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나는 살의와 차가운 추격자
지독한 오한과 타오르는 열기가 동시에 뇌수를 헤집었다. 의식을 잃기 직전 보았던 은발의 여검사, 그리고 무너져 내리던 약방의 잔해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서진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낡은 낙엽송으로 짜인 허름한 천장이었다.
“스승님! 정신이 드셔요?”
옆에서 밤새 자리를 지킨 듯 핼쑥해진 얼굴의 동이가 울먹이며 서진의 손을 잡았다. 서진은 간신히 상체를 일으키려 했으나, 가슴팍에서 가해지는 벼락같은 통증에 다시 침상으로 쓰러졌다.
째깍, 째깍, 끼이이익…….
갈비뼈 아래 깊숙이 이식된 용골 심장 제어기가 비정상적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불쾌한 금속음과 함께, 제어기 틈새로 붉은 마력 증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크로거를 처단하기 위해 용혈을 강제로 각성한 대가였다. 전신의 혈관이 펄펄 끓는 용암으로 가득 찬 것처럼 뜨거웠고, 창백한 피부 위로 푸르스름한 용비늘의 흔적이 돋아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스승님을 무리하게 움직이게 하지 마라, 동이야. 지금 서진이의 심장은 스스로를 불태워 죽이려 하고 있으니까.”
오두막 구석에서 거대한 대도를 정비하던 거구의 사내가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은빛 설표 무늬의 귀와 꼬리를 지닌 수인족 의형제, 바투였다. 그는 크로거의 습격 당시 서진을 구하기 위해 온몸을 던졌던 유일한 아군이었다. 불타는 의원에서 쓰러진 서진을 둘러업고 이곳 ‘동이네 오두막’까지 눈보라를 뚫고 달린 이가 바로 그였다.
“바투…….”
“말하지 마라. 네 체온이 벌써 일반인의 범주를 넘었다. 이대로 두면 심장이 과열되어 혈맥이 통째로 녹아내릴 거다.”
바투의 말대로였다. 서진은 이를 악물고 떨리는 손으로 품속을 뒤적였다. 손가락 끝의 감각이 마비되어 가고 있었지만, 필사적으로 가죽 주머니에서 ‘백초의 은침’을 꺼내 들었다. 스스로의 마맥을 찔러 혈류를 강제로 지연시켜야만 살 수 있었다.
서진은 은침을 들어 명치 아래 거궐혈(巨闕穴)을 향해 찔러 넣으려 했다. 그러나 손끝이 심하게 떨려 침끝이 허공을 맴돌았다. 용혈 주기 발작의 오한과 열기가 교차하며 전신의 신경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오두막 외부를 감싸고 있던 매서운 눈보라 소리가 일순간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바람이 멈춘 것이 아니었다. 대기를 가득 채우던 눈보라의 기류가 거대한 무형의 압력에 짓눌려 강제로 박제된 것에 가까웠다. 오두막 내부의 온도가 급격하게 하강하기 시작했다. 통나무 벽 틈새로 푸르스름한 서리가 피어오르며, 딱딱 소리를 내며 얼어붙었다.
바투가 대도를 움켜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야성적인 눈동자가 경계로 가득 찼다.
“보통 놈들이 아니야. 이 살기 어린 한기는…… 북해 설가의 직계 무인이다.”
‘설가…….’
서진은 직감했다. 의원이 무너지기 직전 보았던 그 차가운 은발의 여검사가 기어코 자신을 찾아낸 것이다. 가주 설진천이 내린 ‘설진천의 생포 명령’이 국경 지대 전체에 떨어졌음이 틀림없었다. 고대 청룡의 이단 혈통을 손에 넣어 가문의 빙결 마력을 극대화하려는 냉혹한 가주의 집념이 여기까지 뻗쳐온 것이다.
쿠구구구궁!
오두막의 전방을 보호하고 있던 임시 결계막이 서리의 한기에 눌려 비명을 지르며 산산조각 났다. 쩍쩍 갈라지는 얼음 소리와 함께 오두막의 두꺼운 목조 문이 얼어붙은 채 안쪽으로 무참히 폭발해 들어왔다.
얼음 파편이 흩날리는 문턱 너머로, 만년설처럼 고결한 은백색 머리칼을 휘날리는 여인이 서 있었다.
