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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채업자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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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비가 쏟아지는 제18 구역의 밤은 지독하리만치 차가웠다. 하늘을 가득 메운 오염된 황색 안개 사이로 떨어지는 빗방울들은 녹슨 사슬 거리의 허름한 지붕들을 때리며 쉭쉭 소리를 냈다. 산성을 띤 빗물이 건물의 붉은 양철 지붕을 부식시키며 내는 그 그로테스크한 소음 속을, 한 청년이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민세현.


그의 회색 후드 코트는 이미 산성비에 젖어 군데군데 얼룩이 져 있었고, 가슴팍에서는 미세한 금속성 구동음이 울리고 있었다. 백 노인의 지하 진료소에서 급히 빠져나온 직후였다.


‘통증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세현은 달리면서 자신의 왼쪽 가슴을 움켜쥐었다. 백 노인이 주입한 ‘백현우의 마취 비약’ 덕분에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은 강제로 마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이 아닌 기만이었다. 가슴 주변의 감각은 마치 남의 살을 만지는 것처럼 둔탁했고, 입안에서는 쓴 모래를 씹는 듯한 버석거림이 가시지 않았다. 지독한 미각 상실과 감각 마비의 부작용.


통증을 느끼지 못할 뿐, 가슴속 아포칼립스 보조기의 내부는 여전히 위태로웠다. 구리 합금으로 겨우 때워놓은 기어들이 불규칙하게 맞물리며 가슴뼈 안쪽에서 덜커덕거렸다. 조금이라도 호흡을 잘못 흐트러뜨리면 때워놓은 땜질이 터져 나가며 심장이 파열될 터였다.


세현은 달리는 와중에도 백 노인에게 배운 ‘심장 보조기 마모 억제술’을 필사적으로 시전했다. 들숨과 날숨을 극도로 일정하게 쪼개어 기계의 분당 회전수와 완벽하게 동조시켰다. 웅웅거리던 아포칼립스의 피스톤 마찰음이 아주 미세하게 부드러워졌다.


[잔여 수명: 01:42:11]


손목 측정기에서 점멸하는 붉은 숫자가 세현의 눈동자에 박혔다. 두 시간도 채 남지 않은 수명. 이 지독한 타임아웃이 그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세현의 이성을 뒤흔드는 것은 무전기 너머로 들려왔던 진수의 다급한 비명이었다.


‘도끼 오철두……!’


슬럼가에서 사채업을 하며 하층민들의 장기와 수명을 저당 잡고 팔아넘기는 인간 말종. 교단의 하급 집행관들에게 상납금을 바치며 묵인 하에 군림하는 폭력배의 보스였다. 그 오철두가 부하들을 이끌고 세현의 가옥을 포위했다는 소식은 세현의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차가운 분노를 완벽히 깨우기에 충분했다.


저 멀리, 거대한 폐기 시계탑의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했다. 세현의 집이자 하나뿐인 동생 서윤이가 누워 있는 안식처였다.


세현은 시계탑으로 통하는 골목 입구의 붕괴된 콘크리트 벽 뒤로 몸을 숨겼다.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지만, 그는 억지로 호흡을 죽였다. 가슴의 기계 심장이 요동치려는 것을 호흡 제어로 억누른 뒤, 그는 왼손을 들어 눈가로 가져갔.


백 노인이 건네준 황동빛 단안경, ‘모노클’이 그의 왼쪽 눈 위에서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세현은 아포칼립스에서 방출되는 미세한 에너지를 모노클의 렌즈로 흘려보냈다.


스우우웅—!


좌측 시야가 완벽하게 전환되었다. 낡고 어두운 녹슨 사슬 거리의 풍경 위로 푸르스름한 가상 격자망이 촘촘하게 덧씌워졌다. 그리고 그 격자망을 찢고 솟구쳐 오르는 붉은 기류들이 보였다.


그것은 ‘살의의 궤적’이었다.


골목길 구석구석을 가로지르는 붉은 실선들이 세현의 집, 지하실 입구를 향해 집중되어 있었다. 모노클의 렌즈를 통해 바라본 궤적들은 피처럼 붉고 끈적한 에너지의 파동을 내뿜고 있었다. 누군가를 죽이고, 짓밟고, 약탈하겠다는 탐욕스러운 의지가 허공에 선명한 핏빛 선으로 가시화되어 있는 것이었다.


세현은 고개를 비틀어 시계탑 입구를 바라보았다.


지하실 문 앞으로 통하는 좁은 계단 입구에 세 명의 사내들이 서 있었다. 가죽 징이 박힌 재킷을 입고 강철 파이프와 식칼을 든 오철두의 부하들이었다. 그들의 머리 위에는 녹색의 수명 수치가 떠 있었지만, 그들의 손끝과 무기에서는 서윤이가 누워 있는 지하실을 향해 붉은 살의의 실선들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안쪽은 아직이냐? 도끼 형님이 들어가신 지 꽤 됐는데.”


