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고사의 폭풍전야
대치동의 밤은 깊어갈수록 오히려 더 기괴하게 밝아졌다. 학원가 빌딩 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네온사인과 야간 자습을 마친 학생들을 실어 나르는 노란 버스들의 헤드라이트가 얽히며 도로를 붉게 물들였다. 피나클 빌딩 지하 서버실에서 격벽이 내려앉는 찰나의 순간에 탈출했던 이선우는, 차가운 땀이 흥건히 젖은 무채색 셔츠를 교복 블레이저로 가려 입은 채 정문고등학교 등교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의 백팩 안쪽 깊숙한 주머니에는 대치동 상류층의 숨통을 단숨에 끊어버릴 불법 대필 아카이브가 담긴 암호화 USB가 들어있었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선우의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선우의 목을 죄어오는 것은 미래의 폭로전이 아니었다.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3학년 1학기 중간고사. 정문고등학교의 교실은 내신 1등급이라는 가혹한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의 책을 찢고 고발을 일삼는 독종들의 광기로 터지기 직전이었다.
“황국선 교무부장이 움직이기 시작했어.”
한빛 24시 스터디카페의 가장 구석진 1인실 안. 최서현은 단정하게 빗어 넘긴 생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차가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가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태블릿 PC 화면에는 정밀하게 정리된 날짜와 시간표가 띄워져 있었다. 이사장실 동태 실시간 스캔 규칙에 따라 서현이 이사장실의 보안망을 우회해 확보한 정보였다.
“지난주 목요일 밤 11시, 도곡동의 한 폐쇄적인 일식집에서 황국선이 강태성의 모친 윤혜원을 만났어. 오고 간 것은 단순한 돈봉투가 아니야. 강산그룹 계열사의 주식 양도 증서더군. 윤혜원은 아들의 내신 성적을 완벽한 1등급으로 만들기 위해 시험지 유출을 사주했고, 황국선은 그 대가로 퇴직 후의 평생을 보장받기로 약속한 거지.”
선우는 안경테를 쓸어 올리며 태블릿 화면의 타임라인을 응시했다. 머릿속의 연산 회로가 고속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상황 수치화 및 실시간 확률 계산력 구동]
- 황국선의 개인 재무 위험도: 하(강산그룹 주식 확보로 급상승).
- 황국선이 단독으로 시험지 유출 책임을 질 확률: 5% 미만.
- 교내 최하위권이자 사채 빚 독촉을 받는 이선우가 희생양으로 지목될 확률: 94.5%.
- 최선의 대응책: 적들이 파놓은 누명의 덫을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 덫의 내부로 걸어 들어가 물리적·디지털 증거를 현장에서 역포착함.
“황국선은 비겁하고 야비한 인간이야.”
선우가 나지막하고 서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신이 시험지를 빼돌리는 주범이 되면서도, 만에 하나 꼬리가 밟혔을 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울 유령을 설계해 두었겠지. 가난하고, 학교에 아무런 배경이 없으며, 최근 강태성의 성적 상승에 비정상적으로 밀착되어 있는 나. 이선우만큼 완벽한 제물은 없어. 황국선은 나를 시험지 유출 범인으로 몰아 퇴학시키고 자신은 유유히 빠져나갈 생각인 거야.”
서현의 얼음처럼 차가운 눈동자가 흔들렸다.
“알면서도 당하겠다는 거야? 이사장실 금고에서 빼낸 장부만으로도 황국선을 찌를 수 있어.”
“아니, 그걸로는 부족해. 사학 재단의 횡령 장부는 그들이 법무팀을 동원해 고의로 재판을 지연시키면 꼬리 자르기로 묻힐 수 있어. 하지만 ‘시험지 유출 현장’이라는 사법적 현행범 증거는 그 어떤 대기업의 권력으로도 은폐할 수 없어. 적들의 덫 안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 그들의 목줄을 현장에서 쥐는 게 내 각본이야.”
선우의 결연한 태도에 서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의 목줄을 쥔 채 시작된 적대적 동맹이었지만, 이제 두 사람은 정문재단이라는 거대한 기득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한 배를 탄 완벽한 동지가 되어 있었다.
다음 날 오후 5시, 정문고등학교 본관 5층의 방치된 폐기도서 보관소 아지트.
선우는 야간 청소 용역 반장인 허 여사로부터 신문지에 싸인 묵직한 봉투를 전달받았다. 허 여사는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이 학생, 교무실 쓰레기통에서 수거한 파쇄 서류 조각들이야. 교무부장이 어제 퇴근하기 직전에 아주 잘게 파쇄하라고 직접 지시하더군. 중요해 보여서 따로 모아왔어.”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선우는 허 여사에게 정중히 머리를 숙인 뒤 아지트 문을 잠갔다. 테이블 위에 파쇄된 수백 개의 하얀 종이 조각들을 펼쳐놓은 그는, 아버지가 남겨준 낡은 몽블랑 만년필을 쥔 채 퍼즐을 맞추듯 조각들을 정렬하기 시작했다. 손끝을 타고 흐르는 긴장감이 공기를 얼려버릴 것 같았다. 3시간에 걸친 정밀 작업 끝에 복원된 서류는 황국선 교무부장이 직접 작성 중이던 ‘이선우 학폭 및 성적 조작 징계 보고서’ 초안이었다.
동시에 선우는 황국선의 개인 PC에 심어둔 백도어 포트를 가동했다. 모니터 화면에 흐르는 암호화된 전산 로그들을 스캔하자, 황국선이 중간고사 물리와 화학 시험지 마스터 파일을 외장 하드로 복사한 구체적인 시간과 IP 경로가 드러났다. 중간고사 시험지 유출 조작 누명 위기가 선우의 눈앞에 실시간으로 구체화되고 있었다.
