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고독과 도서관의 망령
가장 친밀해야 할 가족이 던지는 정서적 옭아매기를 강민지가 스스로 찢어발기던 그 밤, 구관 물리실험실의 송현우는 낡은 가죽 다이어리를 펼쳐 든 채 창밖의 폭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민지가 거울 앞에서 마주했던 것은 가해자가 심어놓은 공포의 프레임이었고, 그것을 깨부순 것은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겠다는 주체적 각성이었다.
하지만 명성고등학교라는 거대한 먹이사슬은 그리 쉽게 멈추지 않는다. 오태식이라는 물리적 포식자의 이빨이 부러지자, 그 진공을 채우기 위해 더 교묘하고 보이지 않는 거미줄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주먹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소문, 차가운 배척, 그리고 평판의 살해.
다음 날 방과 후, 명성고등학교 본관 뒤편에 위치한 도서관 구석 자습실.
이곳은 햇빛이 잘 들지 않아 늘 푸르스름한 은빛 음영이 드리워지는 고요한 공간이었다. 서가 사이로 퀴퀴한 먼지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섞여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책장을 넘기는 서글픈 소리와 천장에 매달린 낡은 환풍기가 덜덜거리며 돌아가는 소리만이 정적을 메우고 있었다.
도서부원 윤지아는 카운터 뒤에 무표정하게 앉아 대출 대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단정한 안경 너머의 차가운 눈빛은 교내의 그 어떤 소동에도 흔들리지 않는 도서관의 유령 같았다. 그녀는 복도를 서성이던 현우가 자습실 안쪽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도 아는 척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서랍 아래에서 먼지 묻은 비밀 장부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밀어놓았을 뿐이다.
그 장부에는 최근 몇 주간 특정 학생이 대출해 간 도서 목록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불안 장애의 인지행동치료’, ‘공황 발작을 극복하는 법’, ‘신경쇠약의 임상적 이해’.
현우는 손가락 끝으로 그 책들의 제목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창백한 낯빛의 긴 앞머리 사이로 예리한 안광이 번뜩였다. 윤지아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 아이, 최근 일주일 동안 자습실 구석 자리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아. 밥도 먹지 않고, 화장실도 사람들이 가장 없는 시간대에만 다녀와. 마치 이 도서관의 망령이 된 것처럼.”
현우의 시선이 윤지아가 가리킨 자습실 가장 깊숙한 음지로 향했다.
그곳에는 두꺼운 뿔테 안경을 코끝까지 걸치고, 목 끝까지 단정하게 채운 넥타이가 무색할 정도로 초췌해진 남학생이 앉아 있었다. 명성고등학교 2학년 전교 1등, 박준영이었다. 그의 내신 성적표는 완벽한 1등급의 숫자로 도배되어 있었지만, 지금 그의 얼굴은 신경쇠약으로 인해 짙은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내려와 있었다.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샤프펜슬을 쥔 채, 모의고사 문제집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는 그의 어깨는 심하게 구부정해져 있었다.
그는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었다.
“저기 봐, 대필 셔틀 지나간다.”
“야, 쉿. 들리겠다.”
“들으면 어때? 어차피 은따잖아. 최유리가 쟤랑 말 섞는 애들도 다 차단하겠다고 단톡방에 공지 올린 거 못 봤냐?”
자습실 입구 쪽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남학생 둘이 준영을 힐끗거리며 노골적으로 낄낄거렸다. 그들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도서관 특유의 공명 효과 때문에 준영의 귀에 송곳처럼 날카롭게 박혔다.
준영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귀를 막고 싶다는 듯 고개를 더욱 숙였지만, 그의 귀는 이미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주변의 모든 사소한 웃음소리와 속삭임이 자신을 향한 조롱과 멸시로 변환되어 그의 뇌 신경을 갉아먹는 정서적 고문 상태.
이것이 바로 최유리가 설계한 ‘평판의 지옥’이었다.
최유리는 교내 여론을 쥐고 흔드는 SNS 인플루언서이자 여왕이었다. 그녀는 직접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 그저 교내 익명 커뮤니티 ‘대나무숲’과 수십 개의 단톡방 여론을 조작하여, 마음에 들지 않는 아이를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가스라이팅의 달인이었다.
최유리가 박준영을 타깃으로 삼은 진짜 이유는 지극히 이기적인 학업 카르텔에서 기인했다. 기말고사를 앞두고 대치동 카페에서 최유리는 준영에게 자신의 대학 입시용 수행평가 보고서를 대필해 달라고 강요했다. 완벽한 스펙을 갈취하려는 포식자의 요구를 준영이 단호하게 거절하자, 최유리는 그녀의 교묘한 이간질 네트워크를 가동했다.
‘박준영이 사실은 다른 애들 수행평가 소스를 훔쳐서 전교 1등을 유지한 거래.’
‘성격도 이상하고, 뒤에서 애들 뒷조사하고 다닌다며?’
대나무숲에 올라온 단 몇 줄의 허위 루머와 조작된 캡처본은 순식간에 준영을 ‘부정행위자’이자 ‘기괴한 아웃사이더’로 낙인찍었다. 동급생들은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최유리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자신들이 다음 타깃이 되지 않기 위해 준영과의 모든 관계를 차단하고 그를 유령 취급했다. 방관자 효과가 만들어낸 완벽한 사회적 고사 작전이었다.
같은 시각, 본관 4층의 화려하고 현대적인 ‘엘리트 자습실’.
