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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개의 복종, 피 묻은 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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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으로 쏟아지는 폭우가 구관 건물의 낡은 유리창을 세차게 때리고 있었다. 밤 11시.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구관 3층의 폐쇄된 물리실험실 안쪽은 오직 대리석 책상 위에 켜진 황색 양초 하나만이 주위를 희미하게 밝히고 있었다. 일렁이는 불빛 아래, 송현우는 낡은 가죽 다이어리를 펼쳐 둔 채 의자에 깊숙이 앉아 있었다. 그의 시선은 허공에 고정되어 있었고, 포커페이스 뒤에 감춰진 뇌 신경은 장동식과의 행정전 이후의 판세를 복잡하게 계산하고 있었다.


‘도교육청의 공문으로 장동식의 발은 묶였다. 하지만 이건 임시방편일 뿐이다. 김철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다음 타격은 훨씬 더 직접적이고 잔혹할 터.’


현우는 무의식적으로 엄지손가락 끝의 하얀 반창고를 만지작거렸다. 과거 동생 민우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공황 발작의 찌릿한 전조가 척추를 타고 올라왔지만, 그는 호흡을 아랫배로 내리누르며 차분하게 평정심을 유지했다. 그때였다.


쿵, 쿵, 쾅!


정적을 깨뜨리는 거칠고 무거운 소음이 물리실 철문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노크라기보다는 무언가에 쫓기는 짐승이 문을 부수고 들어오려는 듯한 절박한 타격음이었다. 현우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시선을 문으로 돌렸다.


철컥, 스르륵.


빗장에 잠겨 있지 않던 철문이 거칠게 열리며, 빗물과 함께 비린내가 진동하는 인형 하나가 교실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오태식이었다.


한때 명성고 2학년 교실을 공포로 지배하던 일진 행동대장의 위용은 온데간데없었다. 오태식의 교복 셔츠는 갈갈이 찢겨 빗물과 진흙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젖은 반삭 머리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피멍과 찢어진 상처투성이였다. 특히 그의 오른쪽 어깨와 옆구리는 무자비한 구타를 당한 듯 비정상적으로 굽어 있었다. 빗물을 뚝뚝 흘리며 서 있는 그의 모습은 벼랑 끝에 몰린 늑대 같았다.


“송…… 송현우…….”


태식은 갈라진 목소리로 현우의 이름을 뱉었다. 그의 목소리는 분노와 공포, 그리고 육체적 고통으로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대리석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우람한 체격을 이용해 현우를 위압하려 했으나, 부러진 다리가 무게를 견디지 못해 책상 모서리를 잡고 겨우 지탱했다.


“네 녀석이…… 네 녀석이 날 이렇게 만들었어…….”


태식은 이빨을 드러내며 현우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현우는 소파에 앉은 채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조용히 올려다볼 뿐이었다. 현우의 흔들림 없는 시선이 태식의 왼쪽 눈동자에 꽂히는 순간, 기괴한 현상이 발생했다.


오태식의 오른쪽 입술 끝이 0.1초 주기로 파르르 떨리기 시작한 것이다. 긴장과 열등감이 자극받을 때 발작하는 구강 틱 장애 증상이었다. 현우의 눈빛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태식의 뇌 신경은 과거 매점 앞에서의 패배와 교실 폭주 당시의 공포를 무의식적으로 복기하고 있었다. 조건반사적인 공포 각인이었다.


“아직도 허세를 부릴 힘이 남아 있나 보군, 오태식.”


현우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한 저음으로 울려 퍼졌다. 감정을 배제한 150Hz 대역의 차가운 선언.


“김철수에게 버림받은 기분이 어떤지 물어보진 않겠다. 체육창고에서 네 부하였던 배강두와 녀석들에게 개처럼 맞으면서, 네가 구축했던 폭력의 세계가 얼마나 허무한 모래성이었는지 뼛속 깊이 깨달았을 테니까.”


“닥쳐! 이 음침한 새끼가 뭘 안다고 지껄여!”


