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들의 만찬
서울 평창동의 가장 높은 지대, 성벽처럼 솟아오른 웅장한 대저택 앞. 차가운 밤안개가 대리석 기둥 사이를 유령처럼 기어 다니고 있었다.
한채원은 이준의 전용 의전 차량에서 내려 저택의 정문을 올려다보았다. 철저한 보안 검색대를 거쳐 진입한 이곳은 태신그룹의 실세이자 이준의 친모, 강서현 이사장의 사적 요새였다. 겉으로는 우아한 유럽식 대저택의 외관을 취하고 있었지만, 채원에게는 사방에서 날카로운 창날이 자신을 겨누고 있는 거대한 고문실처럼 느껴졌다.
바스락.
채원은 코트 주머니 속에서 손가락 끝으로 낡은 태엽식 클래식 포켓 워치를 매만졌다.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유품. 차가운 금속의 질감이 손가락을 타고 흐르자, 폭주하려던 심박수가 미세하게 가라앉았다.
“긴장됩니까.”
옆에 서 있던 이준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단 한 톨의 온기도 없었지만, 칼날 같은 슈트 핏과 흐트러짐 없는 포커페이스는 그 자체로 든든한 방패막이 같았다. 그의 오른쪽 팔은 상처 하나 없이 매끄럽고 완벽한 상태였다.
“긴장이라뇨.”
채원은 시선을 들어 이준의 서늘한 눈동자를 마주했다.
“적진의 심장부로 들어가는 것뿐입니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최 집사를 포섭해 허위 보고를 올렸으니 어머님도 오늘 우리를 샅샅이 검증하려 드시겠죠. 완벽한 부부 연출, 잊지 마세요.”
“그건 내가 할 걱정은 아닌 것 같군.”
이준은 차갑게 대꾸하며 자연스럽게 오른손을 뻗어 채원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의 손길이 닿는 순간, 채원의 척추를 타고 묘한 긴장감이 찌릿하게 흘렀다. 정략결혼 계약서 제7조(사적 감정 금지)의 족쇄가 머릿속에서 경고음을 울렸지만, 두 사람은 완벽한 쇼윈도 부부의 다정한 미소를 장착한 채 저택의 육중한 목재 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
***
만찬장은 높은 천장과 크리스탈 샹들리에의 화려한 불빛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공기는 숨이 막힐 정도로 무겁고 차가웠다.
길게 뻗은 마호가니 식탁의 상석에는 강서현 이사장이 앉아 있었다. 칼같이 재단된 에르메스 수트에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다이아몬드 브로치를 단 그녀는, 얼음처럼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채원과 이준을 맞이했다.
그 옆에는 이준의 이복형이자 태신건설 사장인 강승준이 비열한 미소를 띠고 앉아 있었고, 그의 아내이자 채원의 숙모인 유혜리는 지나치게 화려한 모피 코트를 걸친 채 채원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었다. 강서현의 개인 비서 유지민은 그림자처럼 구석에 서서 만찬의 동태를 살폈다.
“어서 오너라. 한남동 신혼생활이 아주 깨가 쏟아진다고 최 집사가 매일 밤 보고하더구나. 내 눈으로 직접 보니 과연 세기의 부부답군.”
강서현의 목소리는 우아했으나, 그 안에는 뱀의 독니 같은 날카로움이 숨겨져 있었다.
“어머님께서 배려해 주신 덕분입니다. 이준 씨가 제 서재 업무까지 사사건건 챙겨주어 아주 과분한 대접을 받고 있어요.”
채원은 우아하게 미소를 지으며 이준의 접시에 부드러운 고기 조각을 덜어주었다. 이준 역시 다정한 눈빛으로 채원의 뺨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맞장구를 쳤다. 위선과 연기로 가득 찬 숨 막히는 서막이었다.
그때, 유혜리가 콧방귀를 뀌며 은식기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챙강 하는 파열음이 만찬장의 정적을 깨뜨렸다.
“그나저나 채원아, 네가 태신가에 시집오면서 들고 온 예물 수준을 보고 사교계 사모님들이 뒤에서 무슨 수군거림을 하는지 아니? 명색이 은성섬유의 유일한 상속녀라는 애가, 그 흔한 다이아 세트 하나 제대로 맞추지 못해서 그런 구닥다리 태엽 시계나 차고 다니다니. 태신가의 품격을 생각해서라도 격에 맞는 보석을 걸쳐야지, 몰락한 가문 티를 꼭 그렇게 내야겠니?”
유혜리의 노골적인 모욕에 강승준이 기다렸다는 듯 거들었다.
“동서, 내 아내가 말이 거칠어 미안하네만 틀린 말은 아니지 않나. 은성섬유는 이미 부도 직전의 좀비 기업이고, 원주 공장 부지마저 경매로 넘어가기 일보 직전인데 무슨 여력이 있겠어. 이준이 네가 대위변제로 300억을 막아주지 않았다면 오늘 이 만찬장에 앉아 있지도 못했을 무임승차자지.”
