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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조의 족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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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하얏트 호텔 펜트하우스 스위트 3001호의 공기는 단숨에 얼어붙었다. 유리창을 때리는 폭우 소리마저 진공 상태에 갇힌 것처럼 멀어졌다.


테이블 위에 무겁게 내려앉은 은빛 포켓 워치는 차가운 조명 아래서 비정상적일 만큼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째깍, 째깍, 째깍. 시계 태엽이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가 두 사람의 숨소리를 대신해 밀실의 침묵을 채웠다.


강이준은 손가락 끝에 힘을 준 채 찢어지다 만 제안서를 쥐고 있었다. 그의 서늘한 눈동자가 한채원의 얼굴을 뚫어질 듯 응시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포커페이스. 태신그룹의 가장 냉혹한 후계자라는 명성에 걸맞게, 그의 심박수는 여전히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채원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채원은 아주 미세하게 떨리는 이준의 검지 끝, 그리고 그의 동공이 포켓 워치에 닿는 순간 아주 찰나 동안 흔들렸던 빛을 포착했다.


‘인간 거짓말 탐지기.’


어린 시절부터 위선과 거짓으로 가득 찬 재벌가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본능적으로 체화한 채원의 감각이 경고음을 울리고 있었다. 강이준은 지금 동요하고 있다. 분노가 아니다. 그것은 지독한 부채감, 그리고 깊이 감춰둔 속죄의 감정이었다.


“...내 아버지를 기억하시는군요.”


채원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스위트룸의 허공을 갈랐다. 그녀는 주머니에 찔러 넣었던 손을 천천히 빼내어 테이블 모서리를 짚었다.


“강서현 이사장이 우리 은성섬유를 어떻게 약탈하려 했는지, 그리고 내 아버지가 사망하던 그 비극적인 밤에 당신이 왜 여의도 그 음침한 골목에 서 있었는지. 당신은 전부 알고 있어.”


이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소파에서 일어나는 그의 움직임은 기품이 흘렀으나, 동시에 가시 돋친 짐승처럼 방어적이었다. 그는 찢어지다 만 제안서를 테이블 위에 툭 던져놓았다. 찢어진 종이 틈새로 은성섬유의 지분 숫자가 위태롭게 드러났다.


“과거는 비즈니스의 고려 대상이 아닙니다, 한채원 씨.”


이준의 목소리는 다시 얼음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완벽한 ‘무감정 제어술’이었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단 한 톨도 내보이지 않겠다는 듯 완벽한 포커페이스의 가면을 고쳐 썼다.


“하지만 당신의 유용성은 인정하지. 강승준 사장이 은성을 먹고 후계 구도의 무게추를 가져가는 것은 나 역시 용납할 수 없으니까.”


이준은 곁에 묵묵히 서 있던 민우진 변호사를 향해 가볍게 턱짓을 했다. 우진은 기다렸다는 듯 안경을 치켜올리며 자신의 가죽 서류 가방에서 빳빳한 서류 한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3년 기한 쇼윈도 정략결혼 계약서 원본입니다.”


우진의 목소리는 기계적이고 명료했다.


“한채원 대표이사 대리와 강이준 상무의 법적 혼인 관계를 3년간 유지하며, 대외적으로는 완벽한 부부임을 연기합니다. 계약 체결 즉시 강이준 상무는 자신이 사적으로 지배하는 태신 계열사 및 우호 펀드의 ‘태신그룹 우호 지분 의결권 위임장’을 한채원 씨에게 공식 인도합니다. 또한, 대왕저축은행에 묶여 있는 은성섬유 원주 공장 부지의 담보 대출금 300억 원은 태신 측의 자금으로 즉시 대위변제 처리되어 경매는 취소됩니다.”


완벽한 조건이었다. 이틀 뒤면 공중분해될 은성섬유의 심장을 단숨에 살려낼 수 있는, 오직 강이준만이 행할 수 있는 구원책이었다.


채원은 서류를 집어 들려 했다. 그러나 이준의 차가운 손가락이 서류의 상단을 지그시 내리눌렀다. 채원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도장을 찍기 전에, 추가할 조항이 있다.”


이준의 눈빛이 칼날처럼 예리하게 빛났다. 그가 펜을 들어 계약서의 공란에 날카로운 필체로 한 줄의 문장을 써 내려갔다.


[제7조: 계약 당사자 간의 사적인 감정 교류는 일절 금지하며, 이를 어길 시 계약은 즉시 무효가 되고 양도된 지분 및 의결권은 전량 회수한다.]


가장 가혹하고 비정한 족쇄였다.


“쇼윈도 부부의 탄생을 위한 계약이다. 이 관계에 사적인 감정이 개입되는 순간, 비즈니스는 망가지지. 당신이 나를 향해 어떤 원망을 품고 있든, 혹은 그 반대의 감정이 싹트든 상관없어. 이 선을 넘는 순간, 당신은 은성섬유를 완전히 잃게 될 거다.”


이준은 채원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는 채원에게 경고하는 동시에, 스스로에게 단단한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있었다. 가문의 죄악으로 인해 평생을 짊어져 온 부채감. 이 영리하고 독한 여자의 눈빛을 마주할 때마다 흔들리는 자신의 내면을 완벽히 통제하기 위한 족쇄였다.


