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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윈도의 첫 공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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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구청의 무거운 유리문을 열고 나서는 두 사람의 발걸음 뒤로, 여의도의 차가운 아침 공기가 밀려들었다. 가을의 초입에 접어든 바람은 살을 비집고 들어올 만큼 서늘했다.


한채원은 걸음을 멈추고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손을 꺼냈다. 손끝에는 여전히 부친의 유품인 은빛 포켓 워치가 닿아 있었다. 째깍, 째깍, 째깍. 시계의 아날로그적인 작동 소리가 그녀의 심장 박동과 맞물려 미세한 진동을 만들어냈다. 채원은 차분하게 심호흡을 하며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옆에 서 있는 강이준은 완벽하게 재단된 감청색 쓰리피스 수트 차림으로, 여전히 조각 같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오른쪽 팔은 다친 곳 하나 없이 매끄러웠고, 가죽 장갑을 낀 손은 주머니에 깊숙이 찔러 넣어져 있었다. 어젯밤 남산 하얏트 스위트룸에서 그녀의 귓가에 차가운 경고를 속삭이던 비정한 남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대외적으로는 그저 품격 있는 신랑의 가면을 쓰고 있을 뿐이었다.


“법적 신고는 끝났습니다.”


이준이 나지막한 저음으로 말했다. 그의 시선은 채원이 아닌, 저 멀리 여의도 금융가의 빌딩 숲을 향해 있었다.


“이제 약속대로 시장에 패를 보여줄 차례군.”


채원은 자신의 스마트폰을 켰다. 오전 9시 정각. 주식 시장의 개장과 동시에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DART)의 화면이 새로고침되었다. 찰나의 정적을 깨고, 은성섬유의 공시 창에 붉은색 글씨가 선명하게 떠올랐.


[최대주주 등의 소유주식 변동 신고서: 한채원 외 특별관계자 1인(강이준) 지분 공동 보유 공시]


‘특별관계자 지분 공동 공시 규정’에 따른 전격적인 특별관계자 등록이었다. 채원의 지분 24%와 이준이 사적으로 지배하는 우호 지분 15%가 합산되어 총 39%의 지배 블록이 형성되었음이 시장에 투명하게 선포된 순간이었다.


그 공시가 화면에 뜨는 것과 동시에, 주식 시장은 말 그대로 폭발했다.


은성섬유의 거래 창에 파란색 하한가 경고등이 켜져 있던 주가 그래프가 기적처럼 수직으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대왕저축은행의 기습적인 대출금 상환 독촉과 부도설로 패닉에 빠졌던 소액 주주들이 미친 듯이 매수 주문을 쏟아냈다. 태신그룹의 유력 후계자인 강이준이 은성섬유의 최대주주와 혼인하여 특별관계자로 묶였다는 사실은, 시장에 ‘태신그룹이 은성을 공식 비호한다’는 가장 강력한 보증 수표로 해석되었다.


하한가에서 시작했던 주가는 5분 만에 보합세를 뚫고 올라가더니, 이내 상한가인 30% 폭등을 가리키며 빨간색 숫자로 화면을 온통 물들였다.


“지수 반전이 아주 빠르군요.”


채원은 화면을 끄며 이준을 올려다보았다. 이준은 주가 창을 보지도 않은 채, 그저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장은 숫자에 가장 먼저 반응하는 짐승이니까. 하지만 진짜 싸움은 주식 호가창이 아니라 은성섬유 이사회실 내부에서 일어날 겁니다. 한태수가 순순히 물러설 위인은 아니지.”


“알고 있습니다. 내 손으로 그 자리를 빼앗아 올 겁니다.”


채원의 눈빛이 가시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두 사람은 대기하고 있던 이준의 전속 기사 오창훈이 문을 열어준 의전 차량에 탑승했다. 여의도로 향하는 차 안에서 두 사람은 철저한 침묵을 유지했다. 한 지붕 아래 살게 되었으나, 아직 침실조차 공유하지 않는 차가운 계약 관계. 이준은 창밖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고, 그의 침묵 속에는 채원이 알지 못하는 기묘한 부채감과 슬픔의 잔상이 서려 있었다.