성적 상위 1% 학생들만 전용 카드로 출입할 수 있는 그곳에서는 최유리가 전교 부회장 최보경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최유리는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보경의 어깨를 가볍게 주물렀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뼈를 깎아내는 듯한 가스라이팅의 칼날이 숨겨져 있었다.
“보경아, 이번 국제 모의 유엔 보고서 개요 짜는 거 말이야…… 네가 조금만 도와주면 안 될까? 어차피 너는 학생부 회장 스펙 이미 차고 넘치잖아. 나 이번에 이거 점수 잘 안 나오면, 우리 엄마 쇼핑몰 브랜딩 이미지도 망가지고 나 진짜 죽고 싶을 것 같아. 보경이 너는 나 엄청 아끼잖아, 그치?”
최보경의 포니테일 머리칼 아래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녀의 손은 단어장을 꽉 쥔 채 하얗게 질려 있었다. 완벽한 스펙을 요구하는 부모의 압박과 최유리가 쥐고 있는 사적인 약점(학원 족보 공유 정황) 사이에서, 보경은 이미 최유리의 수행평가 대필 노예로 전락해 있었다.
“어…… 응, 유리야. 오늘 밤까지 개요서 완성해서 메일로 보낼게.”
“고마워! 역시 보경이밖에 없어. 나 보경이 엄청 사랑하는 거 알지?”
최유리는 가식적인 웃음을 터뜨리며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대나무숲의 새로운 비방 댓글들이 생성되고 있었다. 준영을 철저히 밟아 놔야, 다른 모범생들이 자신의 대필 요구를 거절하지 못할 본보기가 되기 때문이었다. 기득권의 오만함이 교실 내부의 학업 생태계를 완벽하게 노예화하고 있는 현장이었다.
다시 도서관 구석 자습실.
준영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수학 문제의 공식들이 기괴하게 일그러지며 환청으로 변해갔다.
‘너 공부 좀 잘한다고 유세 떨지 마.’
‘어차피 너 같은 아웃사이더는 우리가 한마디만 하면 매장당해.’
‘준영아, 전교 1등 놓치면 아빠 인생도 끝나는 거 알지?’
변호사 아버지가 던지던 가혹한 성적 압박과 최유리의 비열한 웃음소리가 준영의 귓속에서 한데 뒤섞여 거대한 해일처럼 밀려왔다. 가슴이 턱 막히며 들이쉬는 숨만 있고 내쉬는 숨이 없는 과호흡의 전조가 그의 목구멍을 옥죄었다. 준영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책상을 짚으며 엎드렸다. 이 차가운 나무 책상만이 그가 세상의 혐오로부터 숨을 수 있는 유일한 방패막이였다.
그때, 서가 그늘 속에 서 있던 현우가 천천히 움직였다.
현우는 준영의 바로 옆 책상 모퉁이로 다가갔다. 그의 발소리는 먼지 더미 속에서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은밀했다. 현우는 주머니에서 비타민 음료 한 병과 작은 메모지 한 장을 조용히 꺼내 놓았다.
메모지에는 단 몇 줄의 차가운 문장이 적혀 있었다.
[소문은 바람과 같아서, 바람을 향해 소리치는 자의 목소리를 가장 먼저 삼킨다. 바람의 방향을 바꾸고 싶다면, 바람을 일으키는 자의 손가락 끝을 봐라. 그곳에 디지털 꼬리가 있다.]
준영이 거친 호흡을 몰아쉬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차가운 녹색 비타민 음료 병과 정갈한 필체로 적힌 메모지였다. 그리고 서가 저편 어둠 속으로 유유히 사라지는, 창백한 낯빛에 목 끝까지 단추를 채운 낡은 명성고 교복의 뒷모습.
송현우였다.
준영은 떨리는 손으로 메모지를 쥐어 들었다. ‘디지털 꼬리’라는 단어가 그의 지적 이성을 강하게 자극했다. 파이썬과 네트워크 분석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으나, 공포에 질려 자신의 무기를 잊고 있던 전교 1등의 뇌리에 번개가 치듯 날카로운 균열이 일어났다.
‘그 음침한 구관의 소장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준영은 주머니 속 부서진 샤프펜슬 조각을 움켜쥐었다. 최유리가 보낸 협박성 메신저 문자들과 대나무숲의 기괴한 트래픽 흐름이 그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데이터 맵으로 도식화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장의 공포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내일은 기말고사 수학 시험이 열리는 날이었다. 아버지가 요구한 만점의 기준, 그리고 최유리가 시험지 뒤에 숨겨놓을 잔혹한 덫이 준영의 뇌 세포를 다시금 마비시키려 숨통을 조여왔다.
준영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다시 샤프펜슬을 쥐었다. 수학 21번 고난도 문제를 풀기 위해 숫자를 적어 내려가려 했지만, 그의 손가락은 이성을 잃고 제멋대로 요동치고 있었다.
서걱, 서걱.
종이를 찢을 듯이 강해지는 연필 끝의 압박. 불안의 수치가 임계점을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뚝.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검은색 샤프심이 처참하게 으깨어지며 종이 위로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부러진 연필 끝이 종이를 찢고 들어갔고, 준영의 눈에서 참았던 뜨거운 눈물이 문제지 위로 툭, 툭 떨어지며 잉크를 흐려놓았다.
그는 결국 책상 위에 이마를 대고 소리 없는 오열을 터뜨렸다. 은빛 어둠이 내린 도서관 자습실 구석, 그 처절한 붕괴의 순간을 송현우는 서가 뒤편의 짙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그리고 아주 냉철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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