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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연을 가정한 우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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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치동의 오후는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창밖으로 내리쬐는 비스듬한 햇살은 정문고등학교 본관 5층, 먼지 냄새 가득한 폐기도서 보관소의 책장 사이를 길게 가로지르고 있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이 버려진 공간의 가장 깊숙한 구석. 이선우는 낡은 싱크패드 X220 노트북 화면을 응시하며 가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화면에는 붉은색과 푸른색 선이 어지럽게 얽힌 정문고 3층 평면도가 실시간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교실과 복도, 교무실과 연결되는 계단참마다 점으로 표시된 인물들의 움직임이 수식의 궤적을 그리며 이동하고 있었다.


“인간은 자유의지로 움직인다고 착각하지만, 결국은 습관과 환경의 노예일 뿐이다.”


선우는 나지막이 읊조리며 안경을 쓸어 올렸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정문고 교사들의 요일별 순찰 동선과 걸음 속도가 통계학적인 확률 분포로 변환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선우가 설계한 ‘미시 동선 확률 설계 기술’이었다.


사람들은 눈앞에 들이미는 가공된 증거보다, 자신이 ‘우연히’ 목격한 광경을 더 깊이 신뢰한다. 강태성을 노력파 천재로 각인시키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교사들이 복도를 지나가다 우연히 태성이 공부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게 만드는 것이었다.


선우는 데이터를 스캔했다.


물리 교과 수석이자 퇴임을 앞둔 한진우 교사. 그는 만성 무릎 관절염을 앓고 있어 매주 목요일 오후 2시 10분이 되면 일정한 보폭(평균 65cm)과 느린 속도(시속 3.2km)로 3층 복도를 지나 물리실로 향한다.


반면, 기회주의적인 임무성 교감은 완벽한 관료형 인간이다. 그는 매일 오후 2시 15분이 되면 교장실 보고를 위해 3층 중앙 계단을 시속 5.2km의 빠른 걸음으로 통과한다.


두 교사의 동선이 교차하는 지점은 3층 복도 중앙의 창가.


선우는 스마트폰을 켜고 오현태에게 실시간 메신저를 보냈다.


[선우: 강태성 위치 지정 구역으로 이동시켜. 3층 복도 4번 창가. 손에는 물리학 전공 서적 펴 들게 하고.]


[현태: 알겠어, 선우 형. 지금 바로 움직일게.]


현태의 답장이 오자마자, 평면도 위의 푸른 점 하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태성이었다. 태성은 선우가 미리 준비해 둔 대학 수준의 물리학 전공 서적을 들고 복도로 나섰다. 책의 여백에는 선우가 ‘필체 완벽 동화 모사술’을 가동해 강태성의 삐뚤빼뚤한 악필로 정교하게 적어둔 슈뢰딩거 파동 방정식의 유도 과정이 적혀 있었다. 겉보기엔 거칠지만, 내면의 논리는 완벽한 가짜 천재의 흔적이었다.


하지만 돌발 변수가 발생했다.


CCTV 화면을 모니터링하던 선우의 미간이 좁혀졌다. 화면 속 강태성이 책을 거꾸로 들고 창가에 기대어 하품을 하고 있었다. 녀석은 연기하는 것조차 지루해하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려 꼬물거리고 있었다. 오현태는 저 멀리서 발만 동동 구른 채 태성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멍청한 새끼.”


선우는 혀를 차며 싱크패드의 터미널 창을 두드렸다. 강태성의 유심에 심어둔 복제 스마트폰 미러링 칩에 고주파 진동 신호를 송출했다.


지잉. 지잉. 지잉.


태성의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세 번 짧고 강하게 진동했다. 선우가 사전에 주입한 ‘경고 신호’였다. 깜짝 놀란 태성이 반사적으로 담배를 집어넣고 책을 똑바로 돌려 잡았다. 고개를 30도 각도로 숙이며 책에 집중하는 척 포즈를 취한 순간, 복도 모퉁이 너머로 백발이 성성한 한진우 교사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한진우 교사는 무거운 서류가방을 들고 피로한 눈빛으로 복도를 걷고 있었다. 입시 기계로 전락한 정문고의 교육 현실에 환멸을 느끼던 노교사였다. 그런 그의 시선에, 오후의 붉은 햇살을 받으며 창가에서 무섭게 몰두하고 있는 거구의 소년이 들어왔다.


학교의 악명 높은 일진, 강태성이었다.


한 교사는 의아함에 걸음을 멈추었다. 평소 수업 시간마다 맨 뒷자리에서 잠만 자거나 침을 뱉던 녀석이, 붉은색 표지의 두꺼운 물리학 원서를 읽고 있는 광경은 지독한 인지적 불일치였다. 한 교사는 자석에 이끌리듯 태성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두 걸음.


선우는 아지트에서 한 교사의 이동 속도와 태성과의 거리를 실시간으로 연산했다.


[남은 거리: 3미터. 충돌 확률 98%.]


한진우 교사가 태성의 곁에 멈춰 섰다. 태성은 침을 꿀꺽 삼키며 책에 시선을 고정했다. 한 교사의 시선이 태성이 들고 있는 책의 펼쳐진 페이지로 향했다. 그 여백에 지저분한 악필로 적힌 복잡한 미분방정식 전개도가 노교사의 눈에 들어왔다.


