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래시 아래의 입술
“각방을 쓴다는 찌라시가 오늘 밤 자정 직전에 터질 겁니다. 마님.”
최 집사의 낮고 은밀한 목소리가 한남동 펜트하우스의 서재실 공기를 서늘하게 갈랐다.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그녀의 손끝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아들의 도박 빚 30억 원을 대위변제해 주겠다는 채원의 약속은 최 집사라는 충직한 사냥개의 목줄을 완벽하게 쥐어잡은 쇠사슬이었다. 강서현 이사장의 눈과 귀 역할을 하던 그녀가, 이제는 채원의 가장 유용한 이중 스파이로서 적들의 패를 가장 먼저 물어다 나르고 있었다.
째깍, 째깍, 째깍.
채원은 마호가니 책상 위에 놓인 부친의 유품, 태엽식 클래식 포켓 워치의 태엽을 천천히 감았다. 차가운 은빛 금속의 감촉과 규칙적인 아날로그의 소리가 극도의 스트레스로 마모되어 가던 그녀의 이성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배후는 강승준 사장인가요?”
“예. 삼류 매체의 송철민 기자를 매수했더군요. 한남동 펜트하우스의 동서로 완벽하게 분리된 방 구조와, 마님과 도련님이 세탁물조차 섞이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남남처럼 생활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정황까지 확보했다고 들었습니다.”
채원의 눈동자가 유리 가시처럼 차갑게 빛났다.
이준과의 쇼윈도 결혼이 계약 관계라는 사실이 언론에 폭로되는 순간, 주식 시장의 ‘특별관계자 지분 공동 공시’는 즉각 효력을 잃을 것이고 은성섬유의 주가는 다시 하한가로 폭락할 터였다. 한태수 일가와 강서현이 설계한 적대적 M&A의 덫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파멸적인 결말.
스르륵, 서재의 무거운 목재 문이 열리며 강이준이 걸어 들어왔다. 야간 기조실 업무를 마치고 귀가한 그의 얼굴에는 감정이 배제된 포커페이스의 가면이 굳건히 쓰여 있었다. 상처 하나 없이 무결한 그의 오른쪽 팔이 펜트하우스의 차가운 조명 아래서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소식은 들었습니다.”
이준이 채원의 책상 앞으로 다가와 섰다. 그의 단단한 체구에서 풍기는 은은한 시더우드 향이 채원의 코끝을 스쳤다. 채원은 그의 얼굴을 묵묵히 올려다보았다. 강서현이 던졌던 불길한 독액 같은 의혹—‘이준이가 네 아비의 마지막 순간에 어디 있었는지 모르는구나’라는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지만, 지금은 사적인 의심으로 동맹을 깨뜨릴 때가 아니었다. 비즈니스의 생존이 먼저였다.
“차은수 대표에게 연락했습니다.”
채원이 스마트 워치 ‘아우라-V’를 가볍게 터치하며 말했다. 위기관리 전문 홍보 대행사 대표인 차은수는 채원의 신호에 즉각 대기하고 있었다.
“차 대표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이준이 묻자, 채원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텍스트로 된 공식 부인 보도자료는 대중의 의심을 잠재우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의혹이 깊을수록, 대중은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자극적인 물리적 증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 찌라시를 보도하려는 삼류 기자와 강승준의 입을 단숨에 닥치게 만들, 압도적인 시각적 증거 말이죠.”
이준의 예리한 눈매가 아주 미세하게 좁혀졌다.
“그 물리적 증거라는 게 뭔지 알고 싶군요.”
“오늘 밤, 한강 유람선에서 청담회의 프라이빗 VIP 크루즈 파티가 열립니다. 언론사 데스크들과 사교계의 모든 눈이 쏠리는 전장이죠. 그곳에 우리가 동반 참석할 겁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뜨겁고 완벽한 부부의 모습을 그들의 카메라 앞에 직접 던져주는 겁니다.”
채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담 엘리자베스가 헌정했던 최고급 오트쿠튀르 은빛 실크 드레스가 그녀의 가냘픈 몸을 타고 흐르며 차가운 아우라를 뿜어냈다. 왕관을 쓰기 위해 가시밭길로 걸어 들어가는 여왕의 위엄이었다.
이준은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더니, 이내 자신의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낮게 대답했다.
“좋습니다. 기꺼이 당신의 완벽한 배우자가 되어 드리지.”
***
검은 밤하늘 아래, 한강의 검푸른 물결을 가르며 화려하게 빛나는 프라이빗 VIP 크루즈 유람선.
선상 데크는 청담회 멤버들과 재계의 거물들, 그리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포착하려는 취재진들의 카메라 플래시로 가득 차 있었다. 은빛 드레스를 입은 채원이 이준의 단단한 팔에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유람선 데크로 들어서는 순간, 사방에서 플래시 세례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강이준 상무님! 한채원 대표님! 최근 증권가 찌라시를 통해 돌고 있는 한남동 펜트하우스 각방 생활과 쇼윈도 부부설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크루즈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삼류 매체의 송철민 기자가 마이크를 들이밀며 기습적인 질문을 투척했다. 그의 눈빛에는 대기업의 뒷돈을 받은 하수인의 비열한 탐욕이 서려 있었다.
주변의 소음이 순간적으로 잦아들며, 사교계 안주인들의 위선적인 눈빛들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 쏠렸다.
그때, 붉은색 오트쿠튀르 드레스를 입은 진세희가 샴페인 잔을 들고 다가왔다. 부티크 ‘L’에서 당한 수모를 갚기 위해 강승준과 결탁한 그녀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어머, 불화설 찌라시가 터지기 직전이라 그런지 두 분 다정함이 평소보다 조금 과하신 것 같네요. 쇼윈도 부부의 유효기간이 벌써 끝난 건가요, 채원 씨? 한남동에서 각방을 쓰며 서로 숨소리조차 섞이지 않는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보죠?”
