지검에서 방출된 보이지 않는 검기가 날아오던 갈 사형의 철사 채찍을 정면으로 타격했다.
챙! 챙! 챙! 챙!
마치 무형의 강철 검과 부딪친 것처럼, 갈 사형이 자랑하던 질긴 형벌용 채찍이 순식간에 수십 토막으로 조각나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무쇠 가시들이 바닥돌에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이, 이게 무슨……!”
갈 사형이 경악하여 뒤로 물러서려던 찰나, 독고풍의 왼손가락 끝이 다시 한번 허공을 튕겼다. 소리 없는 일격이 갈 사형의 양 손목을 관통했다.
푹! 푹!
“아아아악!”
갈 사형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의 양 손목 힘줄이 완벽하게 끊어져 피가 울컥 솟구쳤다. 평생 죄 없는 무인들을 고문해 온 그의 손목이, 소리 없는 단죄의 검기에 의해 영구히 폐해진 것이었다. 갈 사형은 바닥을 구르며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독고풍이 날린 미세한 진기가 그의 아문혈을 때려 목소리마저 차단해 버렸다. 고문실에는 오직 꺽꺽거리는 기괴한 신음만이 맴돌았다.
“네놈…… 정체가 뭐냐!”
조웅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 철사벽력장(鐵沙霹靂掌)의 외공을 대성한 조웅조차 방금 전 노인이 보여준 무형의 지검 수위를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 검을 잡지도 않고 손가락 끝에서 저토록 정교하고 치명적인 검강에 가까운 기운을 뿜어내다니, 이는 화산파 장문인 백양선인조차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경지였다.
조웅은 전신의 내력을 폭발시키며 가슴팍의 철갑옷을 단단히 고정했다. 그의 양손 바닥이 쇳빛으로 검게 물들며 무시무시한 열기를 품은 장풍이 독고풍을 향해 쏟아졌다.
“벽력장(霹靂掌)!”
고문실 내부의 공기가 장풍의 압력에 밀려 찌그러지는 듯한 굉음이 일었다. 돌벽에 균열이 가고 먼지가 폭풍처럼 일어났다.
독고풍은 피하지 않았다. 노인의 눈빛은 고요한 호수와 같았다. 그는 왼손가락 끝에 단전의 남은 정순한 진기를 모았다. 일점관통검(一點貫通劍)의 구결이 그의 손가락 끝에서 소리 없이 회전했다. 극강의 파괴력을 지닌 진기의 송곳이 조웅의 정면 장풍을 향해 직선으로 뻗어 나갔다.
찌이이이잉!
쇳소리와 같은 기괴한 공명이 고문실을 가득 채웠다. 조웅이 방출한 쇳빛의 장풍 기류가 독고풍의 보이지 않는 지검 끝부분에 닿는 순간, 마치 얇은 종이처럼 반으로 갈라지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기의 흐름을 완벽하게 읽고 가장 약한 중심점을 꿰뚫어 버리는 일점관통의 극의였다.
“말도 안 돼……!”
조웅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서려 했으나, 장풍을 뚫고 날아온 무형의 지검 기운은 이미 그의 오른쪽 어깨 견정혈(肩井穴)을 관통한 뒤였다.
푹!
가죽 도포와 내부에 껴입은 두꺼운 철갑옷이 두부처럼 쉽게 뚫려 나갔다. 어깨 경맥이 완전히 파열되며 조웅의 전신 기혈 흐름이 일시에 뒤틀렸다. 조웅은 단전의 기가 역류하는 주화입마의 극통을 느끼며 바닥으로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어깨에서 흘러내린 피가 그의 검은 도포를 축축하게 적셨다.
조웅은 바닥에 쓰러진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어 노인을 바라보았다.
비바람 소리가 지하 창살 틈새로 음산하게 들려오는 고문실의 정적 속에서, 노인의 잘려 나간 오른팔 소매가 허리춤에서 흔들리는 모습이 조웅의 일그러진 동공에 뚜렷하게 박혔다.
백발이 성성한 초라한 외모. 오직 왼손 하나로 무형의 지검을 펼쳐 자신들의 무공을 단숨에 폐해버린 가공할 만한 무력. 그리고 결정적으로 오른팔이 없는 기형적인 실루엣.
조웅의 머릿속에 과거 10년 전, 무림맹주 사마무극의 음모에 빠져 마교의 누명을 쓰고 오른팔을 잃은 채 사라졌던 강호 최강의 검객 이름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
“네, 네놈은…… 외팔이…… 검성…… 독고……!”
조웅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차가운 공포가 그의 전신을 지배했다. 눈앞에 서 있는 초라한 서고지기 노인이 바로 자신들의 배후인 제갈우와 사마무극이 그토록 두려워하며 흔적을 지우려 했던 전설적인 대종사 독고풍이었던 것이다. 조웅은 전율하며 바닥을 기어 도망치려 했으나, 파괴된 어깨 경맥의 마비 증상 때문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독고풍은 조웅의 공포 어린 시선을 뒤로한 채, 형틀로 다가가 왼손 끝으로 무기를 묶고 있던 굵은 쇠사슬을 가볍게 내리쳤. 지검의 날카로운 기운에 쇠사슬이 두부처럼 잘려 나가며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스르르륵.
사슬이 풀리자 혼절 직전이던 백무기의 신형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독고풍은 재빠르게 왼손으로 무기의 허리를 받아 안아 자신의 넓은 품속에 밀착시켰. 피비린내와 소금물 냄새가 소년의 몸에서 진동했다.
무기는 희미하게 눈을 떴다. 땟국물 가득한 얼굴 위로 흐르는 핏물 사이로, 소년의 투명한 동공이 스승의 주름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기는 안심했다는 듯 어리숙하게 웃으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스…… 승님…… 무기…… 약속…… 지켰어어…… 배후…… 안 말했어어…… 헤헤…….”
그 맑고 순수한 신뢰 앞에서 독고풍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슬픔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노인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는 벙어리 행세를 해야 했기에, 오직 왼손으로 무기의 등을 더 굳건하게 감싸 안을 뿐이었다. 소년의 여린 체온이 노인의 차가운 마의 속으로 스며들었다.
독고풍은 무기를 가슴에 안은 채, 신형을 날려 부서진 고문실 문밖의 어둠 속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규율당 지하 통로를 소리 없이 빠져나가는 노인의 백발 위로, 차가운 빗줄기가 사정없이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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