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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연기 속의 방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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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의 넓은 어깨 너머로 쇠파이프를 쥔 용역들이 서서히 거리를 좁혀오기 시작했다.


지하 보일러실을 가득 메운 매캐한 타르 연기가 허파를 찌르듯 밀려들었다. 천장에 매달린 낡은 형광등이 치지직 소리를 내며 위태롭게 깜빡일 때마다, 한태수의 번들거리는 포마드 헤어와 용역들의 살기 어린 눈빛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포기해라, 채원아.”


한태수가 쇠파이프를 바닥에 쓸며 한 걸음 내디뎠다. 거친 시멘트 바닥과 철붙이가 부딪히며 소름 끼치는 파열음이 지하 기계실에 울려 퍼졌다.


“그 잘난 나노 섬유 특허 설계도만 넘기면 너도, 저 태신가의 도련님도 무사히 나갈 수 있어. 형님이 평생을 바쳐 만든 기술이라지만, 죽은 사람은 말이 없는 법이지.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니?”


채원은 가슴에 안은 가죽 가방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가방 안쪽, 실린더에 담긴 ‘유리 가시 나노 섬유 특허 설계도 원본’의 묵직한 감촉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은성의 심장. 이것을 빼앗기는 순간, 아버지가 남긴 모든 유산과 은성섬유의 미래는 한태수와 태신건설 강승준의 손아귀에 떨어져 공중분해될 것이었다.


불안감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순간, 채원은 버릇처럼 오피스 수트 주머니 속에 넣어둔 부친의 태엽식 클래식 포켓 워치를 꽉 쥐었다. 차가운 금속의 질감이 손바닥에 닿자 마법처럼 이성이 돌아왔다. 째깍, 째깍. 시계의 아날로그적인 초침 소리가 매캐한 연기 속에서도 선명하게 뇌리를 깨웠다.


“숙부님.”


채원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오히려 얼음 송곳처럼 차갑고 단단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금 하시는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정말 모르시는 겁니까? 공장에 방화를 사주하고, 임시 대표이사인 저를 지하에 가두고 무력으로 협박하는 것. 이 모든 것이 단순한 사내 권력다툼으로 끝날 거라 생각하셨다면 오산입니다. 특수방화교사 및 불법 감금 혐의는 합의조차 불가능한 중범죄입니다.”


“하! 법? 경찰?”


한태수가 광기 어린 비웃음을 터뜨렸다.


“여기서 너희 둘이 연기에 질식해 죽는다면, 그건 그저 안타까운 화재 사고일 뿐이다. 증거는 이 불길과 연기가 전부 쓸어갈 테니까! 얘들아, 시간 없다. 당장 저 기집애 가방 빼앗아!”


한태수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덩치 큰 용역 둘이 쇠파이프를 치켜들며 채원을 향해 돌진했다.


“물러서십시오, 대표님!”


그 순간, 보일러실 입구 어둠 속에서 묵직한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채원의 전속 경호원, 박성태였다. 그는 단부진 체구를 짓누르는 연기 속에서도 한 치의 흔들림 없는 안광을 빛내며 선두로 달려들던 용역의 손목을 정확히 낚아챘다.


성태의 손끝에 힘이 들어가자 용역의 관절이 꺾이며 비명이 터졌다. 성태는 낚아챈 용역의 몸을 방패 삼아 다른 용역의 복부를 강하게 걷어찼다. 절제되고 군더더기 없는 실전 무술이었다.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거구의 사내들이 시멘트 바닥으로 쓰러졌다.


“성태 씨!”


채원이 외쳤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보일러실 입구 너머에서 더 많은 용역들이 쇠파이프와 각목을 든 채 밀려들고 있었다. 성태 혼자서 이 좁은 밀실에서 다수를 상대하는 것은 물리적인 한계가 명확했다. 스마트폰을 확인하려 했으나 여전히 신호는 완전히 차단된 상태였다.


“비켜.”


한태수가 직접 쇠파이프를 쥐고 채원의 앞을 가로막은 이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준은 젖은 코트를 벗어던진 셔츠 차림으로, 날카롭게 날이 선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한태수의 공격을 우아하게 피했다. 이준은 언제나 감정을 비즈니스의 불순물로 여기며 철저한 손익을 계산하는 남자였다. 무기를 든 다수와의 육탄전은 그에게 극도로 불리한 거래였다. 하지만 그의 차가운 눈동자는 오직 이준의 등 뒤에 서 있는 채원의 안전만을 조준하고 있었다.


“태신그룹의 후계자가 이런 진흙탕 싸움에 뼈를 묻고 싶진 않겠지, 강이준 상무!”


한태수가 쇠파이프를 거칠게 휘둘렀다. 윙 하는 바람 소리가 이준의 턱끝을 스쳤다. 이준은 한태수의 손목을 잡아채며 뒤로 꺾었으나, 그 순간 한태수의 배후에서 다른 용역 하나가 채원의 무방비한 등 뒤로 우회해 접근하는 것이 이준의 시야에 포착되었다.


사내의 손에 들린 날카로운 파이프 끝이 매캐한 붉은 연기 속에서 번뜩였다. 사내는 가방을 빼앗기 위해 채원의 머리 위로 사정없이 둔기를 내리치려 했다.


“채원 씨!”


그 순간, 이준의 뇌리에서 모든 계산이 정지했다.


손익 평가는 물론, 자신의 안위나 후계자로서의 명예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것은 이성적인 판단이 아닌, 영혼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온 본능적인 도약이었다.


