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의 시작과 뒤바뀐 관계
사공환의 뼈 지팡이 끝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충격파가 만년빙굴의 천장을 직격하자, 거대한 얼음 기둥들이 일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궁!
귓전을 때리는 굉음과 함께 집채만 한 얼음 덩어리들이 사방으로 쏟아져 내렸다. 동굴 입구에서 피를 흘리며 버티던 바투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야수 광화의 기운이 꺼져가는 그의 거구 위로 날카로운 얼음 송곳들이 무자비하게 낙하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바투!”
백서진이 이를 악물며 신형을 날렸다. 첫 번째 혈맹 공생 의식을 마친 서진의 전신에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맑고 강력한 마력이 솟구치고 있었다. 가슴뼈에 박힌 용골 심장 제어기는 상급 빙정석의 기운과 융합되어 황금빛으로 부드럽게 고동쳤고, 왼손 약지에 새겨진 신룡의 혈맹 반지는 붉고 푸른 안개를 내뿜으며 그의 혈맥을 완벽하게 동기화시키고 있었다.
서진은 순간적으로 다리 근육을 강화하는 용화 보법을 전개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바투의 덜미를 낚아챈 서진은 무너져 내리는 얼음 잔해 속을 미끄러지듯 빠져나왔다. 그 뒤를 이어 설하린이 부러지지 않은 한설검을 휘두르며 낙석들을 가차 없이 베어 넘겼다. 서리 서린 검기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거대한 바위들이 얼어붙어 산산조각이 났다.
“여기서 무너지면 모두 끝이다! 달려라!”
서진의 외침과 함께 일행은 붕괴하는 만년빙굴의 입구를 간발의 차로 탈출했다. 등 뒤로 동굴 전체가 완전히 내려앉는 굉음이 울려 퍼졌고, 자폭을 시도했던 사공환은 붕괴하는 얼음더미 너머로 비명을 지르며 매몰되었다. 비록 그의 생사는 확인할 수 없었으나, 당장의 숨 막히는 추격에서는 벗어난 셈이었다.
동굴 밖은 여전히 혹독한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하지만 대기하고 있던 것은 차가운 살수들이 아니었다. 전나무 숲 어둠 속에서 거대한 여우 모피 코트를 걸친 사내가 횃불을 든 호위 무사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빙벽성의 거상, 독고성이었다.
“백 의원! 무사했구려! 어서 이 마차에 타시오!”
독고성이 다급하게 소리치며 철저하게 밀폐된 특수 마차의 문을 열었다. 서진은 심각한 자상과 동상을 입어 신음하는 바투를 마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하린 역시 서진의 손에 이끌려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눈보라를 뚫고 빙벽성의 삼엄한 감시망을 교묘하게 우회하여, 독고 상회가 극비리에 관리하는 은신처로 향했다.
***
빙벽성 요충지 한가운데 위치한 ‘독고 상회 북해 지점’의 비밀 아지트.
화려한 자개 장식과 두꺼운 비단 커튼으로 외부의 한기를 완벽하게 차단한 아늑한 침실 안에는 따뜻한 온기가 감돌고 있었다. 벽난로에서는 참나무 장작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올랐고, 고급스러운 침상 위에는 백서진이 상반신을 드러낸 채 누워 있었다.
서진은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가슴뼈 중앙에 이식된 용골 심장 제어기는 거칠게 증기를 내뿜던 이전과 달리, 차분하고 규칙적인 태엽 소리를 내며 째깍거리고 있었다. 만년빙굴에서의 혈맹 의식을 통해 하린의 극순수 한기가 심장에 주입된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의 왼손 약지에는 정교한 청룡과 서리꽃 무늬가 새겨진 신룡의 혈맹 반지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침실 구석의 어두운 그늘막 아래, 설하린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녀의 은백색 머리칼이 따뜻한 벽난로 불빛을 받아 붉으스름하게 빛났다. 겉으로는 평온하게 단전의 마력을 조율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녀의 청청색 눈동자는 한순간도 서진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서진이 몸을 뒤척이거나 미세한 신음을 흘릴 때마다, 그녀의 왼손 약지에 새겨진 반지 역시 맥박 치듯 붉은빛을 발했다.
‘이 느낌은 대체 뭐지……?’
하린은 자신의 가슴속에서 요동치는 낯선 감정에 당황하고 있었다.