세희의 도발적인 목소리가 데크 전체에 울려 퍼졌다. 사교계 영애들이 부채 뒤로 킥킥거리며 비웃음을 흘렸다.
채원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이준의 팔을 잡은 손끝에 미세하게 힘을 주며, 저편 어둠 속에 대기하고 있는 차은수 대표를 향해 눈빛 신호를 보냈다. 차은수는 이미 언론사 파파라치 카메라들의 구도와 보도 타이밍을 세팅해 둔 상태였다. 채원의 절친이자 언론계 우군인 윤지희 편집장 역시 실시간 보도 시스템을 대기시키고 있었다.
이준이 천천히 채원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의 눈빛은 깊고 서늘했으나, 그 안에는 채원을 향한 묘한 열기와 비장함이 서려 있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한채원 씨.”
이준이 채원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채원의 귓가를 간지럽히며 심장 박동을 가파르게 끌어올렸다.
다음 순간, 이준의 단단한 손이 채원의 날씬한 허리를 강하게 감싸 안으며 그녀의 몸을 자신 쪽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 은빛 실크 드레스와 그의 블랙 슈트 사이에 단 1밀리미터의 틈새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한 완벽한 밀착이었다.
“...!”
채원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찰나, 이준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메우며 내려앉았다.
그의 단호하고 뜨거운 입술이 채원의 입술 위로 가차 없이 겹쳐졌다.
단순한 보여주기식 입맞춤이 아니었다. 이준의 입술은 채원의 숨결을 남김없이 집어삼키며, 깊고 정열적으로 그녀의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의 혀끝이 부드러우면서도 지독하리만치 소유욕 넘치게 얽혀왔다.
파아앗! 파앗! 파아앗!
유람선 데크를 집어삼킬 듯한 수백 개의 카메라 플래시가 두 사람의 머리 위로 하얗게 쏟아져 내렸다. 강물의 반사와 카메라 플래시의 불빛이 엉키며, 은빛 드레스를 입은 채원과 그녀를 품에 안고 격정적으로 키스하는 이준의 모습은 마치 세상에 단 둘만 존재하는 세기의 연인처럼 비현실적이고 아름답게 박제되었다.
채원의 심장이 흉벽을 뚫고 나올 것처럼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귓가에는 계약서 제7조—‘사적인 감정 교류는 일절 금지한다’는 조항이 경고음처럼 울려 퍼졌지만, 이준의 단단한 품 안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체온과 그의 입술이 주는 아찔한 감각에 그녀의 몸은 본능적으로 그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춤추듯 매달렸다.
그것은 완벽한 ‘쇼윈도 밀착 연기’이자, 동시에 이 가짜 관계의 경계를 위태롭게 뒤흔드는 파괴적인 스킨십이었다.
진세희의 샴페인 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깨지는 맑은 파열음이 들렸지만,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취재진의 감탄 섞인 셔터 소리만이 밤의 한강을 가득 메웠다.
***
키스가 끝나고 이준이 서서히 입술을 떼었다. 그의 입술 끝에 묻은 채원의 붉은 립스틱 자국이 기묘하게 치명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 순간, 윤지희 편집장이 이끄는 매거진 라인을 통해 현장의 고화질 사진이 실시간으로 포털 사이트 메인을 도배하기 시작했다.
[단독] 태신가 강이준♥은성 한채원, 불화설 일축하는 뜨거운 선상 키스... ‘세기의 로맨스’ 증명.
실시간으로 폭등하는 호평 여론과 함께, 은성섬유의 주가 창에는 다시 한 번 빨간색 상승 그래프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불화설 찌라시는 단숨에 ‘질투 섞인 악의적인 음해’ 프레임으로 덮여 소멸해 버렸다.
차은수 대표가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송철민 기자 앞을 가로막아섰다. 차 대표는 그의 손에 100억 원대 명예훼손 손해배상 청구 소송장이 담긴 법적 경고장을 단호하게 들이밀었다.
“송 기자님, 허위 사실 유포 및 기업 가치 훼손 혐의로 정식 제소하겠습니다. 법정에서 뵙죠.”
송철민은 사색이 되어 카메라를 챙겨 들고 현장에서 도주하듯 빠져나갔다. 진세희 역시 사교계 안주인들의 싸늘한 시선과 비웃음을 견디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며 크루즈 안쪽으로 사라졌다. 완벽한 역전승이었다.
소란스러운 파티장을 벗어나, 채원과 이준은 유람선 뒤편의 어둡고 고즈넉한 테라스 데크로 걸어 나왔다.
차가운 밤바람이 강물 냄새와 함께 불어와 채원의 뺨을 스쳤다. 드디어 단둘만 남게 된 어둠 속.
채원은 난간을 붙잡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입술에 남아 있는 그의 온기와 단단한 감각이 여전히 온몸의 신경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 속의 포켓 워치를 꽉 쥐며 평정심을 찾으려 애썼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이준을 바라보았다.
테라스의 어두운 조명 아래, 완벽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이준의 가면이 미세하게 금 가 있었다. 그의 호흡은 여전히 가빴고, 채원을 바라보는 그의 깊은 눈동자는 이성으로 통제되지 않는 감정의 파동으로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은 계약서 제7조를 위반한, 비즈니스의 불순물이 분명했다.
채원은 이준의 흔들리는 눈빛과 가쁜 호흡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심장이 쿵 내려앉는 듯한 아찔한 혼란에 빠졌다.
‘이준 씨... 방금 그 키스, 정말로 100% 연기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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