***


여의도 은성섬유 본사 빌딩 12층 이사회실.


육중한 강철문 너머로 사내 임원들의 고함과 웅성거림이 복도까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태수 상무는 이사회 테이블의 상석 근처에 서서 포마드로 번들거리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이사들을 선동하고 있었다.


“여러분! 지금 속으시면 안 됩니다! 한채원이 태신그룹 후계자와 혼인신고를 했다는 공시는 사기극에 불과합니다! 경험도 없고 나이 어린 계집애가 회사를 살리겠답시고 대기업 가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구걸한 쇼윈도 찌라시란 말입니다! 대왕저축은행의 상환 압박이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마당에, 이런 불안정한 상속녀에게 임시 대표이사 자리를 넘겨줄 수는 없습니다!”


한태수의 화려한 명품 넥타이가 그의 탐욕스러운 몸짓에 따라 요란하게 흔들렸다. 사내 원로 임원들은 그의 기세와 대왕저축은행의 압박이라는 현실적인 공포에 질려 동조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사회의 분위기는 급격하게 한태수 측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때, 이사회실의 굳게 닫힌 철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비서 임서현의 보좌를 받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한채원의 모습에 장내가 순식간에 정적으로 가라앉았다. 채원은 깔끔하게 떨어지는 차가운 그레이 톤의 오피스 수트를 입고 있었고, 단정하게 묶은 로우 포니테일 아래로 차갑고 지적인 눈빛이 번뜩였다. 그녀의 뒤로는 강직한 성품의 사외이사 정우석 교수가 묵묵히 뒤를 따르고 있었다.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숙부님.”


채원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으나, 대회의실 전체를 얼어붙게 만들 만큼 단호한 힘이 실려 있었다. 그녀는 한태수의 맞은편 테이블 끝에 당당히 섰다.


“사기극이라니요. 금융감독원에 공식 공시된 주주 변동 신고서의 법적 무게를 숙부님께서는 가볍게 여기시는 모양입니다.”


한태수가 코방귀를 끼며 서류 뭉치를 탁자에 던졌다.


“한채원! 네가 대기업 도련님 품에 안겨 혼인신고서 한 장 받아왔다고 해서 이 회사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것 같으냐? 대왕저축은행의 300억 대출 만기가 당장 내일이다! 당장 내일 부도가 날 위기인데, 고작 주가 좀 올랐다고 대표이사 자리를 넘겨달라고 떼를 써? 이사회 임원들은 바보가 아니다!”


그의 폭언에 정우석 사외이사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엄숙한 목소리로 개입했다.


“한태수 상무, 언행을 삼가시오. 주식 시장에서 은성섬유의 주가가 공시 직후 하한가에서 상한가로 반전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오. 시장의 투심이 회복되었다는 것은 대외적인 신인도가 정상화되었다는 뜻인데, 이를 사기극이라 폄하하는 것은 이사회의 결정을 모독하는 행위요.”


“정 교수님! 학자 분이시라 금융의 생리를 모르시나 본데, 주가는 거품에 불과합니다! 당장 내일 저축은행이 담보권을 실행해서 원주 공장 부지를 강제 매각하면 주가는 다시 휴지조각이 됩니다!”


한태수가 기세등등하게 소리치며 사내 원로 이사들을 둘러보았다. 이사들의 눈빛에 다시 공포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채원은 그 모습을 조용히 응시하다가, 입가에 아주 미세하고 서늘한 미소를 띠었다. 그녀는 가방에서 빳빳하게 인쇄된 태신그룹의 인감이 날인된 서류 실물을 꺼내 이사회 테이블 중앙으로 슬라이드하듯 밀어 던졌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대왕저축은행의 불법 담보 대출금 300억 원은 오늘 오전 9시를 기해 태신 측의 자금으로 대위변제 처리되어 담보권 실행이 공식 취소되었습니다. 법원 집행관들 역시 원주 공장에서 철수했음을 방금 공장장에게 확인했습니다.”