투명한 청청색 눈동자에는 일말의 자비도 없었다. 차가운 가죽 검도포를 걸친 그녀의 손에는 서리 안개를 은은하게 내뿜는 가문의 명검, ‘한설검’이 쥐어져 있었다. 그녀가 발을 디딜 때마다 오두막 바닥이 하얗게 얼어붙었다. 일류 무인의 경지에 도달한 설하린의 압도적인 위압감이 좁은 오두막 내부를 지배했다.
“이단 용혈을 품은 마물. 가주의 명에 따라 네놈의 마맥을 봉인하고 생포하겠다.”
하린의 목소리는 얼음 계곡의 고요함만큼이나 차가웠다. 그녀의 시선이 침상에 쓰러져 붉은 증기를 뿜어내는 서진의 목덜미, 그곳에 새겨진 용의 낙인에 꽂혔다.
“우리 오라버니를 건드리게 둘 것 같으냐!”
바투가 대도를 휘두르며 정면으로 돌격했다. 수인족 특유의 폭발적인 근력과 야성적인 기백이 실린 참격이었다. 대도가 허공을 가르며 하린의 머리 위로 내리꽂혔다.
캉ㅡ!
그러나 하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한설검을 가볍게 비껴 세웠다. 검날과 대도가 부딪히는 순간, 맑은 쇠소리와 함께 엄청난 양의 서리 검기가 방출되었다. 바투의 거구는 하린이 가볍게 흘려보낸 한기 검막의 반동에 밀려 뒤로 서너 걸음 물러서야 했다. 대도를 쥔 그의 두 팔 위로 순식간에 하얀 서리가 얼어붙어 기동을 방해했다.
“비켜라, 수인족. 내 목표는 오직 저 이단뿐이다.”
하린은 한설검의 끝을 침상 위의 서진을 향해 겨누었다. 검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극순수의 한기가 서진의 가슴팍을 압박했다.
서진은 마비된 손가락을 억지로 움직여 소매 속의 서리 투척 단검을 던지려 했다. 하지만 가슴속 제어기가 삐걱거리며 전신에 가해지는 Параlysis(마비) 통증이 그의 모든 물리적 반격을 원천 차단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절대적인 열세였다.
검끝이 서진의 목덜미, 불타오르는 용의 낙인 바로 위에 닿았다. 차가운 검날의 감촉이 닿는 순간, 서진은 오히려 온 힘을 쥐어짜 하린의 투명한 청청색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용안은 개안되지 않았지만, 평생 약사로서 수만 명의 환자를 진료해 온 그의 예리한 통찰력이 하린의 미세한 호흡과 떨림을 잡아냈다. 그녀의 은빛 머리칼 끝이 미세하게 푸른빛으로 변색되어 있었고, 검을 쥔 손끝의 모세혈관이 차갑게 죽어 있었다.
“……가문의 한빙진경을 무리하게 돌렸군.”
서진의 입술 사이로 뜨거운 용혈의 증기와 함께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하린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한독(寒毒)이 이미 삼초(三焦)를 지나 심장 초입의 맥로까지 침투했다. 매일 자시(子時)가 되면 가슴이 얼어붙는 듯한 극통에 시달리며 호흡을 멈추겠지. 내 말이 틀렸나?”
하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것은 가문 내부에서도 오직 가주와 자신만이 아는 치명적인 수련의 부작용이자 비밀이었다.
“네놈이…… 그걸 어떻게 알았지?”
“나는 약사다. 네가 나를 생포하기 위해 그 한설검의 마력을 더 순환시키는 순간, 역류한 한독이 네 심장을 완전히 얼려버릴 거다. 나를 죽이기 전에, 네가 먼저 얼어 죽는다는 뜻이다.”
서진은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그녀의 약점을 의학적으로 짚어냈다. 하린의 한설검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살의로 가득했던 그녀의 심상에 거대한 심리적 균열이 발생한 순간이었다.
그때였다.
지독한 고열로 끓어오르던 서진의 목덜미에서 눈부신 푸른 청룡의 기운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하린의 손에 쥔 한설검의 서리가 그 열기에 반응하여 미세하게 녹아내리며 맑은 물방울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서진의 품속 깊은 곳에 있던 청룡의 라반이 붉고 푸른 안개를 내뿜으며 요동쳤고, 두 사람의 단전 속에 잠재되어 있던 극과 극의 혈통적 마력이 허공에서 격렬하게 공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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