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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왕관, 진짜 위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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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이가 네 아비의 마지막 순간에 어디 있었는지 정말 모르는구나.”


강서현이 남긴 잔향은 지독한 독액처럼 한채원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서울 평창동 대저택의 어두운 복도, 대리석 바닥 위에 홀로 서 있는 그녀의 발끝에서부터 서늘한 한기가 차올랐다. 채원은 코트 주머니 속의 포켓 워치를 부서져라 꽉 쥐었다. 은빛 금속의 차가운 촉각만이 그녀가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해 주는 유일한 닻이었다.


그때, 저편 서재의 육중한 목재 문이 열리며 강이준이 걸어 나왔다. 결재 서류 파일을 든 그의 완벽한 슈트 핏은 여전히 흐트러짐이 없었다. 단단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아우라. 하지만 그가 다가올수록 채원의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


‘정말... 이 남자가 내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에 그 자리에 있었던 걸까?’


이준의 예리한 눈빛이 복도 불빛 아래 하얗게 질린 채원의 얼굴을 포착했다. 그의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좁혀졌다.


“한채원 씨.”


그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복도의 정적을 깨뜨렸다. 채원은 억지로 호흡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이미 차가운 가면을 고쳐 쓴 뒤였다.


“끝났나요, 이준 씨?”


“예. 돌아갑시다.”


이준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러나 차에 올라타 한남동 펜트하우스로 향하는 내내, 두 사람 사이에는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전속 기사 오창훈이 묵묵히 운전하는 차량 뒷좌석의 좁은 공간. 미세하게 흔들리는 차체 안에서 전해지는 이준의 묵직한 체온이 채원의 살결을 스칠 때마다, 그녀는 묘한 긴장감과 함께 가슴을 짓누르는 지독한 의심의 통증을 느껴야 했다. 이준의 오른쪽 팔은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 무결함이 오히려 채원의 의구심을 더 자극했다.


***


다음 날 오후, 서울 청담동의 가장 은밀한 골목에 위치한 프라이빗 부티크 ‘L’.


이곳은 대한민국 0.1%의 상류층 여성들만이 드나들 수 있는 성벽 같은 공간이었다. 높은 천장과 은은한 실크 향, 사방을 메운 화려한 조명 뒤로 보이지 않는 신분과 서열의 칼날이 번뜩이는 곳. 채원은 오늘 사교계 공식 데뷔를 위한 드레스 피팅을 위해 이곳을 찾았다. 물론, 시어머니 강서현이 깔아둔 또 다른 시험대라는 것을 직감하면서도 피할 생각은 없었다.


부티크의 주인인 마담 엘리자베스는 독특한 프랑스풍 드레스와 볼드한 골드 주얼리를 걸친 채 채원을 맞이했다. 그녀의 영악하고 예리한 눈빛이 채원을 조용히 훑었다.


“한채원 씨, 아니 이제는 태신가의 둘째 며느님이라고 불러야겠군요.”


엘리자베스의 입꼬리가 기묘하게 올라갔다. 그녀는 채원의 흔들림 없는 눈빛에서 망인 한진우 회장의 강직하고 타협 없는 품격을 읽어내고 있었다. 돈의 액수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교계에서, 엘리자베스는 드물게 진짜 사람의 그릇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여자였다.


“어머님께서 사교계 데뷔를 위해 특별히 이곳을 예약해 주셨더군요. 하지만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오늘 마침 청담회의 영애들이 이곳에서 사적인 모임을 갖고 있으니까요.”


엘리자베스의 은밀한 경고가 끝나기 무섭게, 부티크의 대리석 복도 저편에서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성진그룹의 후계녀 진세희, 그리고 채원의 사촌동생이자 한태수의 딸인 한유라였다.


“어머, 이게 누구야? 좀비 기업의 낙하산 상속녀가 태신가의 안주인이라도 된 양 청담동 부티크를 다 드나드네?”


진세희가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며 걸어왔다. 화려한 명품 오트쿠튀르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눈빛에는 채원을 향한 지독한 열등감과 적대감이 서려 있었다. 이준의 원래 정략결혼 상대였던 그녀에게, 채원은 자신의 왕관을 가로챈 비열한 약탈자에 불과했다.


그 옆에서 한유라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거들었다.


“세희 언니, 말도 마세요. 한남동 펜트하우스에서 각방을 쓴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쇼윈도 결혼이라는 껍데기만 쓰고 와서 가문의 안주인 행세를 하려니 얼마나 가엽겠어요? 분수에 맞지 않는 옷을 입으면 몸이 상하는 법인데 말이죠.”


유라의 이간질 섞인 조롱이 부티크의 공기를 차갑게 얼려버렸다. 주변에 모여 있던 사교계 사모님들이 부채로 입을 가리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진세희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채원의 낡은 포켓 워치를 발견하고는, 코웃음을 치며 손가락 끝으로 그것을 툭 건드렸다.


