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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의 거미줄과 붉은 공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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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2층 전문상담실, 일명 ‘위클래스(Wee Class)’ 내부에는 은은한 허브티 향이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그 평화로운 향기 아래 흐르는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창밖으로는 명성고등학교의 화려한 교정이 내다보였지만, 그 화려함은 현우에게 거대한 감옥의 창살과 다름없었다.


현우는 소파에 앉아 자신의 오른손 엄지손가락 끝을 내려다보았다. 하얀 반창고가 단단히 감겨 있었지만, 어젯밤의 흔적인 미세한 욱신거림은 가시지 않았다. 공황 발작의 전조가 올 때마다 가죽 다이어리 모서리를 손톱이 빠지도록 짓눌렀던 고통의 앵커링. 그 감각이 살아날 때마다 현우의 머릿속 복잡한 계산기들은 한층 더 냉혹하고 예리하게 회전을 시작했다.


맞은편에 앉은 한소희 교사는 초조한 표정으로 찻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단정한 정장 베스트 차림의 그녀는 평소의 온화함을 잃은 채 미간을 찌푸린 상태였다. 장동식 학생부장이 가해자 배강두의 야간 기습 폭력 사건을 은폐하려 드는 것을 눈앞에서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때, 테이블 위에 놓인 현우의 스마트폰이 나직한 진동음을 울렸다. 화면에 뜬 것은 박준영이 보낸 암호화 메시지였다.


[형, 학사 관리 시스템 출결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조작되고 있어. 송현우 이름 옆의 ‘출석’ 칸들이 빨간색 ‘무단결석’으로 바뀌는 중이야. 현재 누적 15일. 직권 전학 한계치인 15일을 정확히 맞췄어. 조작 로그 아카이빙 완료.]


한소희 교사가 현우의 굳어진 시선을 눈치채고 물었다.


“현우야, 무슨 일이니?”


현우는 말없이 스마트폰 화면을 돌려 한 교사에게 보여주었다. 화면을 확인한 한 교사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하얗게 질렸다.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손가락이 찻잔을 건드려 미세한 마찰음이 울렸다.


“출결 조작……? 장동식이 결국 철수의 지시를 받고 이런 짓까지 감행한 거구나. 공식 선도위원회를 열어 철거하려던 계획이 내 동아리 인가증에 막히자, 아예 시스템 자체를 위조해서 널 치워버리려고…….”


한 교사의 목소리에 깊은 분노와 함께 무력감이 서렸다. 교사들이 작성하는 전산망의 출결 기록은 학교 내부에서 절대적인 공신력을 가진다. 그것을 개인이 위조했다고 주장해 보아야, 학생부장이라는 거대 권력 앞에서는 ‘시스템 오류’나 ‘단순 기재 실수’로 뭉개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현우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얼어붙은 심해처럼 고요했다. 그는 주머니 속 가죽 다이어리를 지긋이 누르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2년 전에도 그랬습니다.”


“……어?”


“내 동생, 민우가 무너지기 직전에도 장동식은 똑같은 수법을 썼습니다. 민우가 학폭 피해를 호소하며 학교를 나오지 못하자, 장동식은 민우의 결석을 전부 ‘무단결석’으로 처리했죠. 그리고는 ‘학업 부적응으로 인한 강제 전학 처분’이라는 행정적 올가미를 씌워 민우를 학교 밖으로 밀어내려 했습니다. 피해자를 가해자로, 부적응자로 만드는 그 비열한 거미줄 말입니다.”


현우의 내레이션 같은 음성에는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래서 더 서늘하고 뼛속 깊이 사무치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한 교사는 가슴을 움켜쥐며 고개를 숙였다. 2년 전, 장동식의 그 거미줄을 알고도 재단과 교장실의 압박에 눌려 방관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무력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안하다, 현우야…… 내가 그때 더 강하게 맞섰더라면 민우가 그렇게 무너지지 않았을 텐데. 이번만큼은, 절대로 똑같이 당하게 두지 않겠어.”


한 교사의 눈빛에 교사로서의 마지막 존엄을 건 단호한 의지가 깃들었다. 현우는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품속에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겉면에 ‘도교육청 행정 서식’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인쇄된 서류였다.


“이미경 변호사님께 미리 자문을 받아둔 서류입니다. 장동식의 이 행정적 폭주를 막아설 유일한 방패죠.”


한 교사가 서류를 펼쳐 들었다. 눈동자가 빠르게 글자들을 훑어내려 갔다.


“이건…… 징계위원회 기피 신청서 양식?”


“예. ‘징계 절차 교란 전술(Administrative Disruption)’입니다.”


