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의 채권과 그림자의 제안
습기는 언제나 바닥에서부터 차올랐다.
대치동 학원가의 화려한 빌딩 숲에서 불과 세 블록 떨어진 골목길, 가파른 언덕길 아래에 위치한 반지하 단칸방은 낮에도 햇빛이 들지 않았다. 빗물받이 창문 너머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축축한 구두 굽만이 보일 뿐이었다. 방 안을 채운 것은 눅눅한 곰팡이 냄새와 낡은 가습기가 뿜어내는 옅은 증기, 그리고 얇은 이불 속에서 들려오는 가녀린 기침 소리뿐이었다.
콜록, 콜록.
이선우는 낡은 책상 앞에 앉아 굳은 손가락으로 펜을 쥐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책상 구석에 정갈하게 정리된 이선아의 심장 약병들로 향했다. 선천성 심장판막증을 앓고 있는 여동생. 매달 수백만 원에 달하는 약값과 수술비는 선우의 어깨를 짓누르는 거대한 바위였다.
"오빠... 나 괜찮아. 그러니까 불 좀 켜고 공부해. 눈 나빠져."
이불 속에서 고개를 내민 선아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선우는 뿔테 안경을 치켜올리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응, 알고 있어. 문제집 한 장만 더 풀고 불 켤게. 누워 있어."
그가 쥐고 있는 것은 아버지가 남겨준 유일한 유산인 낡은 몽블랑 만년필이었다. 과거 천재 과학자였으나 대기업 강산그룹의 음모로 특허를 강탈당하고 의문의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어 요양병원에 누워 있는 아버지 이준호. 그 아버지가 쓰던 만년필의 차가운 금속 촉을 만질 때마다 선우는 내면의 들끓는 분노를 차갑게 식히며 이성을 다잡았다.
하지만 평화는 언제나 예고 없이 부서진다.
쾅—!
지하의 얇은 합판 문이 거친 발길질에 비명을 지르며 뜯겨 나갔다. 문틀이 쪼개지는 날카로운 파편이 방바닥으로 흩어졌다. 눅눅한 어둠을 가르고 들이닥친 것은 거구의 사내들이었다. 거친 문신이 목덜미까지 올라온 사내, 대성파이낸셜의 행동대장 박두식이었다.
"야, 이선우. 쥐새끼처럼 여기 숨어 있었냐?"
박두식은 흙이 묻은 구두를 신은 채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가 발을 디딜 때마다 장판 아래에서 고여 있던 빗물이 찌걱거리며 솟아올랐다. 두식은 거침없이 방 한가운데에 놓여 있던 플라스틱 상을 걷어찼다. 상 위에 올려져 있던 선우의 문제집과 필기구들이 사방으로 내팽개쳐졌다.
"꺄악!"
이불 속에 누워 있던 선아가 비명을 지르며 가슴을 쥐어짜듯 웅크렸다. 그녀의 심박수가 급격히 상승하며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선우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여 선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즉각적인 연산이 시작되었다.
[상황 수치화 구동]
- 침입자 수: 3명.
- 주동자 박두식의 신장 185cm, 체중 95kg 이상. 신체적 충돌 시 선우의 패배 확률: 99.8%.
- 여동생 이선아의 심박수 추정치: 140bpm 돌파 위험. 급성 발작 발생 확률: 85%.
- 최선의 행동 지침: 물리적 저항 배제, 상대의 목적 파악 및 대화 유도.
선우는 안경 너머의 눈빛을 극도로 차갑게 가라앉혔다. 그는 손을 들어 두식을 제지하며 나지막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멈추십시오. 가택 침입 및 기물 파손은 형법 제319조 및 제366조 위반입니다. 그리고 제 동생은 심장병 환자입니다. 여기서 신체적 위해가 가해진다면 특수협박 및 상해죄가 성립됩니다."
"하! 이 새끼 봐라? 빚쟁이 주제에 법을 논해?"
박두식이 쇠지게를 바닥에 쾅 내리찍으며 선우의 멱살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부서진 문틀 사이로 구두 굽 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렸다.
"두식아, 무식하게 굴지 마라. 우린 합법적인 채권자야."
포마드 머리를 말끔하게 빗어 넘기고 고급 이탈리아제 맞춤 정장을 입은 사내, 대성파이낸셜의 대표 강 실장이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그의 몸에서는 빗물 냄새와 섞인 고가의 시프레 향수 냄새가 풍겼다. 독사처럼 차가운 눈빛을 지닌 강 실장은 방 안의 유일한 의자를 끌어당겨 먼지를 털어내고 비스듬히 앉았다.
"이선우. 네 외삼촌이 네 명의를 도용해서 불법 사채 보증을 서고 도망친 금액이 얼마인지 알지?"
강 실장은 품 안에서 가죽 서류철을 꺼내 테이블 대용으로 쓰이던 부서진 플라스틱 상 위에 올려놓았다.
