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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모의 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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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씨... 방금 그 키스, 정말로 100% 연기였나요?”


크루즈 테라스의 밤바람에 흩어지던 채원의 독백은 한남동 펜트하우스로 돌아오는 내내 차가운 침묵 속에 묻혔다. 이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완벽한 포커페이스는 어둠 속에서 한층 더 견고해졌고, 다친 팔을 감싼 그의 셔츠 소매 끝에는 채원의 립스틱 자국만이 붉은 낙인처럼 남아 있을 뿐이었다. 서로의 방으로 갈라져 문을 닫는 순간까지도 두 사람 사이에는 팽팽하게 날이 선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감정의 혼란에 빠져 있을 시간은 사치에 불과했다. 다음 날 아침이 밝자마자, 채원의 집무실 탁자 위로 날카로운 비보가 떨어졌다.


“대표님, 큰일났습니다. 동대문과 전국의 원사 유통망을 장악하고 있는 대기업 공급처들이 일제히 은성섬유로의 원자재 납품을 보류하겠다고 통보해 왔습니다.”


비서 임서현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채원은 태엽식 포켓 워치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강서현 이사장이 움직인 것이 분명했다. 크루즈 파티에서의 언론 플레이로 찌라시 위기를 멋지게 역이용당하자, 태신그룹의 실세다운 잔혹한 물리적 고사 작전을 개시한 것이다. 은성의 친환경 신제품 라인업 ‘디 아우라’의 런칭을 불과 일주일 앞둔 시점, 원자재 공급망이 차단된다는 것은 곧 은성의 심장이 멈춘다는 뜻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원주 공장의 상황은 더 참담했다. 은성의 1차 협력사이자 원단 가공을 담당하는 하청업체 대표 조만식이 현장 노동자들을 선동하고 나섰다는 보고가 이어졌다.


“조만식 사장이 노동자들에게 납품 대금 지연 우려를 핑계로 공장 가동 중단을 종용하고 있습니다. 한태수 상무의 사주를 받은 게 틀림없습니다. 당장 내일 가공 원단이 들어오지 않으면 신제품 생산 라인 자체가 완전히 멈춰 섭니다.”


CFO 송민호 부사장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차분함 대신 깊은 절박함이 묻어났다. 한태수가 구치소로 가기 전 마지막 발악으로 조만식을 매수해 은성의 목줄을 쥐려 한 것이다. 대기업의 자본 압박과 내부 협력사의 배신이 맞물려 채원을 완벽한 고립무원의 코너로 몰아가고 있었다.


채원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녀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은 회색빛이었다.


“숙부와 시어머니가 힘을 합쳐 내 목을 조르겠다면, 나 역시 그들이 건드릴 수 없는 가장 단단한 방패를 가져와야겠지요.”


“방패라 하심은... 설마 장혜숙 회장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송민호 CFO의 눈이 크게 떠졌다. 장혜숙. 전국 섬유 유통망의 80%를 막후에서 지배하는 실물 경제의 대모이자, 대기업의 횡포에 맞서 동대문 상인들을 지켜온 여장부였다. 하지만 그녀는 세속적인 타협이나 대기업의 자본 논리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까다롭고 엄격한 인물로 명성이 자자했다.


“장 회장님을 설득하려면 여의도의 화려한 장부가 아닌, 은성의 진짜 뿌리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송 부사장님, 을지로 구사옥으로 향하죠.”


***


붉은 벽돌로 지어진 을지로 은성섬유 구사옥은 40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품은 채 조용히 서 있었다. 여의도의 번쩍이는 빌딩 숲과는 대조적으로, 낡은 목재 문을 열고 들어서자 묵직한 윤활유 냄새와 오래된 원사 분진의 향이 코끝을 스쳤다. 채원의 아버지 한진우 회장이 평생을 바쳐 은성의 기틀을 닦았던 곳이자, 채원이 어린 시절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장인들의 방적기 소리를 듣던 안식처였다.


구사옥 2층의 낡은 집무실 안, 삐걱거리는 목재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채원은 장혜숙 회장과 마주 앉았다.


장혜숙은 질끈 묶은 머리에 실용적인 개량 한복을 입고 있었지만, 그녀의 깊게 팬 주름 사이로 안광만큼은 청년 못지않게 매섭게 번뜩였다. 거친 굳은살이 박인 그녀의 손이 낡은 찻잔을 천천히 매만졌다.


“한진우의 딸이 나를 을지로까지 불러낸 이유가 뭔지 궁금하군.”


장혜숙의 목소리는 중후했고, 거칠었다. 타협을 모르는 실업가의 위엄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태신그룹의 강서현 이사장이 우리 은성의 원자재 공급을 전면 차단했습니다. 장 회장님이 쥐고 계신 독점 유통망만이 은성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숨통입니다. 은성의 신제품 라인을 위해 원사 독점 공급 계약을 제안하러 왔습니다.”


