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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밑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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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고등학교 본관 5층, 옥상으로 향하는 철문은 평소 늘 굳게 닫혀 있었다. 소방 안전 점검 기간이 아니면 누구도 찾지 않는 이 외진 복도 끝에는 낡은 페인트 냄새와 먼지 섞인 차가운 공기만이 맴돌았다.


이선우는 가방끈을 고쳐 매며 옥상 비상대피 통로의 무거운 철문 손잡이를 잡았다. 아지트인 폐기도서 보관소에서 밤샘 대필 작업을 마치고 하교하려던 참이었다. 낡은 안경 너머로 피로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그의 신경은 여전히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철컥.


손잡이를 내리기도 전에, 철문이 반대편에서 먼저 밀려 열렸다. 문틈 사이로 차가운 겨울바람과 함께, 얼음처럼 서늘한 아우라를 풍기는 여학생이 걸어 나왔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검은 생머리,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정문고 교복 블레이저, 그리고 상대의 영혼까지 꿰뚫어 볼 듯 차갑게 가라앉은 안광.


정문고 전교 1등이자 이사장의 외딸, 최서현이었다.


서현은 철문 앞을 가로막은 채 선우를 내려다보았다. 높은 굽의 구두 소리가 대리석 바닥에 둔탁하게 울렸다. 그녀는 말없이 품 안에서 파란색 플라스틱 서류철을 꺼내 선우의 가슴팍에 가볍게 들이밀었다.


“길이 막혔네, 이선우.”


서현의 목소리는 고요하면서도 날카로웠다. 선우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녀가 내민 서류철을 바라보았다. 안경테를 쓸어 올리는 선우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최서현 학생. 난 그저 하교하려던 길이야.”


“모르는 척하는 솜씨가 제법이네.”


서현은 서류철을 열어 두 장의 종이를 선우의 눈앞에 펼쳤다.


첫 번째 종이는 강태성이 하버드 대비용으로 제출했던 영어 에세이의 출력본이었다. 문장 곳곳에 붉은 펜으로 정교한 문법 수정 흔적이 기록되어 있었다.


두 번째 종이는 선우가 몇 달 전 도서관 지하 보관소에 반납했던 낡은 수학 연습 노트의 한 페이지를 복사한 사본이었다. 그 위에는 선우가 거칠게 적어 내려간 물리 수식과 기호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강태성이 쓴 에세이의 디지털 흔적을 추적해 봤어. 업로드된 가상 IP를 역추적하니까 대치동 골목의 한 PC방으로 연결되더군. 하지만 거기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어. PC방 사장이 아주 의리 있게 로그 기록 전체를 깨끗하게 포맷해 버렸거든.”


최서현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그것은 대치동 최고의 해킹 전문가이자 PC방 사장인 이진수가 선우를 위해 감행했던 디지털 흔적 소각(5화의 이진수의 의리와 비밀)을 의미했다.


“하지만 말이야, 이선우. 디지털 세계의 흔적은 지울 수 있어도, 아날로그 세계의 인간적 습관은 쉽게 지워지지 않아.”


서현은 두 장의 종이 특정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에세이의 인쇄본 레이아웃, 그리고 문장 부호 뒤에 들어간 미세한 띄어쓰기 여백의 규칙을 분석해 봤어. 문단 정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여백 비율이 1.25 대 1. 고도로 훈련된 타자 습관이지. 그리고 결정적인 건 이거야.”


그녀가 가리킨 곳은 에세이 초안 여백에 수작업으로 적힌 그리스 문자 ‘람다(λ)’ 기호였다. 그리고 선우의 수학 노트 사본에 적힌 람다 기호 역시 동일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람다를 쓸 때 왼쪽 사선을 먼저 긋고 오른쪽을 받쳐 쓰지. 하지만 너는 오른쪽 사선을 먼저 긋고 왼쪽을 3도 정도 기울여서 덧붙여 쓰는 독특한 필기 습관을 지니고 있어. 강태성 그 머리 빈 깡패 새끼가 제출한 화학 보고서 여백에도 똑같은 3도 기울어진 람다가 적혀 있더군.”


서현은 서류철을 탁 소리 나게 덮으며 선우에게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녀의 숨결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차가운 눈빛이 선우의 얼굴을 낱낱이 해부하기 시작했다.


“강태성을 조종하는 진짜 주인이 너였냐, 이선우?”