"원금 3억에 연체 이자 24%를 더해서 현재 총 채무액 5억 2천만 원. 너희 가문의 신용도는 이미 '대성파이낸셜 채무 위험 등급 S', 즉 즉시 처분 대상이다."
선우는 멱살을 잡은 박두식의 손을 흘려보내며 강 실장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자제한법 제2조에 따르면 최고이자율은 연 20%를 초과할 수 없습니다. 초과된 이자 계약은 무효입니다. 법적 대응을 준비 중입니다."
강 실장은 나지막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피도 눈물도 없이 차가웠다.
"법적 대응? 해봐라. 하지만 법이 집행되기 전에 네 아버지가 누워 있는 은혜요양병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생각은 해봤나?"
강 실장이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박두식이 품 안에서 또 다른 서류를 꺼내 선우의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은혜요양병원의 장기 미납 영수증이었다. 미납 금액 12,000,000원.
"네 아버지가 산소호흡기에 의존해서 간신히 숨만 쉬고 있는 거 알지? 우리가 병원 원무과에 압력을 넣어서 당장 내일 아침에 강제 퇴원 조치를 시키면 어떻게 될까? 산소호흡기가 떨어지는 순간, 네 아버지는 3분도 못 버텨."
"..."
선우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강 실장은 선우의 유일한 역린이 어디인지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아버지를 죽이겠다는 무언의 협박.
"오빠... 흐윽..."
선아가 거친 호흡을 몰아쉬며 옷깃을 꽉 쥐었다. 그녀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당장이라도 심장 발작이 터질 것 같은 절박한 상황이었다.
선우는 심호흡을 하며 차가운 이성을 끌어올렸다. 분노는 감정일 뿐, 상황을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철저히 계산해야 했다.
"원하는 게 뭡니까? 이 반지하 방을 다 부수고 우리 남매의 장기를 팔아도 5억은 나오지 않습니다. 당신들은 돈을 회수하는 게 목적일 텐데, 이런 극단적인 압박은 비효율적입니다."
강 실장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보통의 고등학생이라면 울부짖거나 무릎을 꿇었을 텐데, 이선우는 이 상황에서도 철저하게 손익을 계산하고 있었다. 역시 과거 전설적인 천재 과학자 이준호의 피를 이어받은 뇌지컬이었다.
"영리하군. 마음에 들어."
강 실장은 가죽 서류철을 열어 두꺼운 서류 한 뭉치를 선우의 눈앞에 툭 던졌다. 서류 봉투 겉면에는 정문고등학교의 마크와 함께 '강태성'이라는 이름이 굵게 적혀 있었다.
"정문고등학교 3학년 강태성. 강산그룹 강승현 회장의 외아들이자 우리 대성파이낸셜의 가장 거대한 음성 자금줄의 후계자지. 하지만 이 녀석의 대가리는 완전히 깡통이야. 내신은 9등급에 모의고사는 찍기 바쁘지. 그런데 그 어머니인 윤혜원이 자기 아들을 아이비리그로 보내겠다고 난리를 치고 있어."
선우는 서류를 집어 들고 빠르게 훑어내렸다. 강태성의 수행평가 성적표, 영어 에세이 초안, 그리고 엉망진창인 학업 기록들이 눈에 들어왔다. 문장 구조의 붕괴, 논리적 오류의 범람. 전형적인 '지적 백치 상태'였다.
"우리가 강산그룹의 자금을 세탁해 주는 대가로, 강태성을 완벽한 천재로 포장해서 하버드에 합격시켜야 하는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대치동의 그 어떤 스타 코디네이터들도 이 깡통새끼의 생기부를 세탁하는 걸 포기했지. 그래서 내린 결론이 바로 너다, 이선우."
강 실장은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네가 강태성의 '그림자 브레인'이 되어라. 그의 모든 학교 과제, 영어 에세이, 생활기록부 세특 기록을 대필해라. 그뿐만 아니라 그의 사교 동선과 행동 패턴까지 완벽하게 설계해서, 그가 학교에서 '개과천선한 천재'로 보이도록 각본을 짜라."
선우의 가슴속에서 거대한 불길이 타올랐다.
아버지를 음해해 특허를 빼앗고 식물인간으로 만든 만악의 근원, 강산그룹. 그 가문의 후계자이자 자신을 학교에서 벌레만도 못한 존재로 괴롭히던 일진 강태성. 그 원수의 인생을 내 손으로 직접 디자인하고 가짜 천재의 가면을 씌워주어야 한다니.
지독한 모순이자 영혼을 갉아먹는 굴욕이었다.
하지만 선우의 뇌는 감정을 배제한 채 초고속 연산을 멈추지 않았다.
[상황 수치화 및 미래 예측]
- 제안 수락 시:
1. 여동생 이선아의 즉각적인 수술비 및 약값 확보 확률: 95%.
