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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毒手)의 침투와 우물의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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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전나무 숲을 붉게 물들였던 청룡의 열기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녹아내린 눈이 뜨거운 수증기가 되어 사방을 메웠고, 그 자욱한 안개 속에서 백서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뼈에 이식된 용골 심장 제어기는 완전히 파손되어 더 이상 째깍거리는 고동 소리를 내지 못했다. 제어 장치가 완파된 자리를 채운 것은 터질 듯이 이글거리는 용혈의 폭주하는 열기뿐이었다.


“서진아……!”


바투가 동상으로 하얗게 얼어붙은 팔을 덜덜 떨며 서진에게 다가왔다. 하린의 한기막 반동으로 입은 내상이 깊었지만, 바투는 자신보다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서진의 안색을 더 걱정하고 있었다. 서진의 눈가에는 붉은 피눈물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고, 목덜미의 용의 낙인은 금방이라도 살을 찢고 타오를 듯이 붉은 아지랑이를 피워내고 있었다.


설하린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 쥔 한설검의 서리 검날 끝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서진의 뜨거운 용혈 기운에 반응하여 검의 얼음이 미세하게 녹아내리는 기이한 현상이었다. 하린의 투명한 청청색 눈동자는 깊은 혼란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방금 전 서진이 폭로한 자신의 체질적 결함, 그리고 생모 설미혜가 남긴 한독(寒毒)의 진실이 그녀의 머릿속을 사정없이 헤집어놓은 탓이었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야 해. 가문의 추격대들이 이 열기를 감지하고 몰려올 거다.”


하린이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비록 서진을 생포하라는 가주의 명령을 받고 온 그녀였지만, 지금 당장 폭주해 자멸하려는 서진을 끌고 가기에는 상황이 너무나 위태로웠다. 무엇보다 그녀는 서진이 자신을 구해줄 유일한 열쇠일지도 모른다는 기묘한 경외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바투는 하린을 경계하면서도, 서진의 몸 상태가 한계에 달했음을 알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수증기 장막을 방패 삼아 숲속 깊은 곳으로 몸을 숨겼다. 얼마쯤 걸었을까, 전나무 숲 한구석에 우거진 덤불 사이로 자그마한 돌우물이 나타났다. 과거 약초꾼들이 험난한 설산을 오르내릴 때 목을 축이던 비밀 오아시스 같은 곳이었다.


“여기서 잠시 숨을 고르자.”


바투가 서진을 나무 밑동에 조심스럽게 앉히며 말했다. 서진의 이마는 불덩이처럼 뜨거웠고, 창백한 피부 아래로 흐르는 혈관들이 붉게 요동치고 있었다. 제어기가 망가진 심장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았다.


“물이…… 필요해.”


서진이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체내에서 폭주하는 용혈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선 차가운 수분이 절실했다. 바투가 서둘러 우물가로 다가가 두 손으로 맑은 물을 한 바가지 떠 왔다. 우물물은 만년설산의 기운을 머금은 듯 얼음처럼 차갑고 맑아 보였다.


“자, 서진아. 마셔라.”


서진은 바투가 건넨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리는 짜릿한 차가움이 일시적으로 체내의 열기를 식혀주는 듯했다. 그러나 물이 위장에 닿아 전신 혈맥으로 퍼져나가는 순간, 서진의 안색이 기괴하게 변했다.


“……!”


서진은 가슴을 움켜쥐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목구멍에서부터 얼어붙는 듯한 지독한 오한이 심장을 향해 역류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차가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혈맥을 따라 흐르는 피를 순식간에 검푸른 얼음 결정으로 바꾸어버리는 저주이자 치명적인 사독(邪毒)이었다.


“컥…… 우욱!”


서진의 입술 사이로 검붉은 피가 울컥 쏟아져 나왔다. 피는 눈밭에 닿자마자 서리처럼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전신 피부 아래로 검푸르게 죽어가는 혈관들이 괴물처럼 뒤틀리며 솟구쳤다. 가슴뼈에 박힌 용골 심장 제어기가 급격히 얼어붙으며 차가운 성에가 끼기 시작했다.


“서진아! 이게 무슨 일이냐!”


바투가 경악하며 서진의 어깨를 붙잡았으나, 서진의 몸은 이미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빙맥산(氷脈山)…… 독이다.”


서진이 이를 악물며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만독불침 수련의 기초를 다지며 온갖 독초를 연구했던 서진의 예리한 의학적 감각이 이 독의 정체를 즉시 알아차렸다. 용혈의 뜨거운 기운을 정면으로 겨냥해 심장을 순식간에 얼려버리는 잔혹한 빙결 사독. 누군가 고의로 이 우물에 빙맥산을 풀어둔 것이 분명했다.


“아윽……!”


그때, 뒤에 서 있던 설하린마저 가슴을 부여잡으며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우물물을 직접 마시지 않았음에도, 우물 주변에 퍼진 미세한 독안개를 들이마신 것만으로 체내의 한독이 폭발적으로 공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린의 단전에서 뿜어져 나온 차가운 한기가 통제력을 잃고 역류하여 그녀의 심장을 옭아맸다. 하린은 한설검을 바닥에 떨어뜨린 채, 전신을 부르르 떨며 쓰러졌다.


