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는 올가미, 무너진 평화
비가 그친 교정을 빠져나와 집으로 향하는 길, 강민지는 등 뒤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서늘한 시선을 느꼈다. 축축한 안개 사이로 느린 속도로 기어오던 검은색 카니발 차량. 짙게 틴팅된 유리창 너머로 자신을 조준하는 듯한 기묘한 위압감이 골목길의 옹벽 위로 길게 그림자를 늘뜨리고 있었다. 국회의원 김태성의 사설 경호원들이 자신의 등하굣길을 감시하고 있다는 송현우의 경고가 머릿속을 스쳤지만, 민지는 애써 고개를 젓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진짜 지옥은 학교 밖이 아니라, 자신이 안전하다고 믿었던 집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집안은 비정상적으로 어둡고 고요했다. 평소라면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는 어머니의 분주한 달가닥 소리가 들려야 했을 시간이었지만, 거실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오직 베란다 창문을 타고 흘러드는 푸르스름한 노을빛만이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한 남자의 실루엣을 비추고 있었다.
민지의 아버지, 강명수였다.
포마드로 단정하게 넘긴 머리칼, 날카로운 금테 안경 너머로 번뜩이는 차가운 눈빛. 대기업 기획조정실 부장으로서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던 칼날 같은 슈트 핏은 그대로였지만, 그의 어깨는 미세하게 분노로 들끓고 있었다. 남편의 눈치를 보며 거실 구석에 위축된 자세로 서 있던 어머니 유영자가 민지를 보며 절박한 눈빛을 보냈다. 가지 마라, 말대꾸하지 마라, 무조건 엎드려라. 평생을 남편의 그늘 밑에서 기생해 온 어머니가 온몸으로 보내는 무언의 경고였다.
강명수는 고개를 돌려 딸을 바라보지조차 않았다. 그저 소파 테이블 위에 놓인 묵직한 황색 서류 봉투를 툭 던졌을 뿐이다. 유리가 깔린 테이블 위에서 봉투가 미끄러지며 날카로운 마찰음을 냈다.
“서명해라.”
낮게 가라앉은, 그러나 거역할 수 없는 지배적인 목소리였다. 민지는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서류 봉투 안의 종이를 꺼냈다. 오태식 측 변호인단이 작성한 ‘학교폭력 신고 취하 및 상호 합의서’였다. 오태식의 모든 폭력 행위를 단순한 ‘친구 사이의 장난’으로 규정하고, 민지가 허위 사실을 유포했음을 인정하며 향후 어떠한 법적·행정적 이의도 제기하지 않겠다는 추악한 굴종의 계약서였다.
“아빠…… 이게 뭔지 알고 서명하라는 거야? 오태식이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잖아. 나 걔 때문에 옥상에서 뛰어내리려고 했어.”
민지의 목소리가 억울함과 슬픔으로 갈라졌다. 울음이 목구멍을 막아섰지만, 강명수는 차가운 콧방귀를 뀌며 안경을 고쳐 쓸 뿐이었다.
“네가 죽긴 왜 죽어! 요즘 애들 다 그 정도는 부딪치고 깨지면서 자라! 네가 유난스럽고 나약해서 일을 이 지경으로 키운 거 아냐!”
강명수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거대한 그림자가 거실 벽면을 까맣게 덮었다. 일 평생 집안의 독재자로 군림해 온 남자의 폭압적인 기세가 민지의 숨통을 죄어왔다.
“오늘 기획조정실 사장실로 직접 호출을 받았다. 사장님이 내 어깨를 잡으면서 뭐라고 하셨는지 알아? ‘강 부장, 자식 단속 똑바로 하십시오. 국회 쪽에서 명성재단 일로 강 부장 이름이 오르내립디다’라고 하셨어. 김태성 의원실 보좌관이 우리 그룹 법무팀에 직접 전화를 넣었다더군. 네까짓 학폭 신고 하나 때문에, 내 평생의 직장 커리어가 대기발령으로 날아가게 생겼단 말이다!”
강명수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상기되었다. 그는 거실 바닥을 군화처럼 무겁게 디디며 민지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날카로운 손가락이 민지의 이마를 강하게 밀쳤다.
“네 성적이 떨어질 때도 내가 참았다! 사춘기 계집애의 예민함이려니 하고 눈감아줬어! 그런데 기껏 키워놨더니 집안 기둥뿌리를 통째로 뽑아버리려고 작정을 해? 네 이기적인 반항 때문에 온 가족이 길거리로 나앉아야겠냐? 훈이 학원비는 어쩌고, 우리 아파트 대출금은 네가 갚을 거야?”
어머니 유영자가 민지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울먹였다.