2. 아버지 이준호의 요양병원 생명 유지 장치 보존 확률: 100%.
3. 적의 심장부(강산그룹 후계자)의 모든 개인 정보 및 동선 데이터 장악 기회 획득.
4. 가짜 우상을 가장 높은 곳까지 끌어올린 뒤, 단 한 번의 지적 해체로 추락시킬 최종 복수의 기반 마련.
- 제안 거절 시:
1. 여동생의 급성 심장 발작으로 인한 사망 확률: 85%.
2. 아버지를 향한 사채업자들의 퇴원 압박으로 인한 사망 확률: 99.8%.
3. 선우 본인의 신체 포기 및 파멸 확률: 100%.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더라도, 가족을 살리고 원수의 목구멍에 칼날을 꽂아야 했다.
선우는 차가운 안경알 너머로 강 실장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좋습니다. 제안을 수락하겠습니다."
"오, 현명한 선택이야."
강 실장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계약서를 내밀려 했다. 하지만 선우는 손을 들어 그의 행동을 막았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저는 단순한 노예가 아닙니다. 거래를 원합니다."
"거래? 빚쟁이 주제에 거래를 제안한다고?" 박두식이 쇠파이프를 만지작거리며 위협적인 걸음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선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강 실장만을 응시했다.
"강태성의 내신 성적을 1등급으로 올리고 대외 스펙을 하나씩 확보할 때마다, 제 명의로 된 사채 원금과 이자를 단계적으로 삭감해 주는 합법적인 채무 탕감 합의서를 작성해 주십시오. 매 성공 단계마다 제 서명이 담긴 탕감 서류가 발효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저는 대필 작업을 시작하지 않겠습니다."
강 실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고등학생에 불과한 소년이 자신들의 무력 앞에서 오히려 사채 계약서의 원천 무효화와 단계적 탕감이라는 사법적 역제안을 던지고 있었다. 이선우는 이 위기 상황을 역으로 이용해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를 '비즈니스 파트너'로 재정립하려 하고 있었다.
"재미있군. 아주 영리해."
강 실장은 나지막하게 실소했다. 어차피 강태성을 하버드에 보낼 수만 있다면 강산그룹으로부터 떨어질 커미션은 5억 원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이 천재 소년의 동기를 확실하게 자극하는 편이 훨씬 이득이었다.
"좋다. 매 중간고사, 기말고사, 그리고 대외 수상 실적을 낼 때마다 채무 원금에서 1억 원씩 탕감해 주지. 약속대로 합의서를 작성해 주마."
강 실장이 품 안에서 새로운 공란의 계약서를 꺼내 펜과 함께 제시했다.
선우는 책상 서랍을 열고 아버지가 남겨준 낡은 몽블랑 만년필을 꺼냈다. 손가락에 닿는 만년필의 묵직한 감각이 그의 내면에 서늘한 복수의 칼날을 새겨 넣었다.
사각, 사각.
선우는 채무 탕감 조건이 명시된 계약서에 자신의 본명을 정갈한 필체로 서명했다. 원수의 가짜 인생을 설계하는 그림자가 되는 대가로, 자신의 진짜 이름을 되찾기 위한 첫 번째 사슬을 끊어내는 서명이었다.
서명이 끝나자, 강 실장은 만족스럽게 계약서를 챙겨 일어섰다.
"내일부터 당장 작업을 시작해라. 네 아버지가 누워 있는 요양병원비는 일단 유예해 주지. 하지만 결과가 신통치 않으면 산소호흡기는 언제든 떼어진다는 걸 명심해라."
강 실장이 문가로 걸어가다 멈춰 서서, 품 안에서 놋쇠 태그가 달린 낡은 열쇠 하나를 꺼내 선우를 향해 가볍게 던졌다.
탁.
선우가 허공에서 열쇠를 낚아챘다. 열쇠에는 강태성의 이름과 함께 정문고등학교 사물함 번호가 각인되어 있었다.
"강태성의 개인 사물함 마스터 키다. 내일부터 정문고등학교에서 그의 일상 동선을 파악하고, 그의 사물함 내부를 해킹해 그의 모든 스마트 기기와 일상 데이터를 장악해라.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완벽히 통제하는 것, 그것이 네 첫 번째 과제다."
강 실장과 사내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반지하 방에는 다시 차가운 정적과 비 냄새만이 감돌았다.
선우는 손바닥 안에서 차갑게 식어가는 놋쇠 열쇠를 꽉 쥐었다. 그의 안경 너머로 번뜩이는 날카롭고 깊은 지적 아우라가 어두운 반지하 방을 서늘하게 밝혔다.
원수의 완벽한 우상을 설계해 주마.
그리고 가장 높은 곳에 도달했을 때, 내 손으로 그 가면을 완벽하게 찢어발겨 주지.
선우는 조용히 만년필을 주머니에 넣으며 지옥을 향한 첫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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