채원은 제7조의 문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붉은색 인감도장이 찍힐 자리에 적힌 ‘감정 교류 금지’라는 단어가 가시처럼 가슴을 찔렀다. 하지만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감정 따위의 사치스러운 불순물이 아니었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몬 진짜 배후를 밝혀내고 회사를 지키는 것, 오직 그것만이 그녀의 유일한 드라이브였다.


“합리적인 조항이군요.”


채원이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그러나 그녀는 서류를 그냥 넘기지 않았다. 그녀는 펜을 쥐고 제7조의 하단에 추가 문장을 덧붙였다.


“하지만 ‘감정 교류’라는 기준은 지나치게 모호합니다. 대외적인 쇼윈도 연기를 위해 대중 앞에서는 다정한 부부인 척 손을 잡고 미소를 지어야 하니까요. 조항을 더 명확히 하죠.”


채원의 날카로운 펜촉이 종이 위를 거침없이 긁어내렸다.


[단, 공식 행사를 제외한 사적 공간에서의 신체적 접촉은 일절 금지한다.]


이준의 눈썹이 가볍게 꿈틀했다. 채원은 펜을 내려놓으며 이준을 도발하듯 바라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한남동 펜트하우스에서 공동 생활을 영위하되, 서로의 침실 구역을 완벽히 분리합니다. 상대방의 사적 공간에 동의 없이 발을 들이는 것 역시 계약 위반으로 규정하죠. 동의하십니까, 강이준 씨?”


이준은 채원의 당돌한 역제안을 묵묵히 응시했다. 그녀는 일방적으로 구원받는 나약한 상속녀가 아니었다. 자신을 향해 가시를 세운 채, 철저하게 동등한 비즈니스 파트너로서의 경계선을 긋고 있었다.


“좋아. 각방 생활 규정을 공식 추가하지.”


이준의 포커페이스 뒤로 묘한 경외감이 스쳐 지나갔다.


민우진 변호사가 조용히 인감도장과 붉은 인주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한 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서명란에 도장을 찍었다. 쿵, 쿵. 무거운 마찰음과 함께 붉은 낙인이 찍히는 순간, 3년 기한의 위험하고 치명적인 쇼윈도 결혼 계약이 마침내 완성되었다.


“서명이 완료되었습니다.”


우진이 계약서 원본을 수거해 자신의 암호화 가방에 넣었다. 동시에 그의 태블릿 화면에서 실시간 자금 이체 프로세스가 구동되었다. 이준이 가볍게 손가락을 움직이자, 대왕저축은행의 특수 계좌로 300억 원의 자금이 전격 송금되었다.


삐리릭.


채원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원주 방적공장의 강태식 공장장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채원이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로 격앙된 목소리가 흘러나왔.


- 대표님! 방금 법원 집행관들이 철수했습니다! 경매가 극적으로 취소되었다고 합니다! 공장 부지가... 우리 공장이 살았습니다!


채원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손끝이 가볍게 떨렸지만, 그녀는 즉시 평정을 되찾았다. 첫 번째 위기는 넘겼다. 이준의 막강한 자본력이 은성섬유의 심장을 멈추기 직전에 구해낸 것이다.


“수고하셨습니다, 공장장님. 현장 노동자들을 안심시키고 공장 가동 준비를 시작해 주십시오.”


전화를 끊은 채원은 테이블 위의 포켓 워치를 다시 거두어 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그녀는 파산 위기의 몰락한 상속녀가 아니었다. 대한민국 최고 재벌 태신그룹의 둘째 며느리이자, 쇼윈도 태신가 며느리라는 화려하고 위태로운 가면을 쓴 전쟁터의 전사였다.


민우진 변호사가 정중히 인사를 건넨 뒤 스위트룸을 빠져나갔다. 육중한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3001호에는 다시 단둘만의 정적이 찾아왔.


창밖의 폭우는 더욱 거세어져 유리창을 깨뜨릴 듯이 두드려댔다. 어두운 조명 아래, 채원은 서류 가방을 챙겨 일어서려 했다.


그 순간, 소파에서 일어난 이준이 천천히 그녀의 앞을 가로막아섰다. 그의 큰 체구가 드리운 그림자가 채원의 시야를 완전히 덮어버렸다. 이준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두 사람의 거리는 단 한 뼘도 되지 않았다. 채원은 숨을 들이켜며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려 했으나, 이준의 단단한 손길이 그녀의 손목을 가볍게 잡아 세웠.


차가운 가죽 장갑의 감촉이 살결에 닿는 순간, 소름 끼치는 텐션이 두 사람 사이에 흘렀. 이준은 고개를 숙여 채원의 귀밑머리 근처로 다가왔다. 그의 차가운 숨결이 채원의 귓가에 닿았다.


“잊지 마십시오, 한채원 씨.”


그의 나지막한 저음이 귓가를 긁어내렸다.


“이 결혼에 진짜는 없습니다. 내 침실 문을 넘지 마십시오.”


이준은 잡았던 손목을 서늘하게 놓아주며, 한 치의 미련도 없이 어둠 속으로 몸을 돌렸다. 채원은 붉게 달아오른 손목을 쥐고 그의 등 뒤를 노려보았다. 가시 돋친 왕관을 머리에 쓴 두 사람의 위험한 동거가, 이 빗속에서 비장하게 막을 올리고 있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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