채원은 당당하게 본론을 꺼냈다. 하지만 장혜숙은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서늘하게 비웃었다.


“대기업 태신이 너희 은성의 숨통을 끊으려 작정했는데, 내가 왜 내 상인들의 생계와 유통망을 담보로 그런 위험한 도박을 해야 하지? 은성은 파산 직전의 시체야. 상인들은 당장 먹고살 현금이 급해. 대기업 어음도 종이조각이 될까 봐 두려워하는 마당에, 네가 내미는 서류상의 예상 수익률 데이터를 믿으란 말이냐?”


장혜숙의 지적은 뼈아팠다. 조만식의 선동에 흔들리는 하청업체 사장들과 장 회장의 상인들이 가진 가장 큰 공포는 바로 ‘현금 유동성’이었다. 대기업의 어음은 결제 주기가 길고 부도 리스크가 존재했다. 채원이 처음에 준비했던 단순 단가 인상안은 장 회장의 코웃음 한 번에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채원은 떨리지 않는 손으로 가방에서 한 장의 빳빳한 계약서를 꺼내 장 회장 앞에 내려놓았다.


“그래서 저는 대기업의 어음 대신, 즉시 현금화가 가능한 ‘하도급 상생 결제 시스템’을 도입하려 합니다.”


“상생 결제 시스템...?”


장 회장의 매서운 눈매가 미세하게 좁혀졌다.


“예. 은성섬유가 발행하는 채권을 대기업 태신그룹의 신용도와 연계하여 시중 은행에서 즉시 대기업 우대 금리로 현금화할 수 있도록 설계한 시스템입니다. 이 채권은 만기일 전이라도 협력사들이 아주 미세한 할인율만 지불하면 즉시 은행에서 현금으로 교환할 수 있습니다. 상인들과 하청 공장들이 겪는 유동성 공포를 원천적으로 해결하는 법적 장치입니다.”


채원의 목소리에는 흔들림 없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단순히 이준의 재력에 의존해 돈을 퍼주는 방식을 선택하지 않았다. 대기업과 중소 협력사가 공존할 수 있는 혁신적인 금융 공학적 시스템을 스스로 창조해 낸 것이다.


“이 시스템의 보증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저는 은성섬유가 보유한 남은 예비 자산 전체를 은행 담보로 묶었습니다. 은성이 무너지더라도 협력사들의 대금은 100% 안전하게 우선 변제됩니다. 이것이 제가 상인들에게 드릴 수 있는 진짜 신의입니다.”


장혜숙은 채원이 내민 계약서 조항들을 꼼꼼히 읽어내려갔다. 거친 손가락이 ‘우선 변제 보증 조항’ 위를 쓸어내렸다. 장 회장의 안광이 묘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너... 정말 독한 아이구나.”


장 회장이 나지막이 탄식을 뱉었다.


“네 아버지 한진우는 평생 상생과 신의를 부르짖었지만, 너무 우직하고 착해서 대기업의 발톱에 찢겨 죽었지. 하지만 너는... 아버지를 닮았으면서도 훨씬 더 영리하고 잔인한 발톱을 숨기고 있구나. 이 상생 결제 시스템은 대기업의 자본 압박을 정면으로 우회하는 완벽한 금융 올가미야.”


장혜숙의 입꼬리에 마침내 깊은 미소가 걸렸다. 그녀는 찻잔을 완전히 비우고는, 품속에서 묵직한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좋다. 한진우의 딸이 가시 왕관을 쓰고 싸우겠다면, 이 장혜숙이가 기꺼이 네 가장 날카로운 창이 되어 주지. 동대문과 전국의 모든 원사 방적 공장망을 열어 은성섬유에 최고급 친환경 원사를 독점 공급하겠다.”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장 회장의 서명이 계약서 하단에 굳건하게 새겨졌다. 공급망 차단 작전과 조만식의 하청 거부 선동을 완벽하게 무력화시키는 위대한 동맹의 탄생이었다. 채원은 안도감과 함께 뜨거운 전율을 느꼈다.


바로 그 순간, 채원의 재킷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액정 화면에는 원주 공장장 강태식의 이름이 붉은 경고등처럼 깜빡이고 있었다. 채원이 전화를 받자마자, 수화기 너머로 다급한 비명 소리와 거친 바람 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대표님! 큰일 났습니다! 원주 방적공장 자재 창고에서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불길이 최고급 원사 재고가 쌓인 창고 전체로 번지고 있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불길이 타오르는 위협적인 파열음과 노동자들의 비명 소리가 채원의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겨우 공급망을 사수하자마자 들이닥친 절체절명의 재난 비보였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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