한 교사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것은 단순한 고교 물리 수준이 아니었다. 양자역학의 파동 함수가 경계 조건에서 어떻게 붕괴하는지를 보여주는, 지독하리만큼 elegant한 유도 공식이었다. 비록 글씨체는 엉망진창이었지만, 행간에 숨겨진 지적 깊이는 진짜였다.


“태성아.”


한 교사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태성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칼라 속에 숨겨진 초소형 무선 이어폰을 통해 선우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놀라지 마. 고개 천천히 들고, 귀찮다는 표정 지어.”


태성은 지시대로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아... 한 선생님. 무슨 일이십니까?”


한 교사는 태성의 거친 말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으로 책의 여백을 가리켰다.


“이 수식 말이다. 네가 직접 유도한 거냐?”


- “대답해. ‘그냥 끄적여 본 건데, 정상 상태 근사가 마음에 안 들어서 변형해 봤다’고 말해.”


태성은 이어폰의 목소리를 기계적으로 복창했다.


“아, 이거요? 그냥 자습하다가 대충 끄적여 본 건데요. 책에 나온 정상 상태 근사법이 좀 비효율적인 것 같아서... 제 방식대로 변형해 본 겁니다.”


한 교사의 안경 너머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물리학에 평생을 바친 학자의 직관이 발동한 것이다. 그는 태성의 지적 깊이를 검증하기 위해 더 깊은 질문을 던지려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 경계 조건에서 파동 함수가...”


태성의 이마에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그동안 쌓아 올린 천재 이미지는 물론, 대필의 존재까지 탄로 날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선우의 싱크패드 화면에도 태성의 심박수가 130bpm을 돌파했음을 알리는 경고등이 켜졌다.


하지만 선우는 이미 이 모든 상황을 연산해 두고 있었다.


화면 속 푸른 점 하나가 3층 중앙 계단을 올라와 복도 끝에서 빠른 속도로 접근하고 있었다. 교감 임무성이었다. 속도는 시속 5.2km. 정확히 3초 뒤 이 교차점에 도달한다.


선우가 나지막이 카운트다운을 읊조렸다.


“3. 2. 1.”


“어이! 한 선생님!”


복도 끝에서 임무성 교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한 교사가 기습적인 질문을 던지려던 찰나, 고개를 돌려 교감을 바라보았다.


임 교감은 숨을 헐떡이며 급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여기 계셨군요! 교육청에서 보낸 사학 감사 공문 건으로 지금 당장 교장실에서 회의가 있습니다. 이사장님이 직접 참석하시는 건이라 한 선생님의 배석이 필수적입니다. 어서 가시지요!”


임 교감의 불시 등장은 한 교사의 시선과 주의력을 완벽하게 분산시켰다. 한 교사는 아쉬운 듯 칠판과 태성의 책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이내 무거운 한숨을 쉬며 서류가방을 고쳐 쥐었다.


“...알겠습니다, 교감 선생님. 지금 가도록 하지요.”


한 교사는 걸음을 옮기기 전, 강태성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의 눈빛에는 이전의 경멸이나 무관심 대신, 깊은 학구적 흥미와 의문이 담겨 있었다.


“태성아. 그 수식의 전개 방식은 아주 흥미롭더구나. 조만간 물리실로 한번 찾아오너라. 더 깊이 얘기해 보고 싶구나.”


“예... 뭐, 시간 나면 가겠습니다.”


태성이 퉁명스럽게 답하자, 한 교사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교감과 함께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복도에 정적이 찾아오자, 강태성은 벽에 기대어 다리를 덜덜 떨며 주저앉았다. 그의 손에 쥔 물리학 원서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 “태성아, 책 주워.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교실로 복귀해.”


이어폰 너머로 들려오는 선우의 서늘한 목소리에, 태성은 반사적으로 책을 주워 품에 안았다. 녀석의 눈빛에는 이제 선우를 향한 기괴할 정도의 경외심과 절대적인 지적 종속감이 낙인처럼 새겨져 있었다.


폐기도서 보관소에서 선우는 싱크패드 노트북을 닫았다.


첫 번째 공간 조작극은 성공적이었다. 교사들 사이에서 강태성이 ‘숨겨진 물리학 천재’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할 터였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노트북 화면 우측 하단에 붉은색 배터리 경고등이 점멸했다.


교내의 삼엄한 Wi-Fi 방화벽을 우회하고 고주파 오디오 송신을 과도하게 유지하느라, 김 사장이 사물함에 설치해 준 무선 중계기의 전력 소모가 한계를 초과한 것이다. 장비의 긴급 점검이 시급했다.


선우가 장비를 정리하려 가방을 메는 순간, 그의 스마트폰 화면에 정체불명의 암호화된 메시지 하나가 수신되었다.


[???: 정문고등학교 내신 등급 추이에 기묘한 노이즈가 포착되었습니다. 대필가의 냄새가 나는군요.]


대치동 최고의 불법 입시 컨설팅 연구소 ‘피나클’의 수석 코디네이터, 독고영의 보이지 않는 사냥개가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한 징후였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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