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진 칼날의 맹세
산성비가 폭우처럼 쏟아지는 골목길 끝, 짙은 그림자 속에서 나타난 사내의 기세는 압도적이었다.
민세현은 빗물에 젖어 차갑게 식어가는 오철두의 시체 위에서 획득한 수명 칩 세 장을 움켜쥔 채,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가슴속에 박힌 기계 심장, ‘아포칼립스’ 보조기가 가쁜 호흡을 따라 덜커덕거리며 불길한 금속 마찰음을 냈다. 마취 비약의 약효 덕분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물리적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감각이 마비된 전신은 납처럼 무거웠다.
세현은 왼쪽 눈에 장착된 황동빛 단안경, ‘모노클’의 렌즈를 미세하게 조정했다.
스우우웅—.
렌즈 너머로 아른거리는 핏빛 격자망이 사내의 전신을 감쌌다. 사내의 손끝에 쥐어진 초진동 대형 합금 단검에서 방출되는 살의의 궤적은, 방금 전 소멸시킨 오철두 일당과는 격이 달랐다. 그것은 마치 온 세상을 집어삼킬 듯 묵직하고 예리한 붉은 사슬이 되어 세현의 심장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교단의 암살자인가?’
세현은 회색 후드 코트 안주머니 속 수명 칩들을 만지작거렸다. 최악의 상황에는 이 칩들의 에너지를 아포칼립스에 강제로 폭발적으로 주입해 ‘임시 과부하 모드’를 전개할 생각이었다. 심장이 영구적으로 파손되어 즉사할 위험이 있는 극약 처방이었지만, 저 사내가 내뿜는 기운은 그만큼 치명적이었다.
사내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빗물에 젖은 짧은 흑발 아래로 칼날처럼 날카로운 턱선이 드러났다. 검은색 교단 암살 슈트는 곳곳이 찢겨 있었고, 그 사이로 깊은 흉터들이 가득했다.
세현이 손가락 끝으로 인과의 실선을 자아내며 반사 경로를 조율하려던 찰나였다.
툭.
사내의 손에서 웅웅거리던 초진동 대형 합금 단검이 차가운 빗물 고인 바닥으로 떨어졌다.
“……!”
세현의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 사내는 단검을 버린 것도 모자라,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젖은 아스팔트 바닥에 무릎이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콜록! 쿨럭……!”
사내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빗물에 섞여 번지는 피는 일반적인 인간의 피가 아니었다. 기괴한 검은색 독소가 섞여 연기를 내며 아스팔트를 미세하게 부식시키고 있었다.
사내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뜯어내듯 열어젖혔다. 슈트가 찢어지며 드러난 그의 가슴 한가운데는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심장이 위치한 곳에 교단의 신성 무기에 저격당한 듯한 거대한 공동(空洞)이 뚫려 있었고, 그 주변의 혈관들은 검은색 배신의 독소에 오염되어 투명하게 비치며 파열해가고 있었다.
그가 내뿜던 압도적인 살의는 세현을 향한 적개심이 아니었다.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초인이 본능적으로 뿜어내는, 생존을 향한 처절한 집착과 절박함의 잔영이었다.
“너였군…… 직접 타격하지 않고도…… 인과를 비틀어 적을 자멸시키는 자가.”
사내, 강태윤이 피 묻은 이를 드러내며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의 눈동자는 빛을 잃어가고 있었지만, 세현을 바라보는 시선만큼은 집요했다.
“교단에…… 배신당했다. 내 심장은 파괴되었고, 혈관은 신성 독소로 타들어 가고 있지. 지상의 그 어떤 의사도, 심지어 백 노인조차 이 상처는 치료하지 못해. 오직…… 타인의 인과와 상처를 통째로 옮겨 받는다는 너의 기적만이…… 내 마지막 닻이다.”
태윤은 머리를 바닥에 처박으며 무릎을 꿇은 채 애원했다.
“나를 살려라, 조율사. 나를 살려준다면…… 내 목숨과 이 칼은 영원히 너의 방패가 될 것이다.”
세현은 모노클을 통해 태윤의 가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태윤의 영혼과 육체를 연결하는 생명선은 이미 실처럼 가늘어져 있었고, 검은 배신의 독소가 그 마지막 실선마저 갉아먹고 있었다. 등가교환의 법칙에 따르면, 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세현 자신이 그 대가를 온몸으로 짊어져야 했다.
머릿속에서 백 노인의 성난 목소리가 쟁쟁하게 울렸다.
‘세현아, 상처 동화는 네 심장 보조기를 갉아먹는 자살 행위다! 하루에 단 한 번만 써도 전신 혈관이 괴사할 수 있어!’
하지만 세현은 쓰러진 태윤의 뒤로 보이는 낡은 시계탑 지하실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선천적 수명 결핍증으로 누워 있는 여동생 서윤이가 있었다. 앞으로 교단 제18지부의 집행관 로건 일당이 오철두의 죽음을 조사하며 수색망을 좁혀올 터였다. 물리적 공격력이 전무한 자신에게는, 최전선에서 자신과 서윤을 지켜줄 강력한 육체적 방패가 필수적이었다.
이 사내를 살려야 한다. 그것이 내가 살아남기 위한 가장 확실한 인과의 투자다.
“……그 약속, 어기면 네 영혼의 인과가 먼저 찢어질 거다.”
