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석 위의 동거
한남동 최고급 펜트하우스의 현관문이 묵직한 전자음과 함께 닫혔다. 바깥의 차가운 빗소리가 단숨에 차단되며 숨 막히는 정적이 거실을 감쌌다.
발밑에 깔린 화이트 그레이 톤의 대리석 바닥은 은은한 조명을 받아 매끄럽게 빛나고 있었지만, 온기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이탈리아제 최고급 가구들과 미니멀한 인테리어로 채워진 이 120평짜리 공간은 집이라기보다는 정교하게 설계된 현대식 요새에 가까웠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도련님. 그리고... 새 마님.”
거실 중앙에 서서 두 사람을 맞이한 것은 주름 하나 없는 검은색 아줌마 정장 차림의 최영숙 집사였다. 희끗희끗한 머리칼을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올림머리로 고정하고, 차갑게 굳어 있는 그녀의 얼굴은 마치 태신그룹 본가에 있는 강서현 이사장의 차가운 그림자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최 집사의 예리한 눈빛이 채원의 단정한 오피스 수트와 그녀가 손에 쥔 가죽 가방, 그리고 이준과의 물리적 거리감을 찰나의 순간에 훑고 지나갔.
“강 이사장님께서 특별히 신경 쓰라 지시하셨습니다. 신혼집의 가사 관리는 물론, 두 분의 편의를 위해 저희 관리단이 24시간 상주하며 보필할 예정입니다.”
보필이 아니라 감시겠지.
채원은 속으로 차갑게 비웃었지만, 표정만큼은 완벽한 새신부의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했다. 그녀는 이준의 곁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그의 탄탄한 팔에 자연스럽게 팔짱을 꼈다. 닿아오는 이준의 감청색 수트 자락에서 서늘한 겨울 숲의 향이 풍겼다.
“어머님께서 참 세심하시네요. 최 집사님도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예, 마님. 방은 안내해 드린 대로 서쪽 안방과 동쪽 서재실 옆 침실로 분리하여... 아, 제 말은, 도련님의 개인 업무 공간과 마님식 서재를 고려해 가구를 배치해 두었습니다.”
최 집사는 두 사람의 반응을 살피듯 일부러 ‘방의 분리’를 언급하며 말을 흐렸다. 신혼부부가 첫날밤부터 각방을 쓰는지 확인하려는 명백한 유도 심문이었다.
이준이 채원의 허리를 자연스럽게 감싸 안으며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채원이가 밤늦게까지 은성의 재무 장부를 분석해야 해서 내가 배려한 겁니다. 최 집사, 불필요한 동선에 신경 쓰지 말고 웰컴 티나 서재로 준비해 주지.”
“...알겠습니다, 도련님.”
최 집사가 고개를 조아린 뒤 주방 구역으로 사라지자,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팔을 풀고 세 걸음 이상 거리를 벌렸다. 방금 전까지 흐르던 다정한 온기는 단 1초 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방은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습니다.”
이준이 거실의 대리석 기둥에 기대어 서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눈빛은 다시 가면을 쓴 것처럼 감정이 배제되어 있었다.
“하지만 저 늙은 여우의 눈을 속이려면 거실과 서재에서는 완벽한 부부여야 합니다. 최 집사는 내 어머니의 눈과 귀입니다. 우리가 각방을 쓰거나 계약서 조항을 나눈 흔적을 단 한 톨이라도 찾아내는 순간, 강서현 이사장은 이 결혼이 쇼윈도라는 것을 공론화하고 은성의 지분을 압류할 겁니다.”
“알고 있어요.”
채원은 자신의 스마트 워치 ‘아우라-V’를 가볍게 매만지며 주머니 속에서 작은 카드 형태의 장비를 꺼냈다. 사설 보안업체 대표 남궁혁이 스위스에서 극비리에 수입해 전달해 준 휴대용 도청 탐지기 ‘가디언-S’였다.
“최 집사가 우리 침실 문 앞을 서성이는 건 시간문제예요. 그전에 이 거실과 서재가 안전한지부터 확인해야겠어요.”
채원은 가디언-S의 측면 전원 스위치를 올렸다. 손바닥만 한 카드형 기기에서 미세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주파수를 탐지하는 LED 액정에 파란색 불빛이 깜빡였다.
그녀는 차분하게 구두 소리를 죽이며 넓은 거실의 대리석 바닥을 밟아 나갔다. 이준은 그 모습을 묵묵히 시선으로 쫓으며, 그녀의 빈틈없는 움직임에 묘한 경외감을 느꼈다.
째깍, 째깍, 째깍.
채원의 주머니 속 부친의 낡은 포켓 워치가 나직하게 작동하는 소리 사이로, 가디언-S의 진동이 갑자기 거칠어졌다. 거실 모퉁이에 놓인 거대한 수입 도자기 화분 뒤쪽으로 기기를 가져가자, 파란색 불빛이 순식간에 경고의 적색으로 반전되었다.
