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 돋친 구원
째깍, 째깍, 째깍.
어둠이 짙게 내린 남산 하얏트 펜트하우스 스위트 3001호의 거실에는 기묘할 정도로 정교한 기계음만이 흐르고 있었다. 통유리창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서울의 야경은 쏟아지는 폭우에 가로막혀 마치 물감처럼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한채원은 꼿꼿하게 서 있었다. 물기 하나 없는 차가운 그레이 톤의 오피스 수트, 단정하게 묶어 내린 로우 포니테일 아래로 드러난 옆선은 얼음으로 조각한 듯 미동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오른손 끝은 재킷 주머니 속에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부친 한진우 회장이 남긴 유일한 유품, 낡은 태엽식 클래식 포켓 워치의 용두를 감는 소리였다. 거칠게 요동치는 심장박동을 감추기 위해 채원은 시계의 태엽을 끝까지 감아올렸다. 금속 톱니바퀴들이 맞물리는 서늘한 감각이 손가락을 타고 올라와 흐려지던 이성을 단단하게 옭아맸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태신그룹의 유력한 후계자이자, 업계에서 가장 냉혈한 사냥개로 불리는 사내, 강이준. 그는 이탈리아제 가죽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여 채원을 응시하고 있었다. 단 한 가닥의 흐트러짐도 없는 포마드 헤어와 칼날처럼 예리하게 재단된 쓰리피스 수트. 그의 눈빛은 빗방울이 부딪히는 유리창보다 더 차갑고 서늘했다. 그의 곁에는 태신그룹 법무팀의 에이스이자 그의 유일한 최측근인 민우진 변호사가 서류 가방을 든 채 묵묵히 배석해 있었다.
“파산 위기에 몰린 은성섬유의 상속녀가 이 밤중에 남의 사적 공간까지 침입한 이유치고는.”
이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낮고 묵직한 저음이 대리석 바닥을 타고 낮게 깔렸다. 그 목소리에는 어떠한 감정도, 호기심도 섞여 있지 않았다. 오직 비즈니스 테이블 위의 물건을 평가하는 냉혹한 분석관의 태도뿐이었다.
“제안서가 너무 얇군, 한채원 씨.”
채원은 주머니에서 손을 빼내어 테이블 앞으로 걸어갔다. 구두굽이 대리석에 부딪히며 날카로운 파열음을 냈다. 그녀는 들고 있던 가죽 파일에서 두 장의 서류를 꺼내 이준의 앞에 내려놓았다. 은성섬유 자사주 24% 지분 명세서와 원주 방적공장 부지의 감정 평가서였다.
“3년입니다.”
채원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오히려 물기를 머금은 밤공기처럼 차분하고 단단했다.
“그 기간 동안 나와 가짜 결혼을 맺어주십시오. 대가로 은성섬유 자사주 24%에 대한 의결권을 당신에게 무상으로 위임하겠습니다. 태신그룹 내부의 지분 전쟁에서 당신의 어머니, 강서현 이사장을 방어할 확실한 우군이 필요하시지 않습니까?”
이준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냉소적인 미소였다. 그는 테이블 위의 서류를 손끝으로 툭 밀쳐냈다.
“은성은 이미 죽은 시체다. 당신의 숙부인 한태수가 대왕저축은행과 공모해서 원주 방적공장 부지를 불법 담보로 잡고 강제 경매를 신청했지. 집행 기한은 단 이틀. 이틀 뒤면 공중분해되어 경매 시장에 헐값으로 던져질 회사의 지분이 내게 무슨 가치가 있지? 난 쓰레기를 수집하는 취미는 없다만.”
“그 경매가 불법이니까요.”
채원은 물러서지 않고 다음 서류를 들이밀었다. 그것은 그녀가 밤을 새워 재무제표의 이면을 분석해 찾아낸 ‘한태수 명의의 불법 이중 대출 계약서’ 사본이었다.
“숙부 한태수가 대왕저축은행과 체결한 이중 계약서입니다. 그리고 이 사기 대출의 자금줄을 막후에서 지원한 유령회사의 소유주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태신그룹 계열사인 태신건설, 즉 당신의 이복형 강승준 사장입니다. 숙부는 은성섬유를 헐값에 강탈해 태신에 바치는 대가로 사익을 챙기려 한 겁니다.”
이준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수축했다. 그의 곁에 서 있던 민우진 변호사의 안경 너머 눈빛 역시 예리하게 빛났다. 그러나 이준은 완벽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차갑게 대꾸했다.
“내 이복형의 탐욕스러운 뒤거래가 나와 무슨 상관이지? 은성이 무너지면 태신건설이 먹든, 대왕저축은행이 가질러 가든 내 알 바 아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채원은 상체를 가볍게 숙여 이준과의 거리를 좁혔다. 그녀의 눈빛에 가시 돋친 투지가 서렸다.
“강승준 사장이 은성섬유의 원주 공장을 손에 넣는 순간, 그 부지는 태신건설의 핵심 자산으로 둔갑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의 어머니인 강서현 이사장은 후계 구도의 무게추를 당신이 아닌 강승준에게로 완전히 옮기겠죠. 당신이 평생을 바쳐 지켜온 후계자 자리가 단 이틀 뒤면 날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이게 당신과 상관없는 일입니까?”
정적이 방 안을 지배했다. 빗소리마저 차단된 듯한 적막 속에서, 이준은 말없이 채원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깊고 어두워 그 안의 생각을 단 한 톨도 읽어낼 수 없었다. 이준은 천천히 손을 뻗어 채원이 내민 제안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반으로 접어 찢어버리려는 듯 손끝에 힘을 주었다.
“제안은 거절하지. 난 내 후계 구도를 지키기 위해 파산 직전의 가문과 엮이는 악수를 두지 않는다.”
찌지직, 종이가 미세하게 찢어지는 소리가 고요를 깨뜨렸다. 채원의 심장이 내려앉았지만, 그녀는 마지막 패를 꺼내 들었다. 주머니 속에서 움켜쥐고 있던 부친의 클래식 포켓 워치를 꺼내 이준의 눈앞에 쾅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은빛 시계 케이스가 조명을 받아 차갑게 반짝였다.
“찢어봐요, 어디 한번.”
채원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과거 내 아버지가 태신가에게 당했던 약탈, 그리고 아버지가 사망하던 당일 밤... 당신이 우리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진짜 이유. 당신이 평생 어머니의 꼭두각시로 살며 품어온 그 지독한 죄책감의 실체를, 내가 모를 줄 알았습니까?”
이준의 손가락이 멈췄다. 종이를 찢으려던 그의 손끝이 허공에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의 완벽하던 포커페이스 균열 사이로, 평생을 숨겨온 어둡고 거친 감정의 잔상이 날것 그대로 드러났다.
이준은 찢어지다 만 제안서를 쥔 채, 천천히 고개를 들어 채원을 바라보았다. 그의 서늘한 눈동자 깊은 곳에서 거대한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채원은 낡은 포켓 워치를 손으로 꽉 쥐며 그 서늘한 폭풍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가시 돋친 왕관을 머리에 쓴 두 사람의 잔혹한 전쟁이, 마침내 이 밀실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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