공생 의식 이후, 그녀의 영혼은 백서진이라는 사내의 생사에 완벽하게 종속되어 있었다. 그가 고통받으면 그녀의 가슴도 찢어질 듯 아팠고, 그의 심장이 따뜻하게 뛰면 그녀의 단전 역시 안정을 찾았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생명력의 공유를 넘어선 무언가였다.
서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깊은 곳에서 맹목적인 소유욕과 집착이 끓어올랐다. 다른 누구에게도 이 사내를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오직 자신만의 안식처로 삼고 싶다는 살벌하고도 뜨거운 독점욕이 그녀의 이성을 잠식해 가고 있었다.
“하린 소저, 몸은 좀 괜찮습니까?”
서진이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며 부드럽게 물었다. 하린은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뺨에 살짝 붉은 기운이 돌았지만, 그녀는 이내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전의 마맥은 완전히 회복되었어요. 당신의 용혈 덕분에 체내의 누적된 한독도 깨끗이 사라졌고.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요. 당신이 죽으면 나도 죽기 때문에 곁에 있는 것뿐이니까.”
츤데레다운 쌀쌀맞은 말투였지만, 그녀의 시선은 서진의 드러난 어깨와 단단한 가슴팍에 고정되어 있었다. 서진은 허허 웃으며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녀의 속마음이 어떠하든, 자신을 사냥하려던 차가운 검사가 이제는 자신의 생명을 지탱해 주는 동반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기묘하면서도 따뜻하게 다가왔다.
그때, 침실의 두꺼운 목조 문이 가볍게 열리며 맑은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머, 환자분이 벌써 일어나 계셨네요?”
은쟁반에 온갖 희귀한 약초와 탕약 그릇을 받쳐 든 미녀가 안으로 들어섰다. 화려한 붉은 비단 옷에 금색 주판 모양의 장신구로 치장한 19세의 처자, 독고 상회의 소단주 독고린이었다.
독고린은 당차고 영리해 보이는 눈빛을 빛내며 서진을 향해 생긋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걸음걸이마다 은은하고 매혹적인 남방의 꽃향기가 침실 안으로 퍼져나갔다.
“아버님께서 백 의원님의 은혜를 갚기 위해 북해에서 가장 귀한 약재들만 모아오라 하셨거든요. 마침 제가 직접 달인 보양 탕약인데, 뜨거울 때 드셔보셔요.”
독고린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서진의 침상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그녀의 풍만하고 매혹적인 신형이 서진의 어깨에 닿을 듯 밀착했다. 붉은 비단 옷 사이로 드러난 가녀린 목덜미와 수려한 이목구비가 서진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의원님이 몸소 제 아버님을 살려주셨을 때부터 꼭 한번 뵙고 싶었어요. 소문보다 훨씬 수려하시고…… 풍기는 기운이 아주 신비롭네요.”
독고린은 영악한 상인 특유의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서진의 가슴팍 상처를 어루만지듯 다정하게 다가왔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서진의 쇄골을 가볍게 스쳤다.
그 순간.
서릉ㅡ.
침실 내부의 온도가 단 1초 만에 영하로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벽난로에서 활활 타오르던 장작불의 기세가 억눌리듯 잦아들었고, 독고린이 들고 있던 은쟁반의 탕약 표면에 얇은 얼음 막이 쩍쩍 소리를 내며 얼어붙었다.
침실 구석에 앉아 있던 설하린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의 전신에서 방출된 푸른 한기 투기가 바닥을 타고 뱀처럼 기어가, 독고린이 딛고 서 있는 침상 주변의 카펫을 순식간에 하얀 서리로 뒤덮어버렸다.
“……!”
독고린의 주판 장신구가 한기에 떨리며 짤랑거렸다. 그녀는 흥미롭다는 듯 눈꼬리를 치켜올리며 구석의 하린을 바라보았다.
설하린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서진의 침상 앞으로 걸어왔다. 그녀의 걸음걸이마다 바닥의 서리가 밟히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서진과 독고린의 사이에 끼어들듯 서서, 차가운 눈빛으로 서진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가 서진의 하얀 약사복이 구겨질 정도였다.
“백서진.”
하린의 목소리는 얼음송곳처럼 날카로웠다.
“환자라면 환자답게 얌전히 누워 있어라. 아무 여자나 주는 탕약을 함부로 받아먹다간 심장이 다시 터져버릴지도 모르니까.”
그녀의 시선은 서진의 어깨에 닿아 있는 독고린의 시선과 허공에서 격렬하게 충돌했다. 보이지 않는 불꽃과 얼음의 전쟁이었다.