태식은 소리를 지르며 책상 위에 놓인 현우의 가죽 다이어리를 빼앗아 찢어버리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현우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태식의 부러진 손가락 마디를 차갑게 응시했다. 태식이 다이어리에 손을 대기도 전에, 부러진 손가락의 격렬한 통증이 뇌를 찔렀고, 그는 비명을 지르며 손을 거두었다. 힘의 균형은 이미 무너져 있었다.


현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의 캐비닛에서 구급상자를 꺼내왔다. 그는 태식의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 피가 바닥에 떨어지면 청소하기 번거로우니까.”


태식은 굴욕감에 입술을 깨물었지만, 당장 쓰러질 것 같은 육체적 한계 때문에 거칠게 의자를 끌어당겨 주저앉았다. 현우는 차가운 손길로 빨간 소독약을 면봉에 묻혀 태식의 찢어진 이마와 뺨에 문질렀다. 소독약이 상처에 닿을 때마다 태식의 몸이 움츠러들었지만, 현우의 손길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철저히 고장 난 기계를 수리하는 듯한 임상적 냉혹함이었다.


“왜…… 왜 날 돕는 척하는 거야? 네가 내 인생을 나락으로 보냈잖아!”


태식이 신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착각하지 마라. 난 널 돕는 게 아니다.”


현우는 소독약을 치우고, 책상 위에 놓인 노트북 화면을 태식의 방향으로 돌려놓았다. 화면에 뜬 것은 복잡한 엑셀 시트와 계좌 거래 내역들이었다. 태식의 눈동자가 그 화면을 읽어내리는 순간, 그의 구강 틱 장애가 한층 더 격렬하게 요동쳤다.


“이건…… 네가 어떻게 이 장부를……?”


“네가 임성규와 1학년 피해 학생들에게 갈취한 돈의 송금 내역, 그리고 그 자금들이 흘러 들어간 불법 사설 토토 사이트의 계정 명의와 베팅 로그다. 매점 사장 한 씨의 외상 장부와 대조하니 오차 범위 0.3% 이내로 완벽히 일치하더군.”


현우는 다이어리를 펼쳐 들고 만년필 끝으로 화면의 특정 수치를 가리켰다.


“이건 단순한 학교폭력이 아니다. 형법 제350조 공갈죄, 그리고 사설 스포츠토토 이용으로 인한 국민체육진흥법 위반이다. 이 자료가 경찰에 접수되는 순간, 너는 소년원이 아니라 정식 형사 재판을 받고 실형을 살게 된다.”


“협박하는 거냐? 어차피 난 김철수한테 버림받았어! 감옥에 가든 말든 상관없어!”


태식이 이판사판이라는 듯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현우는 그의 눈동자 아래쪽 근육의 미세한 떨림을 포착했다. 거짓말이었다. 녀석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정말 상관없을까? 네 아버지 오만석 씨는 불법 사채업과 오락실을 운영하는 폭력적인 인물이지. 너는 매일 밤 집에서 그 사채업자 아버지에게 야구 배트로 맞으며 공포를 배웠고, 그 스트레스를 학교에서 약자들에게 풀며 서열을 유지했다. 네 구강 틱 장애는 네 아버지의 폭력이 만든 각인이야.”


현우의 나직한 음성이 태식의 심장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치부를 정확하게 후벼 팠다. 태식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만약 네 아버지가 운영하는 사채업 자금이 네 불법 토토 계좌를 통해 흘러 나갔다는 사실을 경찰이 수사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네 아버지는 탈세와 금융법 위반으로 전 재산을 압류당하고 구속될 거다. 돈과 힘만이 전부라고 믿는 네 아버지가, 자신을 파멸로 이끈 주범이 다름 아닌 아들 녀석의 멍청한 베팅 때문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현우는 말을 멈추고 태식의 눈을 깊숙이 응시했다.


“그 폭력적인 아버지가 감옥에 가기 전, 너를 살려둘 거라고 생각하나?”


태식의 온몸이 눈에 띄게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식은땀이 뺨의 핏자국과 섞여 턱밑으로 떨어졌다. 그의 머릿속에는 골프채를 들고 자신을 내려다보던 아버지의 광기 어린 눈빛이 떠올랐다. 김철수에게 버림받은 것은 학교에서의 권력 상실일 뿐이었지만, 아버지의 분노는 실질적인 ‘죽음’을 의미했다. 오태식은 마침내 자신이 서 있는 벼랑 끝의 깊이를 깨달았다.