서류의 첫 장에는 태신그룹이 대왕저축은행에 송금한 300억 원의 대위변제 증서와 압류 해제 통지서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이사회실 내부가 일시에 경악으로 물들었다. 한태수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며 서류를 허겁지겁 집어 들었다.


“이, 이게 무슨... 말도 안 돼! 태신이 왜 은성의 빚을 대신 갚아준단 말이냐!”


“내가 강이준 상무의 법적 배우자가 되었으니까요.”


채원은 한태수를 향해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녀의 구두굽이 대리석 바닥을 짓누르며 맑고 예리한 파열음을 냈다.


“그리고 여기, 강이준 상무가 내게 위임한 ‘태신그룹 우호 지분 의결권 위임장’ 실물입니다. 이로써 제 우호 의결권은 총 39%에 달합니다. 숙부님과 대왕저축은행이 연합해 확보하려 했던 지분율을 압도적으로 상회하는 수치지요.”


테이블 위에 떨어진 붉은색 직인이 찍힌 위임장을 보며, 한태수 파벌의 임원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채원의 눈길을 피하기 시작했다. 세력 판도가 완전히 뒤집혔음을 직감한 것이다.


하지만 한태수는 마지막 발악을 하듯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


“이건 무효야! 가짜 결혼으로 시장을 기만하고 사내 경영권을 탈취하려는 음모다! 내 지분과 우호 주주들의 표를 합치면 여전히 내가 이사회 과반을 차지할 수 있어! 얘들아, 동요하지 마라! 이 계집애의 임시 대표 취임안은 부결시켜야 한다!”


채원은 폭언을 퍼붓는 한태수를 향해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내어 탁자 위에 올린 뒤, 나지막하고 서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숙부님, ‘재무제표 이면 분석술’이라는 것을 들어보셨습니까?”


한태수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채원은 송민호 CFO에게 전수받은 정밀 회계 분석 자료를 한 장 더 꺼내 들었다.


“은성섬유의 지난 3년간의 대차대조표 뒤에 숨겨진 가공 거래 내역입니다. 숙부님께서 홍콩에 설립하신 유령 회사 ‘H&M 글로벌’의 계좌로 흘러 들어간 은성의 공금 50억 원의 종착지가 이 장부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더군요. 대왕저축은행과의 사기 대출을 공모하는 대가로 강승준 사장에게 받은 스위스 차명 계좌 카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채원은 숫자로 가득 찬 페이지의 특정 라인을 손가락 끝으로 짚었다.


“여기 적힌 유령 거래의 송금 일련번호와 숙부님의 개인 인감 사용 대장이 완벽히 일치합니다. 제가 지금 이 자리에서 이 자료를 금융감독원과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사부에 제출하면, 숙부님은 임시 대표 취임안 표결이 아니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 및 횡령 혐의로 긴급 체포되실 겁니다. 이사회의 원로 임원분들께서도 횡령 범죄자와 공범으로 엮이고 싶지는 않으시겠지요?”


채원의 날카로운 폭로와 구체적인 수치 타격 앞에 이사회실은 무서운 침묵에 휩싸였다. 한태수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려 그의 포마드 헤어를 적셨다. 한태수 파벌의 이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숙이고 침묵을 선택했다.


정우석 사외이사가 침묵을 깨고 엄숙하게 선언했다.


“더 이상의 논쟁은 무의미한 것 같군요. 은성섬유 임시 대표이사 취임안에 대한 표결을 진행하겠습니다.”


결과는 압도적이었다. 한태수를 제외한 사내 원로 임원들과 중립파 이사 전원이 찬성 표를 던졌다.