현우는 턱을 가볍게 당기고, 차가운 목소리로 전술의 메커니즘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장동식이 출결을 조작해 저를 직권 강제 전학시키려 하더라도, 결국 최종 행정 처분을 내리기 위해서는 징계위원회나 선도위원회의 형식적인 심의 의결을 거쳐야 합니다. 하지만 학폭법 및 도교육청 감사 규정 제14조에 의하면, 징계 대상 학생은 심의의 공정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는 위원에 대해 ‘기피 신청’을 제기할 권리가 있습니다.”


현우의 손가락이 서류의 특정 조항을 가리켰다.


“장동식 학생부장과 선도교사 최준태는 어젯밤 배강두 일당의 폭력을 은폐하려 한 정황이 있으며, 가해자 부모인 박영란에게 정기적으로 기부금과 향응을 제공받았다는 유착 의혹이 뚜렷합니다. 이 유착 사실을 기피 사유로 적시하여 공식 접수하는 순간, 장동식과 최준태는 제 징계 심의 권한에서 합법적으로 배제됩니다.”


“하지만 기피 신청을 낸다고 해서 장동식이 순순히 물러설까? 학교 내부에서 묵살해 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텐데.”


“그래서 ‘교무실 행정 지연 전술’을 병행하는 겁니다.”


현우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것은 가해자의 오만함을 비웃는 사냥꾼의 미소였다.


“기피 신청서가 접수되는 즉시, 학교장은 도교육청의 정식 유권해석이 내려지기 전까지 징계 절차를 전면 동결해야 합니다. 만약 이를 무시하고 징계를 강행한다면, 그 징계 처분은 절차적 하자로 인해 사법부에서 100% ‘효력 정지 가처분’ 대상이 됩니다. 장동식이 징계를 서두를수록, 스스로 무덤을 파게 만드는 덫입니다.”


한 교사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고작 열여덟 살의 고등학생이 학교라는 거대한 권력 기관의 행정 절차법을 이토록 치밀하게 해집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했다. 현우의 지성은 단순히 영리한 수준을 넘어, 상대의 규칙을 역이용해 상대를 옭아매는 거미줄 그 자체였다.


“알겠다. 이 기피 신청서는 내가 직접 교무실 행정창구에 공식 접수할게. 장동식이 손쓸 틈도 없이 도교육청 팩스 라인과 동시 연동되도록 조치하겠어.”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이제 사냥터로 올라갈 시간입니다.”


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추를 목 끝까지 단정하게 채운 교복 핏이 칼날처럼 날카로워 보였다.


* * *


본관 2층 학생부장실.


장동식은 가죽 의자에 깊숙이 묻혀 턱을 치켜든 채 냉소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책상 위에는 방금 전산망에서 출력한 송현우의 학사 관리 출석부가 놓여 있었다. 이름 옆에 붉은색 글씨로 선명하게 박힌 ‘무단결석 15일’이라는 낙인.


“송현우.”


장동식이 출석부를 손가락 끝으로 툭툭 치며 차갑게 말했다.


“네 녀석이 아무리 자율 동아리 인가증이니 뭐니 들고 와서 꼼수를 부려도, 학교의 진짜 법을 이길 수 있을 줄 알았나? 학칙 제28조에 의거해, 무단결석 15일 초과 학생은 학교장 직권으로 즉각 ‘대안학교 위탁 및 강제 전학 처분’ 대상이다. 오늘부로 네 녀석의 짐을 구관에서 싹 다 빼내라.”


그의 목소리에는 약자의 미래를 손끝 하나로 찢어발겼다는 승리자의 오만함이 가득했다. 그 옆에 선 선도교사 최준태 역시 팔짱을 낀 채 비열하게 낄낄거렸다.


하지만 현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대리석처럼 차갑고 단단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다. 현우는 장동식의 미세한 얼굴 근육 움직임을 디텍팅했다. 장동식의 왼쪽 눈밑 근육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겉으로는 오만하게 기세를 부리고 있지만, 어젯밤 배강두의 폭력 사건이 외부로 유출될까 봐 극도의 불안을 느끼고 있다는 명확한 신체 언어였다.


“그 출결 기록은 위조된 것입니다, 선생님.”


현우의 목소리가 학생부실의 무거운 공기를 뚫고 낮고 단단하게 울려 퍼졌다. 감정을 배제한 150Hz 대역의 차가운 저음.


“위조라니! 감히 교사가 작성한 공식 공문서를 모욕하는 거냐?”


장동식이 책상을 쾅 내려치며 벌떡 일어섰다. 분노로 인해 그의 안경이 코끝으로 흘러내렸고,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저는 어제도, 그저께도 구관 동아리 부실과 도서관에 정상 등교했습니다. 제가 도서관 자습실을 이용했던 시간의 공식 출입 등록 로그와 도서 대출 기록이 도서부 전산망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또한, 제가 등교하는 모습을 매일 목격한 구관 청소부 김덕배 씨의 무기명 목격 진술서가 확보되어 있습니다.”