이준은 한태수를 밀쳐냄과 동시에 몸을 던져 채원을 자신의 넓은 품으로 감싸 안았다.


퍽!


둔탁하고 무거운 타격음이 지하 보일러실의 소음을 뚫고 채원의 귓가를 때렸다.


“윽...!”


이준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의 거대한 몸이 채원의 위로 무겁게 무너지며 그녀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채원은 이준의 품에 안긴 채, 그의 넓은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이준 씨...?”


채원이 다급하게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이준의 완벽하던 포커페이스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의 하얀 드레스 셔츠 오른쪽 소매가 순식간에 붉은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용역이 휘두른 날카로운 철붙이가 이준의 오른쪽 팔을 그대로 관통하며 지체 인대를 찢어발긴 것이었다.


붉은 피가 채원의 단정한 그레이 톤 오피스 수트 재킷 위로 뚝뚝 떨어져 번져 나갔다. 회색빛 천 위로 피어나는 선명한 혈흔을 보며 채원의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공포가 엄습했다.


“상무님!”


박성태 경호원이 분노 서린 외침과 함께 이준을 공격한 용역의 목덜미를 잡아 바닥에 메쳤다. 하지만 한태수는 이준이 쓰러진 틈을 타 채원의 가방을 강제로 빼앗으려 손을 뻗었다.


“이리 내! 그 설계도만 있으면...!”


치익—!


그 순간, 보일러실 입구에서 자욱한 백색 분말이 폭풍처럼 들이쳤다.


“이 도둑놈의 자식들아! 우리 대표님한테서 떨어져!”


공장장 강태식의 분노에 찬 목소리였다. 강태식과 분노한 공장 노동자들이 소화기를 난사하며 보일러실 내부로 진입했다. 하얀 소화기 분말이 붉은 연기와 엉키며 시야를 완전히 차단했다. 노동자들은 스패너와 파이프 렌치를 휘두르며 한태수의 용역들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수적인 우세가 순식간에 뒤집힌 것이었다.


“커헉! 젠장, 퇴각해! 일단 나가야 한다!”


하얀 가루 속에서 기침을 뱉어내던 한태수가 전세가 역전되었음을 직감하고 용역들을 이끌고 보일러실 출구 쪽으로 급히 도주하기 시작했다. 허겁지겁 도망치던 한태수의 코트 주머니에서 무언가 툭 떨어져 바닥에 뒹굴었다.


채원은 기침을 마시면서도 바닥에 떨어진 종이 쪼가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한태수가 용역들을 고용할 때 작성한 사설 경호업체 계약 조항의 일부가 적힌 기밀 서류였다. 채원은 신속하게 그 종이를 주워 자신의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대표님! 무사하십니까!”


강태식 공장장이 소화기를 내려놓고 채원의 앞으로 달려왔다.


“저는 괜찮아요. 하지만 이준 씨가... 성태 씨, 당장 이준 씨를 부축해요! 차로 이동해야 합니다!”


채원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이성이 흔들리는 균열이 일어났다. 그녀는 자신의 수트를 적시는 이준의 피가 너무나도 뜨겁게 느껴져 손끝이 벌벌 떨렸다.


박성태 경호원이 신속하게 이준의 왼쪽 어깨를 부축했다. 이준은 오른쪽 팔을 늘어뜨린 채, 입술을 짓깨물며 신음을 참아냈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호위를 받으며 화재의 연기를 뚫고 마침내 공장 밖으로 탈출한 그들을 맞이한 것은, 여전히 대지를 사정없이 두들기는 장대비였다.


성태는 이준을 뒷좌석에 조심스럽게 태웠고, 채원은 설계도 가방을 품에 안은 채 그의 옆에 탑승했다. 성태가 운전석에 올라타 시동을 걸자, 메르세데스 의전 차량은 빗길을 찢으며 여의도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차창을 때리는 빗소리가 거세게 차 안을 메웠다. 어두운 뒷좌석에서 채원은 다급하게 가방을 열어 손수건과 여분의 천을 꺼내 이준의 오른쪽 팔 상처를 압박했다. 천이 닿을 때마다 이준의 단단한 몸이 미세하게 들썩였다.


“이준 씨, 조금만 참아요. 서울에 도착하는 대로 사설 병원으로...”


채원의 떨리는 손길 위로, 갑자기 차갑고 단단한 손이 덮여왔다.


이준의 왼손이었다. 그는 다치지 않은 왼손으로 채원의 손을 꽉 쥐었다. 땀과 빗물로 젖은 그의 손가락에서 전해지는 묵직한 악력에 채원은 숨을 멈췄다.


이준은 고통으로 초점을 잃어가는 눈동자로 채원을 응시했다. 그의 입술은 이미 하얗게 질려 있었지만, 그가 뱉어낸 첫마디는 자신의 부상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설계도는... 무사합니까?”


그 질문이 차 안의 빗소리를 뚫고 채원의 심장 가장 깊은 곳을 찔렀다.


자신을 향한 의심의 칼날을 거두지 않던 가짜 아내. 언제 자신을 배신할지 모른다며 날카로운 유리 가시를 세우던 그녀를 위해 목숨을 던진 남자가, 가장 먼저 묻는 것이 은성의 미래였다.


채원은 이준이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손을 꼭 쥐며 설계도의 안전을 먼저 묻는 모습에,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지독한 감정의 파동을 느꼈다. 째깍거리는 포켓 워치의 소리가 빗소리와 섞여 들려오는 어둠 속에서, 채원은 대답 대신 그의 손을 더 세게 맞잡았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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