세현이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며 태윤의 앞으로 다가갔. 가슴의 마취 기운 때문에 통증은 없었지만, 이 비장한 선택을 내리는 매 순간 영혼이 무겁게 짓눌렸다.
세현은 심장 보조기 아포칼립스의 강제 출력 밸브를 돌렸다.
*치이이익—!*
보조기에서 붉은 증기가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오며 가슴의 피스톤이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세현이 양손을 뻗어 태윤의 파괴된 가슴 위에 얹었다.
“상처 동화(Injury Assimilation).”
세현의 손끝에서 수십 줄의 투명하고 핏빛으로 빛나는 미세한 실선들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실선들은 바늘처럼 태윤의 찢어진 가슴 가죽과 파열된 혈관 속으로 파고들어, 그의 끊어져 가던 생명선과 세현의 아포칼립스 코어를 강제로 연결했다.
*웅웅웅웅—!*
두 사람의 신체가 기이한 핏빛 광채에 감싸이며 골목길의 빗줄기가 증발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등가교환의 가혹한 제약이 세현의 육체를 덮쳤다. 태윤의 가슴속에 박혀 있던 검은 배신의 독소와, 신성 무기에 의해 파열된 심장 세포의 치명적인 고통이 붉은 실선을 타고 역류하여 세현의 왼쪽 가슴으로 사정없이 쏟아져 들어왔다.
*쿠구구궁!*
아포칼립스 보조기 내부에서 기어들이 비명을 지르며 어긋나기 시작했다. 초고압 피스톤이 제어력을 잃고 덜커덕거리며 가슴뼈를 사정없이 때렸다. 마취 비약의 차가운 장벽을 뚫고, 전신 혈관이 일시에 터져 나가는 듯한 극심한 파열 통증이 세현의 뇌 신경을 강타했다.
“끄아아아악—!”
세현은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그의 왼쪽 가슴 주변의 피부와 혈관들이 검은 독소에 오염되며 순식간에 까맣게 괴사하기 시작했다. 혈관이 검붉은 색으로 부풀어 오르다 툭툭 터졌고, 코트 자락 위로 붉은 피가 분수처럼 배어 나왔다.
치유의 등가교환 한계치를 초과하려는 과부하가 아포칼립스 코어를 하얗게 태우려 하고 있었다.
반면, 세현이 고통을 고스란히 짊어지는 대가로 태윤의 가슴은 기적처럼 재생되기 시작했다. 뚫려 있던 거대한 구멍 속에서 새로운 근육 세포와 혈관들이 붉은 실선에 얽히며 청아하게 돋아났고, 검은 독소가 빠져나가며 심장이 다시 힘차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허억……!”
태윤이 크게 숨을 들이쉬며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동자에 생기가 가득 차올랐고, 파괴되었던 초인의 힘이 전신으로 맥동했다. 완벽한 재생이었다.
하지만 세현은 차가운 빗물 고인 바닥에 쓰러져 가슴을 쥐어짜며 격렬하게 피를 토해냈다. 검은 피가 빗물에 씻겨 내려가는 와중에도, 가슴 주변의 괴사 부위는 점점 더 넓어지며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전신의 세포가 일시적으로 마비되며 의식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으려 했다.
자아를 잃고 초월적인 허무의 심연으로 추락하려는 찰나.
재생된 태윤이 황급히 다가와 세현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태윤은 세현의 주머니 밖으로 흘러나와 바닥에 떨어져 있던 낡은 은빛 펜던트를 집어 들었다. 은방울꽃 문양이 새겨진, 세현의 어머니가 남긴 마지막 유품이었다.
태윤은 그 은방울꽃 펜던트를 세현의 덜덜 떨리는 차가운 손바닥에 꽉 쥐여주었다.
“정신 차려라, 조율사! 자아를 잃지 마라! 이 펜던트의 온기를 느껴라!”
손바닥을 파고드는 은빛 펜던트의 차가운 금속성 촉감과, 빗물 사이로 미세하게 풍겨오는 은은한 은방울꽃 향기가 세현의 뇌 신경을 자극했다. 어머니의 기억과 동생 서윤을 향한 연민의 감정이 정서적 닻이 되어, 추락하던 세현의 정신을 안정적인 현실의 경계선으로 강제로 끌어올렸다.
*스우우…….*
아포칼립스의 피스톤이 간신히 폭주를 멈추며 차가운 청색 증기를 내뿜었다. 세현은 펜던트를 움켜쥔 채 거친 숨을 내쉬며 의식을 붙잡았다.
태윤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다시 한번 세현의 앞에 단정하게 무릎을 꿇었다. 그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초진동 대형 합금 단검을 주워 올려 가슴 앞에 수직으로 세웠다.
빗속에서 단검의 날카로운 날이 은빛으로 차갑게 번뜩였다.
“목숨을 빚졌다, 민세현.”
태윤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흔들림도 없는 굳건한 충성심이 깃들어 있었다.
“이 부러진 칼날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이제 내 목숨과 이 검은 오직 너와 네 동생을 지키기 위한 방패가 될 것이다. 너를 노리는 그 어떤 살의도, 내가 가장 먼저 베어 넘기겠다.”
세현은 펜던트를 움켜쥔 채, 무릎을 꿇은 태윤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지옥 같은 슬럼가에서, 마침내 자신을 지켜줄 가장 강력하고 충직한 아군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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