“그딴 잡역부나 도서부원 녀석들의 사적인 기록 따위는 공식 출석부 앞에서는 아무런 법적 효력이 없어! 학생부장인 내가 전산에 입력한 기록이 곧 법이고 진실이다!”


장동식은 교사의 권위라는 거대하고 추악한 방패를 들이밀며 현우를 위압적으로 내려다보았다. 일반적인 학생이라면 이 단계에서 자신의 미래가 완전히 망가졌다는 절망감에 휩싸여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하지만 현우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며, 품속에 준비해 둔 하얀 서류 봉투를 꺼내 장동식의 책상 위에 조용히 올려놓았다.


“그렇다면, 이 서류는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서류의 제목을 확인한 장동식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징계심의위원 기피 신청서]

- 신청인: 송현우

- 피신청인: 학생부장 장동식, 선도교사 최준태

- 기피 사유: 가해자 배강두의 폭력 사건 은폐 기도 및 가해자 오태식의 부모 박영란과의 사적 유착 및 기부금 수수 혐의.


“이…… 이 쓰레기 서류는 또 뭐냐?”


장동식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거칠게 흔들렸다.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며 서류를 집어 들었다.


“도교육청 감사 규정 및 학폭법 제14조에 의거한 공식 기피 신청서입니다.”


현우는 차분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장동식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나직하게 규정집 조항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피신청인 장동식과 최준태 교사는 가해자 측과의 이해관계로 인해 저에 대한 심의의 공정성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본 기피 신청이 접수된 이상, 두 분은 저에 대한 그 어떤 징계나 전학 처분 심의 권한에서도 합법적으로 배제됩니다. 또한, 본 신청에 대한 도교육청의 최종 유권해석이 내려지기 전까지 저에 대한 모든 행정 처분 절차는 즉각 동결됩니다.”


“이 건방진 새끼가……!”


장동식의 이성이 분노로 인해 완전히 끊어졌다. 그는 들고 있던 기피 신청서를 양손으로 움켜쥐고 사정없이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바스락! 바스락!


하얀 종이 조각들이 장동식의 거친 손끝에서 갈가리 찢겨 나갔다. 그는 찢어진 종이 뭉치를 현우의 얼굴을 향해 내던지며 광기 어린 소리를 질렀다.


“이딴 쓰레기 서류 조각이 내 권위를 막아설 수 있을 줄 알았더냐! 내일 당장 교장 직인으로 널 강제 전학 처리해 버리면 끝이다! 기피 신청이든 뭐든 학교 내부에서 접수 자체를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란 말이다!”


찢어진 종이 조각들이 현우의 어깨와 머리 위로 하얀 눈처럼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현우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의 차가운 눈동자는 찢어진 종이 조각들을 통과해 장동식의 일그러진 얼굴을 정확히 응시하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학생부실 구석에 놓여 있던 낡은 팩스 기기가 요란한 비명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삐이이이— 찌르르르릉!


정적을 깨뜨리는 기계음과 함께, 팩스 수신 대기등이 붉은색으로 격렬하게 깜빡였다. 이윽고 둔탁한 회전음과 함께 붉은색 도교육청 공식 로고가 선명하게 인쇄된 공문 한 장이 천천히 밀려 나오기 시작했다.


행정실 조교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팩스 앞으로 달려가 서류를 받아 들었다. 서류의 내용을 확인한 조교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붉은 공문을 장동식에게 내밀었다.


“부, 부장님…… 도교육청에서 온 긴급 공문입니다…….”


장동식이 조교의 손에서 공문을 거칠게 낚아챘다. 그의 눈동자가 붉은 공문의 헤드라인을 확인하는 순간, 그의 온몸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도교육청 긴급 지시 공문]

- 수신: 명성고등학교장 신용남

- 발신: 도교육청 학교안전조사과

- 제목: 송현우 학생에 대한 징계 및 전학 절차 즉각 보류 및 출결 조작 의혹 경위서 제출 명령.

- 내용: 본 청에 접수된 ‘징계위원 기피 신청서’ 및 ‘출결 데이터 실시간 조작 정황 로그’ 분석 결과, 절차적 위법성이 농후하므로 최종 감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대상 학생에 대한 모든 행정 처분을 즉각 보류할 것을 명령함. 위반 시 학교장 직권남용 징계 조치 예정.


장동식의 손가락이 사시나무 떨리듯 사정없이 떨렸다. 그가 쥐고 있던 붉은 공문 종이가 요란하게 구겨지는 소리를 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현우를 바라보았다.


갈가리 찢어진 기피 신청서 종이 조각들이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가운데, 현우는 그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은 차가운 눈빛으로 장동식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완벽한 행정적 외통수였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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