‘황국선은 야간 인쇄 작업 시간에 실제 물리 시험지 인쇄본을 빼돌려 내 사물함이나 가방에 넣을 생각이다.’
선우는 즉각 싱크패드 노트북을 켜고 김 사장에게 무선 연락을 취했다.
“김 사장님, 들리십니까? 황국선이 움직이는 야간 동선을 포착했습니다. 교무실 내부와 내 사물함 주변 복도 CCTV의 사각지대에 황국선의 행동을 실시간으로 녹화할 초소형 포렌식 카메라 설치를 부탁드립니다.”
- “오냐, 선우야. 장비는 이미 준비해 뒀다. 퀵서비스 동희 시켜서 야간 자습 종료 직전에 학교 후문으로 배달하마. 그런데 괜찮겠냐? 녀석이 네 가방에 직접 시험지를 쑤셔 넣는 순간, 경찰이 들이닥치면 대처할 시간이 아주 촉박할 텐데.”
“그 찰나의 순간이 바로 황국선과 정문재단의 숨통을 끊을 유일한 결전의 타이밍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선우는 전화를 끊고 주머니 속에서 황국선의 보안 카드를 복제해 만든 ‘정문고 평가관리실 보안 카드 복제 키’를 꺼내 들었다. 이 카드키는 황국선이 야간에 평가관리실에 드나들 때의 RF 주파수를 복제한 치명적인 물증이었다. 선우는 이 복제 키를 평소처럼 자신의 개인 사물함 안쪽에 숨겨두려다, 순간적으로 뇌리의 연산 장치를 가동했다.
[기습 수색 확률 연산 구동]
- 황국선이 시험지 유출 공작 전, 선우의 사물함을 기습 수색할 확률: 85%.
- 복제 카드키가 사물함에서 발견될 시 선우의 대필가 정체 및 해킹 혐의 즉각 입증 위험: 99.9%.
- 최선의 방어 조치: 복제 키를 사물함에서 즉각 회수하여 5층 아지트 싱크패드 노트북 밑바닥에 이중 테이프로 밀착 보관.
선우는 지체 없이 3층 복도로 내려가 자신의 사물함을 열고 복제 카드키를 회수했다. 그리고 그것을 5층 아지트의 싱크패드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다. 완벽한 방어막을 구축한 셈이었다.
일주일 뒤, 중간고사를 단 3일 앞둔 야간 자습 시간.
정문고 3학년 4반 교실의 공기는 무겁다 못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학생들은 저마다 두꺼운 문제집에 고개를 처박은 채 연필을 굴리고 있었고, 불안증에 시달리는 우등생들은 각성제를 입에 털어 넣으며 신경질적으로 다리를 떨고 있었다. 교실 뒤편 상석에 앉은 강태성은 공부하는 척 연출된 전공 서적을 펴놓은 채, 선우가 전송해 준 요약본을 스마트 패드로 훔쳐보며 짐짓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선우는 맨 뒷자리 구석, 어두운 그늘이 지는 책상에 앉아 낡은 만년필을 쥔 채 타이머를 주시하고 있었다. 황국선의 움직임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드르륵!
교실 앞문이 비정상적으로 거칠게 열리며 정적이 깨졌다.
학생들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든 순간, 교실 안으로 들어선 인물은 담임 정동수 교사와 그 뒤를 따르는 교무부장 황국선이었다. 황국선의 얼굴에는 야비하고 승리에 찬 미소가 걸려 있었고, 그의 손에는 교내 보안 점검용 마스터 키 뭉치와 붉은색 결재판이 들려 있었다.
황국선은 교탁 앞에 서서 차가운 눈빛으로 교실 내부를 훑어내렸다. 그의 시선이 맨 뒷자리에 앉은 이선우에게 꽂히는 순간, 서늘한 살기가 교실 전체를 얼려버렸다.
“모두 하던 공부를 멈추고 주목해라.”
황국선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교실 천장을 때렸다.
“최근 3학년 교무처 전산망에 비정상적인 외부 IP 접속 흔적이 포착되었다. 특히 중간고사 출제 파일이 보관된 서버에 무단 침입하려 한 정황이 드러났다. 교무위원회는 내부 공모자가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즉각적인 특별 보안 감사를 단행하기로 결정했다.”
교실 안이 순식간에 웅성거림으로 가득 찼다. 학생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황국선은 단상에서 내려와 천천히 이선우의 책상을 향해 걸어왔다. 그의 구두 굽 소리가 차가운 바닥에 부딪쳐 둔탁하게 울렸다.
“이선우.”
황국선이 선우의 책상 앞에 멈춰 서서 가늘게 뜬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최근 네 주변에서 수상한 전자기기 주파수가 여러 차례 감지되었다는 제보가 있었다. 학칙 제14조 및 교내 보안 규정에 의거해, 지금 이 자리에서 네 사물함 검사를 기습적으로 실시하겠다. 당장 사물함 열쇠를 내놔라.”
황국선의 기습 선언에 교실 안의 모든 시선이 이선우에게 집중되었다. 강태성은 당황한 표정으로 선우를 바라보았고, 교실 구석에 앉은 최서현은 숨을 죽인 채 상황을 주시했다.
선우는 태연하게 쓰고 있던 검은 뿔테 안경을 쓸어 올렸다. 안경 렌즈 너머로 번뜩이는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차갑고 깊었다. 적들이 설계한 덫의 아가리가 마침내 열린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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