“이 낡아빠진 고물 시계는 또 뭐니? 파산한 은성가의 구닥다리 유품을 걸치고 태신가의 화려한 왕관을 쓰려 하다니, 정말 눈 뜨고 봐줄 수가 없구나. 품위라는 건 돈으로 살 수 없는 법인데 말이야. 안 그래, 마담?”


모욕이 채원의 귓가를 때렸다. 하지만 채원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걸어가 진세희의 손길이 닿았던 포켓 워치를 집어 들었다. 그녀의 단정한 손끝이 시계의 은빛 바디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세희 씨.”


채원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비명이나 분노 대신, 깊은 호수처럼 고요한 음성이 부티크 내부를 지배했다.


“이 시계는 제 아버님이 남기신 유품이자, 은성섬유의 40년 역사와 장인 정신이 깃든 유산입니다. 천박하게 돈의 액수로만 가치를 매기는 분들의 눈에는 그저 낡은 고물로 보이겠지만요. 진짜 명품이 무엇인지 모르는 안목이야말로 사교계에서 가장 부끄러워해야 할 일 아닌가요?”


“뭐라고? 천박해? 안목?”


진세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마담 엘리자베스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마담, 당장 이 무임승차자를 우리 부티크에서 쫓아내세요. 성진그룹의 VVIP 회원으로서 정식으로 요구합니다. 저런 격 떨어지는 여자와 같은 공간에서 드레스를 피팅할 수는 없으니까요. 내 요구를 거절한다면, 성진그룹 가문 전체가 이 부티크와의 거래를 영구히 끊을 겁니다.”


청담회 입회 및 퇴출 조항을 무기로 채원을 사교계에서 완전히 고립시키려는 진세희의 모독 공작이 극에 달한 순간이었다. 사모님들의 차가운 시선이 채원의 어깨를 짓눌렀다. 마담 엘리자베스 역시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저울질하듯 채원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채원은 잔잔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예리한 지략의 불꽃이 번뜩였다. 채원은 가방에서 태블릿 화면을 켜며 천천히 진세희 앞으로 다가갔다.


“쫓겨나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는, 이 자료를 보고 다시 결정하시는 게 좋겠군요.”


채원이 태블릿 화면을 진세희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화면에는 청담동 부티크 ‘L’의 은밀한 거래 내역과 성진그룹의 해외 지사로 흘러 들어간 극비 수입 명품 리스트, 그리고 관세 포탈 장부 사본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마담 엘리자베스가 제공한 고급 정보와 채원의 ‘재무제표 이면 분석술’이 결합하여 완성한 치명적인 무기였다.


“2025년 3월부터 지난달까지, 세희 씨 명의로 세관 통관을 우회해 밀수입된 프랑스 명품 가방과 보석이 총 14차례, 시가로 50억 원이 넘더군요. 관세법 위반 및 조세 포탈 혐의는 단순한 사교계 가십으로 끝나지 않을 텐데요. 국세청과 금융감독원에 이 자료가 넘어가면 성진그룹의 주가와 세희 씨의 입지가 어떻게 될지 궁금하네요.”


채원의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가 폭탄처럼 진세희의 고막을 때렸다.


“너... 너 이걸 어떻게...!”


진세희의 얼굴이 핏기를 잃고 하얗게 질려갔다. 그녀의 화려한 드레스 자락이 사시나무 떨듯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사교계 사모님들이 경악하며 진세희를 향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평판이 생명인 사교계에서 관세 포탈과 사법적 위기는 즉각적인 파멸을 의미했다. 유라 역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그때, 침묵을 지키던 마담 엘리자베스가 우아하게 걸어 나왔다. 그녀는 진세희를 차갑게 내려다보며 단호하게 선언했다.


“우리 부티크 ‘L’은 범법 행위에 연루된 인물을 VIP 회원으로 모시지 않습니다. 진세희 씨, 성진그룹의 멤버십 자격을 이 시간부로 즉시 박탈합니다. 당장 이 신성한 부티크에서 나가 주시죠.”


완벽한 파멸이었다. 진세희는 한마디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유라의 손을 잡고 도망치듯 부티크를 빠져나갔다. 사모님들은 순식간에 태세를 전환해 채원의 곁으로 몰려들어 아부 섞인 인사를 건넸다.


마담 엘리자베스는 채원의 앞에 서서 깊은 경의를 표하며, 부티크에서 단 한 벌만 제작된 최고급 오트쿠튀르 은빛 실크 드레스를 그녀의 손에 직접 헌정했다.


“이 드레스의 진짜 주인은 오직 한채원 씨뿐입니다.”


채원은 드레스를 받아 들며, 비로소 사교계의 새로운 안주인으로서의 진짜 위엄을 세상에 공인받았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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