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분노, 각본의 이탈
오후 2시 45분. 정문고등학교 한빛관 매점 뒤 공터는 햇빛이 거의 닿지 않아 늘 음습한 기운이 감도는 사각지대였다. 깨진 콘크리트 틈새로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그곳에서, 둔탁한 파열음이 정적을 깨뜨렸다.
“억...! 태성아, 제발...!”
오현태가 피범벅이 된 얼굴로 바닥을 뒹굴었다. 그의 가슴팍을 짓밟고 서 있는 것은 정문고의 실세, 강태성이었다. 태성의 손에는 청소 도구함에서 탈취한 녹슨 쇠파이프가 들려 있었다. 쇠파이프 끝자락에서 붉은 선혈이 툭, 툭 떨어지며 콘크리트 바닥을 적셨다.
“돈을 못 갚으면 기어 다니기라도 해야지, 현태야. 감히 내 전화를 피해?”
강태성의 눈은 광기로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최근 하버드 에세이 1차 통과와 모의고사 성적 급상승으로 인해 대치동 사교계의 우상으로 떠오르자, 그는 자신이 정말로 법 위에 군림하는 불멸의 천재라도 된 듯 오만에 도취되어 있었다. 이선우가 매일 아침 주입하던 ‘일일 동선 데이터 동기화 수칙’ 따위는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진 지 오래였다.
오현태는 신음하며 주머니 속으로 손을 뻗었다. 선우가 심어둔 복제폰 칩이 내장된 예비 스마트폰을 꺼내 비상 신호를 보내려던 찰나였다. 하지만 태성의 매서운 눈이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이 새끼가 뭘 만져?”
강태성이 쇠파이프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오현태의 비명과 함께 그의 손에서 빠져나온 예비 스마트폰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태성은 군화 같은 명품 운동화로 액정을 가차 없이 짓밟아 뭉개버렸다.
파직, 서늘한 파열음과 함께 실시간 도청 신호가 끊겼다.
동시에 본관 5층 폐기도서 보관소 아지트에서 대기하던 이선우의 싱크패드 모니터에 빨간색 경고등이 점멸했다. 실시간 도청 데이터 수신율 0%. 선우의 안경알 너머 눈빛이 극도로 차갑게 가라앉았다.
[상황 수치화 구동]
- 강태성의 폭주 감지.
- 오현태 신체 손상 위험도: S등급 (식물인간 상태 도달 확률 62%).
- 학폭위 정식 상정 시 강태성 퇴학 확률: 88.4%.
- 포트폴리오 및 빚 탕감 계약 파기 확률: 95%.
- 최선의 행동 지침: 3분 이내 현장 개입, 상황 강제 동결.
선우는 아버지가 물려준 낡은 만년필을 교복 안주머니에 꽂아 넣고 아지트를 나섰다.
한편, 매점 뒤 공터의 비명 소리를 듣고 달려온 인물이 있었다. 칼같이 다려진 교복 블레이저와 단정한 단발머리. 정문고의 타협 없는 선도부장, 윤지민이었다.
“강태성! 당장 그 쇠파이프 내려놔!”
윤지민이 선도부원들을 대동한 채 공터로 진입했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빛이 피 흘리는 오현태와 광기에 찬 강태성을 번갈아 응시했다.
“선도부, 당장 보건실에 연락하고 교무실에 보고해. 강태성, 너는 학폭위 징계 절차에 따라 즉시 격리조치한다.”
하지만 강태성은 코웃음을 치며 쇠파이프를 바닥에 툭 던졌다.
“윤지민, 네가 감히 누굴 격리해? 우리 엄마가 학교에 기부한 돈이 얼마인지 알기나 해? 교장쌤도 나한테 함부로 못 해.”
“학교 학칙은 돈으로 살 수 없어. 당장 따라와.”