“표결 결과, 한채원 주주의 은성섬유 임시 대표이사 취임안이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의사봉이 탁탁 세 번 두드려지는 소리와 함께, 채원은 마침내 아버지가 잃어버렸던 은성의 경영 지휘권을 합법적으로 거머쥐었다. 은성섬유 임시 대표이사라는 가시 돋친 왕관이 그녀의 머리 위에 씌워진 순간이었다.


한태수는 주먹을 꽉 쥔 채 부르르 떨다가, 채원을 향해 비열한 눈빛을 쏘아붙이며 이사회실을 폭풍처럼 빠져나갔. 채원은 그 뒷모습을 냉정하게 바라보며, 사내에서 ‘숙부를 단숨에 난도질해 축출한 독한 핏줄’이라는 비정한 평판을 얻게 되었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회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녀는 기꺼이 괴물이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


이사회 직후, 채원은 은성섬유 본사 12층의 대표이사실로 들어섰.


창밖으로 보이는 여의도의 마천루들이 회색빛 하늘 아래 웅장하게 서 있었다. 채원은 아버지가 생전에 사용하던 낡은 가죽 의자에 천천히 앉았다. 주머니에서 꺼낸 부친의 포켓 워치를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가 텅 빈 집무실을 채웠다. 아버지가 일구어낸 정직한 기업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공간이었다.


채원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책상 서랍들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태수가 자리를 비우며 미처 챙기지 못한 서류 더미와 낡은 파일들이 가득했다.


서랍의 가장 깊숙한 안쪽, 이중 잠금장치가 되어 있는 비밀 서랍이 눈에 띄었다. 채원은 송민호 CFO에게 받은 회장실 비밀 번호를 입력해 서랍의 잠금을 해제했다.


덜컥하는 소리와 함께 열린 서랍 속에는 부친 한진우 회장의 사망 당일 일정이 적힌 낡은 수첩과 개인 기록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채원은 경건한 마음으로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기록들을 한 장씩 넘겼다.


수첩의 가장 뒷장, 두꺼운 마분지 사이에 접혀 있는 낡은 종이 한 장이 툭 떨어졌다.


채원은 종이를 집어 들어 펼쳤다. 그것은 복사된 처방전 사본이었다.


종이의 상단에는 ‘태신 메디컬 센터 VVIP 병동’이라는 로고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처방전의 날짜는 아버지가 의문의 심장마비로 사망했던 바로 그날 밤이었다. 처방된 약물의 명칭을 확인하던 채원의 눈동자가 비정상적으로 크게 흔들렸다.


‘포타슘 클로라이드(Potassium Chloride) 초고농도 주사액.’


의학 지식이 없는 일반인이라도 알 수 있는, 인위적인 심정지를 유발하여 부검 시에도 단순 심장마비로 위장할 수 있는 치명적인 특수 약물이었다. 그리고 처방전 하단의 소견란에는 부친 한진우 회장의 이름과 함께, 처방을 지시한 담당 주치의의 날인이 찍혀 있었다.


처방전 사본의 구석에는 아버지가 사망 직전 다급하게 휘갈겨 쓴 친필 메모가 적혀 있었다.


[강서현이 주치의를 매수했다. 내 심장이 멈추면, 그것은 타살이다.]


채원의 심장이 짓눌리는 듯한 극심한 고통과 함께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했다. 단순 심장마비로 종결되었던 아버지가 타살당했다는 명백한 증거, 그리고 그 배후에 시댁인 태신그룹의 실세 강서현 이사장이 있다는 지독한 진실이 처음으로 그 흉측한 대가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채원은 처방전 사본을 쥔 채 손을 부르르 떨었다. 분노와 절망, 그리고 지독한 배신감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그렇다면 남편인 강이준은 이 사실을 어디까지 알고 있었던 것일까. 속죄를 위해 계약 결혼을 수락했다던 그의 침묵 이면에는, 이 거대하고 잔혹한 가문의 살인죄가 숨겨져 있었던 것일까.


집무실의 차가운 정적 속에서, 부친의 포켓 워치만이 무심하게 째깍거리며 다가올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의 서막을 알리고 있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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