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의 붉은 불길
폭우가 여의도 유리창을 깨부술 듯이 두들기던 그 밤, 서울에서 원주로 향하는 도로는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와이퍼가 비명을 지르며 빗물을 쓸어내렸지만, 앞창 너머로 보이는 것은 오직 붉게 물든 먼 하늘의 불길한 잔상뿐이었다.
“속도 더 올려요, 성태 씨.”
조수석에 앉은 한채원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으나, 안전벨트를 쥔 그녀의 손끝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뒷좌석에 조용히 앉아 있던 강이준은 그런 그녀의 옆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차창 밖에서 흘러내리는 빗물과 차 안의 어두운 조명이 그의 조각 같은 얼굴 위로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의 다친 팔은 아직 아무런 상처 없이 깨끗했지만, 그의 가슴속에는 채원이 알지 못하는 묵직한 죄책감과 경계심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원주 공장의 화재는 단순한 사고가 아닙니다.”
이준이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침묵을 깨뜨렸다.
“한태수가 장혜숙 회장과의 공급망 계약 소식을 듣고 폭주한 겁니다. 신제품 원사 재고를 태워 은성의 숨통을 끊으려는 마지막 발악이겠지.”
채원은 대답 대신 주머니 속의 낡은 포켓 워치를 꺼내 쥐었다. 아버지가 남긴 유품. 그녀는 불안할 때마다 태엽을 감는 버릇이 있었다. 태엽을 시계 방향으로 세 번 감자, 째깍거리는 아날로그 소리가 차 안의 무거운 공기를 갈랐다. 손가락 끝으로 시계 뒷면의 미세한 톱니바퀴 안쪽을 더듬던 그녀는, 일전에 발견했던 미세한 각인 숫자를 머릿속으로 다시 한번 되뇌었다.
‘7-4-1-0-9-2.’
아버지가 숨겨둔 마지막 유산의 비밀번호이자, 오늘 밤 그녀가 목숨을 걸고 찾아야 할 은성의 심장이었다.
차가 마침내 원주 방적공장 정문에 들어섰을 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야말로 지옥도였다. 거대한 자재 창고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불길이 폭우마저 집어삼킬 듯이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와 공장 노동자들의 비명이 뒤엉켜 사방이 아수라장이었다.
“대표님! 오시면 안 됩니다!”
얼굴에 검은 그을음을 묻힌 공장장 강태식이 달려와 차 문을 열었다.
“한태수 상무가 고용한 사설 용역 놈들이 원사 창고에 불을 지르고 도주하려던 걸 저희 노동자들이 가로막았습니다! 지금 공장 정문 뒤편에서 대치 중입니다!”
“태식 씨, 원사 재고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요.”
채원은 차에서 내리며 빗속으로 발을 디뎠다. 차가운 빗방울이 그녀의 그레이 톤 오피스 수트를 순식간에 적셨지만, 그녀의 눈빛은 불길보다 더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지하 보일러실 뒤편의 방공호로 가야 해요. 거기에 아버지가 숨겨둔 진짜 설계도가 있어요.”
이준이 우산을 펼쳐 그녀의 머리 위를 가렸지만, 불어닥치는 바람에 우산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이준은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채원의 손목을 꽉 잡았다.
“내가 같이 갑니다. 한태수의 용역들이 아직 공장 내부에 깔려 있어요.”
채원은 이준의 손길에서 느껴지는 묘한 온기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지만, 이내 냉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그를 의심할 시간조차 부족했다.
두 사람은 박성태 경호원과 강태식 공장장의 호위를 받으며, 자욱한 연기가 가득한 공장 본동 지하로 뛰어내려갔다. 지하는 이미 화재의 열기로 후끈거렸고, 천장에서는 녹아내린 배관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으나 액정 화면에는 ‘서비스 지역이 아닙니다’라는 차가운 경고만 뜰 뿐이었다. 외부와의 연락은 완전히 두절된 상태였다.
“성태 씨, 여기서부터는 저희 둘이 가야 해요. 송민호 CFO님이 알려준 은밀한 통로는 오직 은성의 피를 이은 자만이 열 수 있으니까요. 한태수의 용역들이 지하로 내려오지 못하게 입구를 지켜주세요.”
채원의 지시에 박성태 경호원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보일러실 입구의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채원과 이준은 매캐한 연기를 마시며 지하 보일러실의 가장 깊숙한 안쪽으로 들어갔다. 거대한 보일러 탱크 뒤편, 낡은 콘크리트 벽면에 이끼와 먼지로 가려진 묵직한 철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제강점기 시절 방공호로 쓰이던, 공장 도면에도 표시되지 않은 은밀한 공간이었다.
“이 문 뒤에 비밀 벽금고가 있어요.”
채원은 떨리는 손으로 아버지가 남긴 포켓 워치를 꺼내 들었다. 시계 뒷면의 톱니바퀴 안쪽, 미세하게 새겨진 6자리 숫자 ‘741092’를 철문에 장착된 구형 다이얼 패널에 차례로 입력했다.
철컥.
육중한 기계음과 함께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열리며, 차가운 정적이 흐르는 지하 방공호의 내부가 드러났다. 안에는 먼지 쌓인 책상과 함께 은빛으로 빛나는 이중 벽금고가 서 있었다. 채원은 송민호 CFO에게 인계받았던 ‘은성섬유 회장실 비밀 금고 마스터 키’를 금고 패널에 접촉하고 마지막 암호를 입력했다.
윙 하는 소리와 함께 금고가 열리며, 그 안에서 다이아몬드급 강도를 지닌 혁신 원단의 핵심 설계도, ‘유리 가시 나노 섬유 특허 설계도 원본’이 든 실린더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천억 원의 가치를 지닌, 은성의 진짜 심장이 마침내 채원의 손에 쥐어지는 순간이었다.
“찾았어요, 이준 씨.”
채원이 실린더를 품에 안고 이준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려던 찰나, 지하 방공호 입구 쪽에서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윽!”
박성태 경호원의 목소리였다. 이내 보일러실의 낡은 형광등이 깜빡거리며, 어둠 속에서 포마드 헤어를 번들거리는 한태수가 사설 용역들을 대동하고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는 묵직한 쇠파이프가 들려 있었고, 그의 뒤를 따르는 용역들의 눈빛은 살기로 가득 차 있었다.
“결국 여기에 숨겨져 있었군, 조카야.”
한태수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쇠파이프를 손바닥에 탁탁 두들겼다.
“그 특허 설계도만 태신건설의 강승준 사장에게 넘기면, 난 은성 따위 없어도 평생을 보장받는다. 순순히 그 가방을 넘겨라. 그렇지 않으면 이 깊은 지하 구덩이가 너희 둘의 무덤이 될 테니까.”
자욱한 화재 연기 속에서 한태수가 쇠파이프를 든 용역들을 앞세워 채원의 목을 죄어오는 순간, 이준이 젖은 코트를 벗어던지며 채원의 앞을 가로막아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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