“사…… 살려줘…….”


태식의 입에서 마침내 비굴한 애원이 흘러나왔다. 그의 무릎이 힘없이 꺾이며 대리석 바닥에 둔탁한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한때 교실의 지배자였던 괴물이, 창백한 은둔자 앞에 완전히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는 비참한 하수인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어떻게 하면 돼? 철수 그 새끼한테 복수할 수만 있다면, 내 아버지가 날 죽이지 않게만 해준다면…… 뭐든지 할게. 시키는 대로 다 할게!”


현우는 무릎을 꿇은 태식을 차갑게 내려다보며 다이어리의 새 페이지를 펼쳤다. 그리고 붉은색 만년필을 들어 굵고 단단한 글씨로 문장을 써 내려갔다.


[보안 유지의 절대 규칙]

1. 클리닉의 존재와 상담 내용, 소장의 정체를 발설하는 자는 더 이상 보호받지 못한다. 위반 시 즉각 사법적 파멸을 집행한다.

2. 지시받은 임무 외의 독단적인 폭력과 비행은 일절 금지한다.

3. 소장의 지시는 학교 규정보다 우선하며, 즉각 실행한다.


현우는 다이어리를 태식의 눈앞에 내려놓았다.


“이것이 ‘클리닉 철칙’이다. 여기에 네 이름을 적고 서명해라.”


태식은 떨리는 손으로 펜을 쥐려 했으나, 상처 입은 손가락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찢어진 뺨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피를 오른손 검지손가락 끝에 묻혔다. 그리고 다이어리의 하얀 종이 위에 붉은 피로 자신의 이름 ‘오태식’을 정갈하게 적어 내린 뒤, 선명한 피 묻은 지장을 꾹 눌러 박았다.


붉은 핏자국이 다이어리 위에서 기괴하게 번져 나갔다. 사냥개가 스스로 목줄을 채우고 절대적인 복종을 서약하는 피 묻은 서약이었다.


현우는 다이어리를 거두어 품속에 넣으며 차갑게 말했다.


“계약은 성립되었다. 이제 사냥개로서 네 효용 가치를 증명해 봐라. 일진 연합 내부의 움직임은 어떠하지?”


오태식은 바닥에 엎드린 채, 숨을 헐떡이며 자신이 가진 첫 번째 고급 정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최…… 최유리야. 오태식이 무너지니까 그년이 완전히 독이 올랐어. 철수한테 잘 보이려고 대나무숲 앱을 장악해서 다음 타깃을 묻어버릴 계획을 짜고 있어.”


“다음 타깃?”


현우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어…… 전교 1등 박준영. 그 녀석이 최유리의 수행평가 대필 요구를 거절했거든. 최유리는 자기 심복 조미정을 시켜서 대나무숲에 가짜 계정들을 대량 생성했어. 조만간 박준영을 성적 조작 사기꾼이자 은따로 몰아세우는 대대적인 여론 매장 공작을 시작할 거야.”


현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태식이 가져온 정보는 1단계 후반의 거대한 전쟁이 어디서부터 시작될지 보여주는 정확한 이정표였다.


“좋아. 당분간은 김철수 패거리 주변을 맴돌며 녀석들의 동태를 감시해라. 네가 배신자라는 사실을 녀석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철저히 행동해.”


“알았어…… 알았으니까 제발 내 장부만은…….”


“네 행동에 달려 있다.”


현우는 차갑게 대답하며 물리실 철문을 가리켰다.


“나가 봐라.”


오태식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문을 열고 나가기 전, 현우를 향해 조용히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쏟아지는 장대비 속으로 그의 비참한 그림자가 사라져 갔다.


홀로 남은 물리실 안. 송현우는 양초 불빛 아래서 다시 가죽 다이어리를 펼쳤다. 피 묻은 오태식의 서약서 옆 페이지에, 현우는 새로 획득한 타깃의 이름을 나직하게 적어 내렸다.


‘최유리, 그리고 박준영.’


교내 커뮤니티의 장막 뒤에 숨은 여론의 여왕을 향해, 클리닉의 새로운 덫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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