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과 사의 경계, 첫 번째 공명
거궐혈(巨闕穴)에 깊숙이 박힌 백초의 은침을 타고 흐르는 용혈의 불꽃이, 사공환의 비열한 미소를 단숨에 집어삼킬 듯이 타올랐다.
“크, 끄아아악! 이, 이단 놈이 대체 무슨 짓을……!”
사공환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백서진의 심장 바로 앞까지 육박했던 그의 검붉은 독침들이 역류한 청룡의 폭발적인 열기에 닿자마자 쩍쩍 소리를 내며 재가 되어 바스러졌다. 용의 피가 지닌 초자연적인 거부 반응이 빙맥산의 검은 얼음을 순식간에 기화시키며 자욱한 붉은 수증기를 만들어냈다. 사공환은 꼽추 같은 체구를 뒤틀며 뒤로 서너 걸음 비틀거렸다. 그의 뼈 지팡이 끝자락이 서진의 열기에 그을려 검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바투! 하린을 안아라! 만년빙굴로 달린다!”
서진은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 속에서도 소리쳤다. 비록 은침 자학 침술로 일시적인 용혈 역류를 유도해 사공환의 치명타를 막아냈으나, 가슴뼈에 박힌 용골 심장 제어기는 이미 완전히 파손되어 붉은 증기를 폭발적으로 토해내고 있었다. 전신의 혈맥이 타들어 가는 고열로 인해 그의 안구에서는 다시금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대로 30분만 지나도 그의 육체는 스스로의 불꽃에 질식해 소멸할 터였다.
“알았다, 서진아! 으랴아아!”
동상으로 얼어붙었던 팔의 마비를 억지로 깨부순 바투가 대도를 휘두르며 기운을 짜냈다. 그는 쓰러져 있는 설하린의 한설검을 재빨리 주워 그녀의 허리춤에 채운 뒤, 가녀린 그녀의 신형을 한 팔로 단단히 안아 올렸다. 설하린은 이복오빠 설무진의 추악한 배신 서신을 손에 쥔 채, 혼이 나간 듯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평생을 가문의 인형으로 살아온 그녀에게 들이닥친 배신의 충격은 체내의 한독 폭주보다 더 치명적이었다.
“이 비천한 쥐새끼들이 감히 내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하느냐!”
사공환이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로 독안개 부채를 세차게 흔들었다. 초록색 사독의 장막이 다시금 그들의 퇴로를 가로막으려 솟구쳤다. 그러나 서진은 품속에 있는 ‘청룡의 라반’을 움켜쥐었다. 라반은 서진의 끓어오르는 용혈 마력을 흡수하며 격렬하게 바늘을 회전시켰다. 웅웅거리는 진동음과 함께 라반에서 피어오른 푸른 안개가 사공환의 독안개를 정면으로 밀어내며 북쪽의 험준한 절벽 틈새를 가리켰다.
“저기다! 저 동굴로 들어가야 해!”
서진은 바투의 부축을 받으며 눈밭을 딛고 달렸다. 뒤편에서 사공환의 사나운 고함과 함께 그가 부리는 살수들의 발소리가 눈보라를 뚫고 쫓아왔다. 휘몰아치는 폭설 속에서 서진 일행은 라반이 가리키는 유일한 생명의 길이자, 설산 가장 깊은 곳에 봉인된 금지구역인 ‘만년빙굴(萬年氷窟)’의 입구로 필사적인 도주를 감행했다.
***
쿠구구구궁!
거대한 얼음 기둥들이 천혜의 장벽처럼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만년빙굴 내부로 들어서자, 바깥의 눈보라 소리가 일순간 고요하게 잦아들었다. 사방이 영롱한 푸른빛을 발하는 거대한 만년설 얼음벽으로 둘러싸인 신비롭고 폐쇄적인 공간. 영하 80도에 달하는 절대 영도의 한기가 동굴 내부를 지배하고 있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허파가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였지만, 가슴속이 타들어 가던 서진에게는 이 살인적인 냉기가 오히려 생명의 안식처처럼 느껴졌다.
“하아, 하아…… 서진아, 적들이 입구까지 들이닥쳤다!”