채원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주머니 속 포켓 워치를 천천히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낡았지만 장인의 손길이 깃든 은빛 시계가 조명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숙모님, 그리고 아주버님.”
채원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이 시계는 제 아버님이 은성섬유 창립 기념으로 스위스의 독립 시계 제작 명가에 특별 의뢰해 단 한 점만 제작된 특주품입니다. 역사와 장인 정신이 깃든 유산은, 당장 돈만 주면 백화점에서 살 수 있는 흔한 다이아몬드 따위와는 궤를 달리하지요. 사교계의 진짜 품격은 보석의 캐럿 수가 아니라 그 가치를 알아보는 안목에서 나오는 법입니다.”
유혜리의 얼굴이 순간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채원은 멈추지 않고 강승준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리고 아주버님, 태신건설의 최근 부채 비율이 280%를 넘어섰고, 해외 리조트 개발 사업을 핑계로 홍콩 유령회사로 유출된 비자금 찌라시가 여의도 증권가에 돌고 있더군요. 은성섬유의 회생을 걱정하실 시간보다, 본인 회사의 사법적 리스크와 유동성 위기를 먼저 점검하시는 게 태신가의 품위에 더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너... 너 방금 뭐라고 했어!”
강승준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의 잔인한 눈빛에 핏발이 섰다.
“그만해라.”
강서현의 낮고 차가운 음성이 만찬장을 지배했다. 단 한마디였지만, 무소불위의 재벌가 절대 권력자의 위압감이 서린 목소리였다. 강승준은 분노를 억누르며 거칠게 자리에 다시 앉았다.
강서현은 냅킨으로 입가를 우아하게 닦아내며 채원을 쏘아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채원의 뛰어난 재무 분석 능력과 거침없는 지략에 경계심을 품은 눈빛이었다.
“채원아, 네 당돌함은 네 아비인 한진우 회장을 쏙 빼닮았구나. 하지만 지나친 독선은 화를 부르는 법이지.”
강서현은 미소를 지었지만, 눈빛은 얼음장 같았다.
“은성섬유의 경영권 방어와 주가 안정을 위해 이준이가 막대한 자금을 대위변제해 주었고, 태신의 의결권까지 위임해 주었다. 그렇다면 며느리로서 가문의 전통과 안주인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도리 아니겠니?”
“어떤 의무를 말씀하시는 건지요, 어머님.”
채원이 팽팽하게 맞서며 물었다.
“태신문화재단에서 이번에 친환경 사회공헌 사업을 대대적으로 확장하기로 했다. 은성섬유가 보유한 자사주 24%의 지분을 태신문화재단에 무상 기부하거라. 그것이 네가 태신가의 며느리로서 가문에 충성을 증명하고, 은성의 경영권을 안전하게 보장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무상 기부. 그것은 은성의 경영권을 합법적으로 강탈해 자신을 꼭두각시로 만들겠다는 강서현의 잔혹한 올가미였다. 만찬장 내부의 공기가 순식간에 진공 상태처럼 얼어붙었다.
채원의 심장이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지분을 넘겨주는 순간 모든 방어벽은 무너지고 아버지가 남긴 회사는 태신의 먹잇감으로 전락할 터였다. 반박할 논리를 빠르게 회계학적으로 계산하려던 찰나.
탁.
이준이 숟가락을 가볍게 내려놓았다. 무거운 정적 속에서 그 소리는 마치 선전포고처럼 울려 퍼졌다.
“어머니, 그 요구는 거두어 주십시오.”
이준의 목소리는 극도로 차분하고 이성적이었다. 완벽한 ‘무감정 제어술’이었다. 그의 눈빛은 어떤 도발 앞에서도 심박수를 유지하는 포커페이스의 전형이었다.
“이준이 너, 지금 감히 내 결정에 토를 다는 게냐?”
강서현의 눈썹이 꿈틀했다. 저택 내부의 온도가 순식간에 영하로 떨어지는 듯한 위압감이었다.
“비즈니스적 관점에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준은 어머니의 매서운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막힘없이 말을 이어갔.
“태신그룹 사외이사 정관 제14조와 현행 공정거래법상, 대주주 일가의 특수관계인 간 무상 지분 증여는 배임 및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에 정면으로 저촉됩니다. 특히 은성섬유는 현재 채권단 관리 절차가 진행 중인 민감한 상태입니다. 이 상황에서 태신문화재단이 은성의 지분을 무상 취득할 경우, 금융감독원의 특별 세무조사와 정경유착 내사를 피할 수 없습니다. 어머니께서 평생 쌓아 올린 재단의 명예와 태신그룹의 주가에 치명적인 오너 리스크를 안기는 행위입니다.”