“크크크, 과연 소문대로군. 청룡의 피를 품은 놈이라 그런지, 일류 무인마저 단숨에 마비시키는 빙맥산을 마시고도 즉사하지 않다니.”


숲속의 짙은 수증기 너머로 음침하고 비열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개가 갈라지며 한 노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꼽추 체구에 초록색 독안개가 피어오르는 낡은 도포를 걸치고, 인간의 뼈로 만든 지팡이를 짚은 기괴한 몰골. 그의 손에는 정교하게 세공된 독약병과 독안개 부채가 들려 있었다. 설무진에게 고용된 사파 최고의 독술사, 사공환이었다.


“누구냐, 네놈은!”


바투가 분노하여 대도를 치켜들고 사공환을 향해 돌진하려 했다. 그러나 사공환이 가볍게 부채를 휘두르자, 숲속에 자욱하게 퍼져 있던 독안개가 폭발하듯 기류를 차단하며 바투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물러서라, 수인 놈아. 굳이 네놈의 비천한 피를 내 지팡이에 묻히고 싶진 않다.”


사공환이 뼈 지팡이로 대지를 가볍게 짚었다. 지면을 타고 흐르는 음한 마력이 바투의 발밑을 얼려버렸고, 바투는 가벼운 동상 내상과 독 기류의 압박에 밀려 뒤로 신음하며 물러섰다.


사공환은 쓰러진 설하린을 힐끗 바라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설하린 소저. 가문의 고결한 천재 검사께서 어찌 이런 비천한 이단 놈과 피를 섞으려 하시는지. 덕분에 설무진 도련님께서 아주 편하게 판을 짜셨지.”


“설…… 무진……?”


하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 이름을 읊조렸다.


“그래. 네 이복오빠이신 설무진 도련님께서 가문의 후계 자리를 확고히 하기 위해 내게 아주 후한 값을 치르셨단다. 네년의 그 거추장스러운 빙결 마력을 빼앗고, 이 용혈 놈의 심장을 적출해 가문의 공적으로 삼기 위해서 말이지. 자, 이것이 증거다.”


사공환이 소매 속에서 비단 서신 한 장을 꺼내 하린의 눈앞에 던졌다. 눈밭 위로 떨어진 서신에는 설무진의 개인 직인과 함께, 서진의 약국 위치와 하린의 이동 경로를 밀고하는 추악한 계약 내용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그것을 본 하린의 청청색 눈동자가 절망과 배신감으로 잘게 떨렸다. 평생을 가문의 대업과 아버지의 명령을 위해 얼음 인형처럼 살아왔건만, 돌아온 것은 가장 믿었던 혈육의 비열한 매장과 살수 고용이었다. 그녀가 가문에 품고 있던 맹목적인 신뢰와 충성심이 단숨에 산산조각 나며 심장 깊은 곳에서 균열이 일어났다.


“크크, 자매애니 가문의 명예니 하는 것들이 얼마나 덧없는가. 이제 이 청룡의 심장은 내 것이다.”


사공환이 서진을 향해 다가왔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독침들이 기괴하게 솟아올랐다. 서진을 생포하기 위해 준비한 ‘용혈 무력화 사슬’이 사공환의 도포 자락에서 뱀처럼 기어 나와 서진의 사지를 칭칭 감아쥐기 시작했다.


서진은 전신이 얼어붙는 지독한 마비 속에서도 머리를 굴렸다.


‘빙맥산은 용혈의 뜨거운 활성을 억제하기 위해 극저온의 음한 마력을 심장에 집중시키는 독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내 안의 뜨거운 피를 폭발적으로 역류시켜 이 독을 태워버려야 한다.’


그것은 자칫하면 심장을 완전히 파괴해 버릴 수도 있는 가혹하고 위험천만한 도박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심장이 얼어붙어 독침에 찔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서진은 마지막 남은 의지로 자신의 입술을 세차게 물어뜯었다. 왈칵 흘러나온 뜨거운 용혈의 피를 삼키지 않고 입안 가득 머금었다. ‘용혈 치유(龍血 治癒)’의 권능이 그의 침과 섞이며 기적적인 생명의 열기를 피워냈다.


그리고 오른손의 감각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서진은 품속에서 백초의 은침을 꺼내 들었다.


“이단 놈, 얌전히 심장을 내놓거라!”


사공환이 광소하며 독침을 서진의 심장 바로 위로 내리꽂으려던 바로 그 순간.


서진은 가슴뼈 중앙, 용골 심장 제어기 바로 위에 위치한 급소인 거궐혈(巨闕穴)을 향해 백초의 은침을 사정없이 깊숙이 찔러 넣었다.


푸하아앗!


서진의 입에서 뜨거운 용혈의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웅크리고 있던 청룡의 폭주하는 열기가, 빙맥산의 검은 얼음을 깨부수며 전신 혈맥을 타고 미친 듯이 역류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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