바투가 하린을 동굴 안쪽의 부드러운 설원 위에 눕히며 소리쳤다. 동굴 입구 너머로 사공환의 사독 기운과 그를 따르는 설무진의 사설 살수 무리가 붉은 횃불을 밝히며 압박해 오는 것이 보였다. 동굴 입구의 고대 정령 결계가 그들의 진입을 일시적으로 막아세우고 있었으나, 사공환의 음한 마력이 결계를 부식시키는 소리가 쩍쩍 울려 퍼졌다.
“바투, 미안하지만 입구를 지켜줘. 하린의 한독과 내 용혈을 조율하지 못하면 우리는 여기서 전멸한다.”
서진이 피가 섞인 침을 뱉으며 말했다. 바투는 우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은빛 설표 무늬 귀가 팽팽하게 긴장했다.
“걱정 마라. 내 뼈가 가루가 되더라도 저 독쟁이 놈들이 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마. 야수 광화!”
바투의 전신에서 은빛 야성 기류가 폭발했다. 그는 거대한 대도를 움켜쥐고 동굴 입구의 좁은 길목을 쇠말뚝처럼 지키고 섰다. 곧이어 사공환의 부하들이 동굴 안으로 난입하기 시작했고, 바투의 거친 포효와 함께 처절한 혈투가 시작되었다. 쇠와 쇠가 부딪치고 피가 튀는 소리가 동굴 벽을 타고 메아리쳤다.
서진은 쓰러져 있는 설하린의 곁으로 기어갔다. 그녀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빙맥산 독안개에 공명해 폭주한 체내의 한독이 그녀의 단전을 완벽하게 얼려버렸고,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해져 있었다. 입술은 푸르게 변해 있었고, 미세하게 떨리는 숨결마저 하얀 서리가 되어 부스러졌다. 이대로 두면 그녀는 자신의 한기에 스스로 얼어 죽을 터였다.
‘의식을 치러야 한다. 오직 그것뿐이다.’
서진은 스승 오경선에게 배웠던 침술의 구결과 양부의 비책을 떠올렸다. 뜨거운 용의 심장과 차가운 설가의 한기를 하나로 묶어 서로의 폭주를 제어하는 ‘첫 번째 혈맹 공생 의식’. 하지만 상극의 기운이 날것 그대로 충돌하면 의식을 치르기도 전에 서로의 맥로가 폭사할 위험이 있었다. 강력한 중화제가 필요했다.
서진은 용안(龍眼)을 개안하여 동굴 내부의 마력 흐름을 샅샅이 훑었다. 영하 80도의 얼음벽 틈새, 천장에 매달린 거대한 고드름 끝에서 은은한 푸른빛을 발하는 물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만년빙수(萬年氷수)다!’
설산 깊은 곳의 순수한 정기가 녹아내린 극순수의 물이자, 상극의 마력 충돌을 방지해 주는 전설적인 중화제였다. 서진은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가 고드름 아래에 손을 뻗었다. 떨어지는 차가운 빙수 방울들을 손바닥에 조심스럽게 모았다. 얼음보다 차가운 물이 손바닥에 닿는 순간, 전신의 작열통이 미세하게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서진은 모아온 만년빙수를 설하린의 입술 사이로 조심스럽게 흘려 넣었다. 극순수의 차가움이 그녀의 목구멍을 타고 흐르자, 하린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멎으며 역류하던 단전의 기운이 일시적으로 완화되었다. 하린이 가늘게 눈을 뜨며 서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청청색 눈동자에는 배신감으로 인한 눈물과 죽음의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왜…… 나를 구하려 하는 거지? 나는 너를 죽이려 했던 적이다.”
하린의 목소리가 바르르 떨렸다.
서진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슴의 파손된 제어기에서는 여전히 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뜨거운 증기가 뿜어져 나와 하린의 뺨을 적시고 있었다.
“당신이 죽으면 나도 죽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설하린 소저, 당신은 가문의 인형으로 이용당하고 버려질 존재가 아닙니다. 살아서…… 당신의 어머니를 죽이고 당신을 배신한 가문의 추악한 자들에게 칼날을 겨누고 싶지 않습니까?”
서진의 진심 어린 목소리가 하린의 귓가를 두드렸다. 설무진의 배신 서신을 본 순간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던 가문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은 이미 분노와 슬픔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구하기 위해 피눈물을 흘리며 은침을 꽂아 넣은 이 창백한 사내의 눈빛에서, 그녀는 평생 느껴보지 못한 따뜻한 구원의 손길을 보았다.