바로 그 팽팽한 대치 속에서, 서진의 오른쪽 귀끝이 기이하게 뜨거워졌다. 독고린이 아지트에 도착하자마자 서진에게 ‘의학적 파동을 조율하는 서역의 물건’이라며 반장난으로 채워주었던 마법 도구, ‘질투 감지 귀걸이’가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딸랑, 딸랑ㅡ!
침실 안의 정적을 깨고, 서진의 귓가에서 요란하고 경쾌한 방울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린의 눈썹이 움찔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아, 그건…….”
서진이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하려 했으나, 독고린이 생긋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서역에서 온 유희용 마법 귀걸이랍니다. 주변 여인의 질투심이나 독점욕이 강해질수록 귀에 걸린 방울이 요란하게 울리는 신비한 장치지요. 설가 소저의 마음속이 아주 활활 불타오르고 있나 봐요?”
딸랑딸랑딸랑딸랑ㅡ!
독고린의 도발적인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귀걸이의 방울소리가 폭주하듯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하린의 얼굴이 순식간에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그녀는 수치심과 분노가 뒤섞인 얼굴로 서진의 옷깃을 더욱 세게 잡아당겼다.
“이딴 비열한 장난감으로 나를 모욕하다니……! 백서진, 당장 저 여자를 내보내라! 내 한기가 저 여자의 간사한 주판알을 모조리 얼려 부수기 전에!”
하린의 전신에서 폭발적인 푸른 한기 투기가 뿜어져 나왔다. 아지트의 고급 목조 탁자와 정교한 가재도구들이 서리를 맞고 쩍쩍 갈라지며 얼어붙기 시작했다. 아지트 전체가 얼음성으로 변할 것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서진은 당황하여 상황을 중재하려 입을 열었다.
“하린 소저, 진정하십시오. 독고 소주는 그저 약을 가져왔을 뿐…….”
딸랑딸랑딸랑! 딸랑!
말을 꺼낼 때마다 귀걸이의 경고음 소리가 귓전을 때려 서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지만, 그 순간 기이한 변화가 일어났다.
귀걸이의 요란한 마법 파동과 하린의 폭주하는 질투 한기 기류가 서진의 목덜미 낙인을 자극했다. 서진의 심장 제어기가 황금빛으로 회전하며, 하린의 한기 파동을 역으로 흡수해 전신으로 순환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고대 청룡의 권능 중 하나인 ‘투기 방출(鬪氣 放出)’의 패시브 메커니즘이었다. 하린이 질투와 소유욕을 품을수록, 서진의 심장은 그녀의 마력을 더욱 완벽하게 수용하여 그의 전신에 붉고 푸른 위압의 장벽을 두르고 물리적 힘을 강화했다.
서진은 전신에 가득 차는 강력한 마력의 힘을 느끼며, 하린의 질투가 단순한 성질머리가 아닌 혈맹 반지의 부작용이자 자신을 수호하려는 본능적인 공명 현상임을 간파했다.
서진은 조용히 손을 뻗어 자신의 옷자락을 쥔 하린의 작고 차가운 손을 꽉 움켜쥐었다.
따뜻한 용혈의 온기가 하린의 손가락 끝을 타고 흘러 들어갔다. 그 부드럽고 확고한 접촉에 하린의 전신이 감전된 듯 떨렸다. 요동치던 푸른 한기 투기가 서진의 따뜻한 손길 아래 거짓말처럼 스르륵 녹아내리며 가라앉았다.
“진정하십시오, 하린. 내 심장은 이미 당신의 한기와 반지로 묶여 있습니다. 다른 누구도 내 심장을 흔들 순 없습니다.”
서진의 나직하고 진심 어린 목소리에 하린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는 듯 은빛 머리칼을 흘러내렸지만, 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서진의 손을 놓지 않고 꽉 쥐고 있었다. 독고린에 대한 살벌한 경계심은 늦추지 않은 채였다.
독고린은 그 모습을 보며 주판 장신구를 만지작거리며 흥미로운 미소를 지었다.
“정말 눈물겨운 부부애네요. 하지만 백 의원님, 마냥 사랑 놀음만 하고 계실 때는 아닌 것 같답니다.”
독고린의 영리한 눈빛이 일순간 가라앉았다.
바로 그 순간, 침실의 문이 급하게 열리며 거상 독고성이 grim한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섰다.
“백 의원, 큰일났소! 내 사촌 형이자 경쟁 상단의 방주인 독고명이 당신들의 위치를 알아채고 설무진에게 밀고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되었소!”
독고성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은밀히 타오르던 아지트의 공기가 단숨에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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