“민지야, 아빠 말씀 들어…… 한 번만 고개 숙이고 사과하면 다 해결될 일이잖니. 태식이 어머니가 학교 재단에 기부금도 많이 내시는 분이라는데, 우리가 어떻게 이겨…… 제발 한 번만 눈 감고 서명해 줘, 응?”
가족이라는 이름의 가장 친밀하고 잔인한 올가미가 민지의 목을 옭아맸다. 학교에서 오태식이 가했던 신체적 폭력보다, 가정 내에서 가장 신뢰해야 할 부모가 던지는 정서적 가스라이팅과 희생의 강요가 민지의 영혼을 더 깊은 나락으로 끌어당겼다. 눈물이 뺨을 타고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자신이 겪은 지옥 같은 고통은 부모의 안위와 남동생 훈이의 학원비라는 물질적 가치 앞에서 한낱 ‘이기적인 사춘기 반항’으로 취급당하고 있었다.
“싫어…… 나 사과 안 해. 걔가 전학 갈 때까지 나 절대 합의 안 해.”
민지는 들이쉬는 숨을 가까스로 붙잡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강명수의 눈이 뒤집히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년이 어디서 말대꾸야!”
강명수의 거친 손바닥이 거실 테이블 위의 유리잔을 쓸어버렸다. 쨍그랑하며 유리가 사방으로 깨져 나가는 날카로운 파편 소리와 함께, 민지는 본능적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자신의 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문을 잠그는 쇠붙이 소리가 유난히 차갑게 울렸다.
강민지의 방.
어릴 적 부모가 일방적으로 꾸며준 핑크빛 침대 커버와 파스텔톤의 인형들, 그리고 책상 위에 가득한 숨 막히는 문제집 더미가 기괴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민지는 침대 모퉁이에 엎드려 핑크빛 토끼 인형을 품에 꼭 안은 채 소리 없이 울부짖었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과호흡이 다시 시작되려 했다.
‘왜 나만 참아야 해? 왜 내가 피해자인데 내가 사과해야 하는 거야?’
어둠 속에서 고립된 채 스스로를 갉아먹는 절망의 소용돌이가 그녀를 집어삼키려 할 때, 민지는 옷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낡은 메모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송현우가 구관 물리실에서 건넸던 차가운 조언이 적힌 종이였다.
- 강민지, 가해자가 너를 지배하는 방식은 정서적 고립이다. 그리고 부모가 너를 억압하는 방식 역시, 그들이 가진 사회적 지위를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공포’에 불과해. 네 부모의 분노는 너를 향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나약함과 두려움을 너에게 투영하여 굴복을 강요하는 비겁한 방어기제다. 그 공포의 프레임에 동조해 서명하는 순간, 너는 평생 그들의 심리적 노예로 살게 된다. 주도권을 빼앗기지 마라. 네 가치는 성적표나 부모의 안위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현우의 목소리가 귀 안쪽에서 환청처럼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들이쉬고, 내쉬고.
민지는 눈물을 닦아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머릿속의 안개가 걷히며 차가운 이성이 돌아왔다. 현우의 말대로였다. 아버지가 지금 분노하는 이유는 자신이 잘못해서가 아니었다. 대기업 부장이라는 타이틀을 잃을까 봐, 국회의원의 권력 앞에 무릎을 꿇은 자신의 비겁함을 숨기기 위해 딸을 제물로 바치려는 공포의 발악일 뿐이었다.
‘나는 더 이상 누군가의 공포를 대신 짊어지는 노예가 되지 않아.’
민지는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척추를 곧게 세우고 어깨를 활짝 폈다. 거울 앞으로 걸어가 자신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눈을 깜빡이지 않고 정확히 15초 동안 버티는 ‘아이 컨택 홀딩’의 감각을 복기했다. 거울 속 여고생의 눈빛에는 더 이상 나약한 먹잇감의 흔적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존엄을 지키겠다는 단단한 투지만이 빛나고 있었다.
쾅! 쾅! 쾅!
“문 열어! 강민지! 당장 서명 안 해? 이 집안 망하게 하려고 작정했어?”
문 밖에서 강명수의 폭력적인 문고리 흔드는 소리와 고함이 쏟아졌지만, 민지의 얼굴은 대리석처럼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그녀는 책상 위의 합의서 서류를 쥐어 들었다.
민지는 턱을 당기고, 가슴을 편 채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장 낮은 목소리 톤으로, 단어 하나하나를 단호하게 뱉어냈다.
“안 해요. 절대로.”
민지는 덜덜 떨리는 오른손에 이성적인 힘을 주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강요한 합의서 양식의 정중앙을 움켜쥐고, 거울 앞의 차가운 눈빛과 마주한 채 거침없이 아래로 내리찢었다.
찌이이익—!
가족이라는 이름의 올가미를 스스로 찢어발기는 날카로운 종이 파열음이, 닫힌 방 안의 정적을 깨뜨리며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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