“흥, 계집년 하나 끌어내는 게 뭐 그리 어렵겠어. 그 침술사 늙은이년이 발악을 하느라 시간이 좀 걸리는 모양이지.”


부하들의 낄낄거리는 목소리가 산성비 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세현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내렸다. 가슴 속 아포클립스가 분노에 반응해 고압 증기를 뿜어내려 했지만, 세현은 억지로 이성을 붙잡았다.


‘차분해야 한다. 내 물리적 신체는 저들의 강철 파이프 한 대조차 버티지 못한다. 정면 대결은 자멸이다.’


세현은 자신이 가진 이능력의 본질을 되새겼. 인과의 조율. 상대방이 가하는 살의와 파괴의 원인을 비틀어 결과의 좌표를 재배치하는 힘. 그리고 그 힘을 극대화하기 위해 지금 그가 써야 할 공법은 명확했다.


‘인과의 실선 격자 배치법.’


세현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오른손을 허공으로 뻗었다. 그의 다섯 손가락 끝에서 보이지 않는 미세한 진동이 일어났다. 마취 비약 때문에 손끝의 감각이 무뎌져 있었기에, 그는 눈동자를 붉게 충혈시키며 모노클의 렌즈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가슴의 아포칼립스 코어에서 흘러나온 미세한 마력이 손가락 끝으로 몰려들었다. 이윽고, 그의 손끝에서 머리카락보다 수십 배는 얇고 투명한 핏빛 실선들이 자아내지기 시작했다. 보통의 인간에게는 절대 보이지 않는, 오직 모노클을 켠 세현의 눈에만 아른거리는 인과의 실선들이었다.


세현은 손가락을 미세하게 까딱이며 실선들을 골목길 사각지대로 뻗어 보냈다.


스스스스—.


실선들은 산성비 속을 소리 없이 가르며 바닥의 젖은 아스팔트, 양 벽면의 낡은 녹슨 파이프라인, 그리고 부서진 시계탑의 돌벽 모서리에 촘촘하게 고정되었다. 마치 거미가 먹이를 사냥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거미줄을 치는 것처럼, 세현은 골목길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인과의 격자망을 형성해 나갔.


그 격자망의 끝자락은 지하실 입구를 지키고 있는 세 명의 폭력배들의 발목과 그들이 쥔 무기, 그리고 지하실 문고리로 조용히 연결되었다.


부하들은 자신들의 몸뚱이와 무기가 어떤 기괴한 사슬에 묶이고 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은 그저 춥다며 발을 구르고, 담배를 입에 물 뿐이었다.


“쳇, 비는 왜 이렇게 많이 오는 거야.”


한 녀석이 투덜거리며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그 순간, 모노클의 시야 속에서 그 녀석의 발목에 연결된 핏빛 실선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반대편 벽면의 고압 전류 전선과 연결된 인과의 앵커를 작동시켰다. 녀석이 움직이는 물리적 에너지가 고스란히 다른 결과의 도화선으로 등록되는 순간이었다.


세현은 골목길 입구와 가옥 정문에 완벽한 인과의 덫을 설치하는 데 성공했다. 그가 자아낸 실선들은 적들이 움직이거나 무기를 휘두르는 순간, 그 힘의 벡터를 스스로의 파멸로 인도할 자멸의 방정식이 되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쾅—!


바로 그때, 지하실 내부에서 둔탁한 파괴음이 울려 퍼졌다. 세현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 늙은 년이 감히 누굴 찌르려 들어?!”


지하실 안쪽에서 도끼 오철두의 포악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이어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임정희의 짧은 비명이 들렸다.


“민서윤! 이 기생충 같은 년, 오늘 아주 비싼 값에 팔아넘겨 주마!”


오철두가 서윤이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가 누워 있는 침실의 문을 도끼로 부수기 시작하는 소리가 들렸다. 쾅! 쾅! 날카로운 강철 도끼날이 나무 문을 찢어발기는 잔혹한 타격음이 골목길까지 울려 퍼졌다.


시간이 없었다. 단 1초라도 지체하면 서윤이의 목숨이 끊어질 터였다.


세현은 더 이상 어둠 속에 숨어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차가운 이성을 유지하려 애쓰며, 천천히 벽 뒤에서 걸어 나왔.


빗물이 그의 헝클어진 흑발을 타고 흘러내려 뺨을 적셨다. 왼쪽 눈에 장착된 모노클의 렌즈가 어둠 속에서 차갑고 기괴한 crimson 빛을 발산하며 번뜩였다.


지하실 정문을 지키던 세 명의 부하들이 골목 입구에서 걸어 나오는 세현을 포착했다.


“어? 저 새끼는……!”


부하들이 무기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세현을 향해 살의를 가득 품은 눈빛을 보냈다. 그들의 손끝에서 뻗어 나온 붉은 살의의 실선들이 허공에서 거세게 요동쳤다.


세현은 천천히 걸어가며, 입꼬리를 차갑게 비틀어 올렸다. 가슴 속 아포칼립스 보조기가 덜커덕거리며 마지막 연명을 위한 피의 진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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