동굴 입구에서는 바투의 비명과 함께 적들의 칼날이 바투의 살을 찢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이 없었다. 사공환의 사독 기운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가문의 금기를 깨십시오. 나와 피를 섞어 생명을 공유해야만 우리 둘 다 살 수 있습니다.”
하린은 서진의 창백하지만 굳건한 얼굴을 응시했다. 가문의 규칙에 따르면 외부인과 피를 섞는 신체 접촉은 삼족을 멸하는 대역죄이자 이단 낙인의 지름길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이단으로 몰아 죽이려 한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친오빠와 가문이었다. 그런 가문의 규칙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좋아.”
하린이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그녀는 떨리는 오른손을 뻗어 서진의 왼손을 꽉 맞잡았다.
두 사람의 손바닥이 맞닿는 순간, 찌릿한 마력의 전류가 흐르며 ‘접촉 조율(接觸 調律)’이 시작되었다. 서진의 단전에서 끓어오르던 뜨거운 용혈의 마력이 하린의 손바닥 맥로를 타고 흘러 들어갔고, 하린의 차가운 빙결 마력이 서진의 혈맥을 타고 심장으로 유입되었다. 상극의 두 기운이 만년빙수의 중화력을 매개로 삼아 서로의 맥박을 일치시키며 기적적인 동기화를 시작했다.
“으윽……!”
서진의 온몸에 뼈가 시리고 동시에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이중의 통증이 몰아쳤다. 하린 역시 전신을 관통하는 뜨거운 용의 열기에 신음하며 서진의 품으로 쓰러지듯 안겼다. 두 사람의 몸 주변으로 푸른 얼음 안개와 붉은 용혈의 아지랑이가 소용돌이치며, 동굴 천장의 고드름들을 은은한 빛으로 물들였다.
동굴 깊은 곳에 피어난 빙령화의 정령들이 두 사람의 순수한 생명 공명에 이끌려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정령들은 투명한 날개를 펄럭이며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눈부신 서리 가루를 뿌려 마력의 폭주를 부드럽게 정제해 주었다.
하린은 서진의 품에 안긴 채, 그의 목덜미에 새겨진 붉은 용의 낙인을 바라보았다. 그 낙인이 그녀의 심장을 향해 맹목적인 소유욕과 집착을 강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안에서 이 사내를 절대로 빼앗기지 않겠다는, 누구에게도 주지 않겠다는 살벌하고도 뜨거운 애정이 솟구쳐 올랐다.
“백서진…… 내 영혼을 당신에게 바치겠어. 그러니 내 심장을 식혀줘.”
하린은 서진의 목덜미를 두 팔로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두 눈을 감은 채, 서진의 붉은 입술을 향해 자신의 입술을 포개어 깊은 입맞춤을 나누었다.
두 사람의 타액과 피가 입술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서진의 뜨거운 용혈이 하린의 단전으로 흡수되었고, 하린의 극순수 한기가 서진의 심장 제어 장치를 타고 흘러 들어가 불타오르던 심장을 부드럽게 식혀주었다. 빙화 정체술의 극의가 두 사람의 완벽한 신체적, 영혼적 일체를 통해 비로소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그때, 동굴 천장의 고드름 끝에서 영롱한 만년빙수 한 방울이 낙하하여 두 사람의 맞잡은 손등 위로 툭 떨어졌다.
화아아아앗!
만년빙수가 닿은 순간, 서진의 가슴속 제어기가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완전히 부서졌던 톱니바퀴들이 새로운 신성의 마력을 얻어 규칙적으로 회전하기 시작했고, 두 사람의 왼손 약지 위로 푸른 한기와 붉은 전격이 뒤섞인 기적의 산물인 ‘신룡의 혈맹 반지’가 영구적인 낙인처럼 새겨지며 그들의 손가락을 단단히 옭아맸다.
그와 동시에, 동굴 입구에서 피를 흘리며 버티던 바투를 밀쳐내고 동굴 안쪽으로 난입한 사공환이 그 찬란한 황금빛 광경을 목격하고 경악하여 뼈 지팡이를 떨어뜨렸다.
“이, 이 기적의 기운은 대체……! 안 된다! 당장 저놈들의 결합을 끊어라!”
사공환이 이성을 잃고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모든 음한 사독 마력을 쥐어짜 동굴 천장을 무너뜨리려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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