법률과 정관, 그리고 객관적인 수치를 들이밀며 강서현의 논리를 원천 차단하는 완벽한 철벽 방어였다. 강서현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자신의 아들이 며느리의 편에 서서 자신을 완벽하게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에 그녀의 아랫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준이 네가... 감히 내게 법을 논해? 내가 네 후계자 지위와 지분 전체를 언제든 박탈할 수 있다는 걸 잊은 게냐?”
강서현의 목소리에 비정한 살기가 실렸다. 친아들마저 자신의 장기판 위의 말로 취급하는 절대 권력자의 협박이었다.
그러나 이준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얼음 같은 아우라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제 지위와 능력은 어머니의 총애가 아닌, 제가 입증해 온 투자 실적과 시장의 신뢰로 증명합니다. 태신을 위해서라도 법적 리스크를 안고 무리한 지분 강탈을 감행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습니다.”
이준은 말없이 테이블 밑으로 채원의 차가운 손을 꼭 쥐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단단하고 묵직한 온기가 채원의 뼈마디를 타고 전율처럼 흘러들었다. 계약서 제7조를 뛰어넘는, 목숨을 건 동맹의 방패막이였다.
채원은 그 순간 강서현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예리하게 주시했다. 미세한 동공 지진과 눈꺼풀의 떨림. 채원의 ‘인간 거짓말 탐지’ 능력이 강서현의 내면 깊숙이 숨겨진 진짜 욕망을 포착해 냈다.
강서현이 원하는 것은 단순한 은성의 지분 24%가 아니었다. 그녀는 은성섬유의 강릉 연구소에 잠들어 있는, 수천억 가치를 지닌 ‘유리 가시 나노 섬유 특허 기술’ 자체를 강탈해 태신건설로 이전하려는 거대한 집착을 품고 있었다.
만찬은 그렇게 차가운 정전 상태로 마무리되었다. 강서현은 끝내 지분 기부 요구를 관철하지 못했고, 이준과 채원의 완벽한 공수 연합 수 싸움 앞에 지배권을 일시적으로 상실했다.
***
숨 막히던 만찬이 끝나고 저택을 빠져나가기 위해 길게 뻗은 대리석 복도를 걸어갈 때였다.
“채원아, 잠시 멈추거라.”
뒤에서 들려오는 강서현의 차가운 음성에 채원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준이 경계하는 눈빛으로 돌아보려 하자, 강서현은 유지민 비서를 시켜 이준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준이 너는 기조실 보고서 결재 건이 남았으니 서재에서 기다리거라.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에 사적인 대화가 필요하니 말이다.”
이준은 채원의 눈빛을 확인한 뒤, 서늘한 긴장감을 남긴 채 유지민의 안내를 받아 서재 구역으로 향했다.
복도에는 오직 강서현과 한채원, 두 사람만이 남았다. 천장의 어두운 조명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대리석 바닥 위로 길게 늘어뜨렸다.
강서현은 천천히 채원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녀의 에르메스 수트 깃에 달린 다이아몬드 브로치가 어둠 속에서 차갑게 번뜩였다. 강서현은 채원의 단정한 로우 포니테일 헤어와 꼿꼿이 선 자세를 지긋이 응시하다가, 이내 채원의 귀밑까지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차가운 숨결이 채원의 목덜미에 닿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채원아, 네가 이준이의 비호를 받으며 승리를 확신하는 모양이구나.”
강서현의 목소리는 뱀이 기어가듯 낮고 잔인했다.
“하지만 가여운 것. 네 아비 한진우가 사망하던 그 비 내리던 밤, 그 외로운 골목길에서 심장이 멈춰가던 마지막 순간에... 내 아들 이준이가 어디에 서 있었는지 너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두근.
채원의 심장이 세차게 내려앉았다. 주머니 속 포켓 워치를 쥔 손끝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강하게 수축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머님.”
채원은 목소리의 떨림을 제어하려 입술을 깨물었지만, 강서현은 이미 그녀의 미세한 흔들림을 포착하고 잔인한 비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진실은 유리 가시 같아서, 쥐려 할수록 네 손바닥을 피투성이로 만들 뿐이란다. 내 아들 이준이의 그 다정한 눈빛 뒤에 숨겨진 추악한 가면을 마주하게 될 때, 네가 어떤 얼굴을 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구나.”
강서현은 채원의 어깨를 가볍게 톡톡 두드린 뒤, 차가운 구두굽 소리를 내며 어둠 속 복도 저편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홀로 남겨진 차가운 복도 한복판에서, 채원은 멈춰버린 시계 태엽처럼 굳어 있었다. 귓가에는 아버지가 사망 당일 주사된 특수 약물의 처방전 사본과, 그날 밤 이준의 행적을 둘러싼 불길한 의혹의 싹이 미친 듯이 싹터 오르며 심장을 옥죄어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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