“여기 하나.”
채원이 화분 안쪽 흙 속에 교묘하게 묻혀 있던 초소형 전파 송수신기를 발견하고 이준을 올려다보았다. 이준은 미동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떼어내지 마십시오. 신호가 끊기면 최 집사가 즉각 눈치채고 다른 곳에 더 정교한 장비를 심을 겁니다. 위치만 파악하고 역정보를 흘리는 도구로 쓰죠.”
“합리적인 판단이네요.”
채원은 적색으로 변한 탐지기를 들고 이번에는 거실 소파 밑과 천장의 디자이너 조명 기구 틈새를 샅샅이 수색했다. 소파 등받이 가죽 틈새에서 두 번째 도청 장치가 감지되었다. 펜트하우스 전체가 강서현이 쳐놓은 촘촘한 거미줄과 다름없었다.
“이제 서재실 차례예요.”
채원은 무거운 마음을 안고 서재실의 이중 목재 문을 열었다. 서재는 벽면 전체가 어두운 오크나무 책장으로 채워져 있었고, 중앙에는 거대한 마호가니 책상이 위엄 있게 놓여 있었다.
채원은 책상 주변으로 걸어가 가디언-S를 밀착시켰다. 책상 서랍 밑바닥을 훑어 내리던 순간, 기기가 손바닥이 아플 정도로 강렬하게 진동했다. 화면의 적색 표시등이 미친 듯이 점멸했다.
“서재 책상 밑... 아주 활성화된 고성능 도청 장치예요.”
채원이 허리를 숙여 책상 밑바닥을 들여다보며 도청기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려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이 차가운 금속성 송수신기에 닿으려던 바로 그 찰나였다.
달컥.
고요한 서재실의 정적을 깨고, 이중 문이 예고 없이 열리는 기계음이 들렸다.
“도련님, 마님. 따뜻한 웰컴 티를 준비해 왔습니다.”
최 집사였다. 노크 소리도 없이 문을 열어젖힌 그녀의 손에는 은빛 쟁반 위에 올려진 뜨거운 찻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최 집사의 매서운 눈빛이 책상 밑에 어정쩡한 자세로 숙이고 있는 채원의 실루엣을 향해 칼날처럼 내리꽂혔다.
채원의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도청 탐지기를 쥔 손끝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 자세에서 손을 빼는 순간, 최 집사에게 도청기 수색 현장을 그대로 들키게 될 터였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 이준의 몸이 바람처럼 움직였다.
“내가 펜을 떨어뜨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채원 씨.”
이준은 단호하면서도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며, 책상 밑의 채원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는 거침없는 동작으로 채원의 허리를 끌어당겨 마호가니 책상 위로 가볍게 밀쳐내듯 올렸다.
“앗...”
채원이 짧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이준의 거대한 체구가 그녀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이준은 채원의 얇은 허리를 두 손으로 단단히 감싸 안으며, 자신의 넓은 등과 어깨로 책상 아랫부분과 채원의 손에 들린 탐지기를 완벽하게 가로막았다.
완벽한 백허그 구도였다.
밀착된 이준의 가슴팍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열기와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이 채원의 등에 그대로 전달되었다. 그의 목덜미에서 풍기는 차가운 민트 향과 살결의 온기가 채원의 모든 신경을 마비시킬 듯이 밀려들었다.
“어머, 실례했습니다.”
최 집사의 목소리에 당혹감과 의심의 기색이 미세하게 섞여 들었다. 그녀는 찻잔을 든 채 두 사람의 밀착된 자세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이준은 채원의 뺨 옆으로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귓가에 닿을 듯 입술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채원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웰컴 티는 저기 테이블 위에 두고 나가 주지, 최 집사. 아내가 피곤해해서 말이야.”
이준의 목소리는 평소의 차가움을 지우고, 아내를 극진히 아끼는 다정한 남편의 그것으로 완벽하게 위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채원의 허리를 쥔 그의 손가락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절대 움직이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채원은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간신히 참아내며, 이준의 어깨에 자신의 두 손을 살포시 올렸다. 그리고 최 집사가 들으라는 듯, 조금 콧소리가 섞인 나른하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쳐서 그래요, 이준 씨... 조금만 이러고 있게 해줘요.”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이준의 단단한 어깨 수트 자락을 움켜쥐었다. 이준의 심박수가 순간적으로 폭등하는 것이 채원의 등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것은 단순한 연기를 넘어선, 예상치 못한 신체적 접촉이 가져온 내면적 동요의 증거였다.
최 집사는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끈적하고 내밀한 공기에 압도당한 듯,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방해해 드려 죄송합니다. 차는 두고 갈 테니 편히 쉬십시오.”
조용히 문이 닫히고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두 사람은 단 1밀리미터도 움직이지 못했다. 서재실 안에는 오직 폭등한 두 사람의 숨소리와 째깍거리는 부친의 포켓 워치 소리만이 어지럽게 뒤엉켜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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