윤지민이 한 걸음 다가서려던 순간, 공터 입구의 어둠을 뚫고 낡은 뿔테 안경을 쓴 이선우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선우의 시선이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오현태에게 닿았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타오르는 분노가 솟구쳤지만, 선우는 안경테를 쓸어 올리며 표정을 지워버렸다. 지금은 분노할 때가 아니라, 판을 통제할 때였다.
선우는 윤지민의 앞을 가로막으며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선도부장님, 잠시만요. 상황을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이선우? 네가 왜 여기 있어? 오해라니, 눈앞에 피를 흘리는 학생이 안 보여?”
윤지민이 이빨을 깨물며 물었다.
선우는 대답 대신 교실 모퉁이 뒤에서 카메라를 들고 대기하던 방송부원 김진우에게 미세하게 눈짓을 보냈다. 사전에 합의된 신호였다. 진우는 즉시 고성능 지향성 마이크를 작동시켜 태성과 선우의 대화를 녹취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훗날 태성을 완벽히 몰락시킬 ‘강태성 학폭 가해 음성 녹음본’의 시작이었다.
선우는 강태성에게 다가갔다. 태성은 여전히 거만한 표정으로 침을 뱉고 있었다. 선우는 태성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오직 태성에게만 들릴 정도로 나지막하고 서늘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머리가 나쁘면 지시라도 따랐어야지, 태성아.”
“뭐? 이 새끼가...”
“닥치고 내 말 들어. 지금 선도부장이 교장실로 가는 순간, 네 하버드 포트폴리오는 전과 기록과 함께 공중분해 된다. 네 어머니가 낸 3,500만 원도, 네 후계자 자격도 오늘로 끝이야. 전과자가 된 동생을 네 형 강민혁이 참 잘도 봐주겠네.”
강민혁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강태성의 몸이 미세하게 굳었다. 선우의 서늘한 안광이 태성의 심장을 꿰뚫는 듯했다. 태성은 자신이 선우의 각본 없이는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는 지적 백치임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실감했다. 오만하던 눈빛에 순식간에 공포가 서렸다.
“...어떻게 해야 돼?”
태성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주먹 멈추고 교실로 돌아가서 대기해. 내가 짜주는 알리바이대로만 움직여. 한 번만 더 내 각본에서 이탈하면, 그땐 진짜 지옥을 보게 될 거야.”
선우는 태성을 차갑게 밀쳐내고 윤지민을 향해 돌아섰다.
“선도부장님, 오현태 군은 계단에서 구른 상처를 강태성 군이 부축하려다 오해가 생긴 겁니다. 현태 군도 그렇게 말할 겁니다. 맞지, 현태야?”
선우의 차가운 질문에, 바닥에 누워 있던 오현태는 선우의 주머니 속에 든 자신의 3,200만 원 차용증을 떠올렸다. 현태는 피를 닦아내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아요. 제가 발을 헛디뎌서 구른 겁니다. 태성이는 잘못 없어요.”
윤지민은 기가 막힌다는 듯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명백한 외압과 굴복의 현장이었지만, 피해자가 직접 가해자를 옹호하는 상황에서 선도부의 즉각적인 격리 조치는 법적으로 효력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너희들, 정말 이럴 거야? 강태성, 이번엔 그냥 넘어가지 않아. 내 손으로 반드시 학폭위에 이 건을 기소하겠어.”
윤지민은 분노에 찬 얼굴로 고발 서류를 움켜쥔 채 교장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상황은 일시적으로 동결되었으나, 윤지민의 완벽한 법적 공세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그때, 선우의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격렬하게 울렸다. 액정 위에는 강태성의 이름이 떠 있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수화기 너머로 이성을 잃은 태성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 “야, 이선우! 윤지민 저 년이 교장실로 가잖아! 당장 이 상황 해결해 놓지 않으면, 대성파이낸셜 애들 시켜서 네 여동생 병실 산소호흡기 당장 떼어버리라고 할 테니까 똑바로 해!”
매점 뒤 공터의 차가운 그늘 아래, 선우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하도록 낡은 만년필을 움켜쥐었다. 그의 안경 너머 눈빛이 심연보다 더 깊은 서늘함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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