선우의 심장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그의 인생 최대의 정체 노출 위기였다. 만약 이 사실이 교무부장 황국선이나 이사장실에 들어가는 순간, 사채 빚 탕감은커녕 동생 선아의 수술비와 아버지의 요양병원비 지원까지 전부 물거품이 되고 퇴학당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선우는 패닉에 빠지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즉각적인 연산이 시작되었다.


[상황 수치화 구동]

- 상대방의 고발 의사 확률: 12.4%.

- 협상 및 거래 제안 확률: 87.6%.

- 최서현의 신체 언어 분석:

1. 왼쪽 검지 손가락이 서류철 모서리를 초당 2회 속도로 미세하게 두드림 (극도의 긴장 및 불안).

2. 호흡 주기가 정상 범위를 벗어나 얕고 빠름.

3. 진짜 고발할 생각이었다면 이미 교무실에 제출했을 것. 나를 옥상으로 따로 불러낸 것은 ‘패’를 쥐고 거래를 제안하기 위함임.


선우는 천천히 쓰고 있던 검은 뿔테 안경을 벗었다. 안경을 옷자락에 문질러 닦는 그의 행동은 기괴할 정도로 차분했다. 안경 뒤에 숨겨져 있던 서늘하고 깊은 안광이 최서현의 얼굴을 정면으로 옭아맸다.


“최서현.”


선우의 목소리는 낮고 낮았다. 옥상 문틈으로 불어오는 칼바람보다 더 차가웠다.


“분석은 훌륭해. 하지만 연역적 추론의 기초가 빠졌군.”


“...뭐?”


“네가 이 자료를 들고 교무실로 가봤자, 학교 측은 대필 사실을 덮으려 할 거야. 왜냐하면 강태성의 에세이는 이미 하버드 입학 사정관들의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었고, 정문고의 대외적 평판과 강산그룹의 기부금 줄이 얽혀 있거든. 결국 넌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내 퇴학 처분 하나로 만족해야 해.”


선우는 안경을 다시 쓰며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오히려 서현의 숨통을 조여오는 위압적인 태도였다.


“하지만 전교 1등인 네가 그런 비효율적인 선택을 할 리가 없지. 넌 강태성을 파멸시키고 싶은 게 아니야. 정확히는... 이 학교 재단과 너를 옭아매고 있는 네 아버지를 무너뜨리고 싶은 거겠지.”


최서현의 차가운 표정 밑으로 미세한 균열이 일어났다. 그녀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흔들리는 것을 선우는 놓치지 않았다.


[최서현의 가문 내 입지 분석 작동]

- 최서현은 정문재단 이사장 최윤석의 친딸이 아닌 입양아.

- 가문의 평판 유지와 정계 가문과의 정략결혼을 위한 ‘위선적 도구’로 사육당함.

- 불복종 시 발동되는 ‘파양 조건부 조항’의 존재.


선우는 주머니 속 아버지가 남겨준 낡은 만년필을 조용히 만지작거리며, 서현의 내면 깊숙한 곳에 숨겨진 가장 추악한 상처를 향해 차가운 비수를 꽂아 넣었다.


“정략결혼의 도구. 그게 네 진짜 이름이잖아, 최서현.”


서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갔다. 그녀의 손가락이 서류철을 쥔 채 부르르 떨렸다.


“입을 닥쳐, 이선우.”


그녀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들어 올렸다. 화면에는 이사장실 비서의 단축번호가 띄워져 있었다.


“당장 이사장실에 이 사실을 고발해 널 퇴학시키겠어. 네가 아무리 잔머리를 굴려봤자, 넌 사채 빚에 허덕이는 쓰레기 고등학생일 뿐이야.”


서현이 스마트폰 화면 위로 손가락을 가져가는 순간, 선우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귀밑에 대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눌러봐. 대신 네가 누르는 순간, 이사장실 파쇄기 쓰레기통에서 내가 복원해 낸 ‘최서현 파양 조건부 계약서’의 세부 조항 실물이 교육청과 언론사 사회부 기자들의 메일함으로 즉각 송출될 거야. 네 양부 최윤석 이사장이 널 정계 명문가 자제인 지승현과 강제 약혼시키기 위해 작성한 그 추악한 비밀 조항 말이야.”


서현의 손가락이 송출 버튼 직전에서 완전히 멈춰 섰다. 옥상 위의 차가운 바람 소리만이 두 사람의 숨 막히는 침묵 사이를 잔인하게 가르며 지나갔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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