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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거인의 각성과 멸망의 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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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진천의 단단한 가죽 장화가 서리가 내린 단상을 디딜 때마다, 연무장 사방의 얼음 기둥들이 비명을 지르며 갈라졌다. 그는 허리춤에 찬 빙룡의 눈물 반지를 빛내며, 백서진과 설하린을 향해 절대 영도의 한기 서린 시선을 내리꽂았다.


화경(化境) 고수가 뿜어내는 기세는 연무장 전체의 공기를 강제로 얼려 고정하는 듯했다. 백서진은 가슴을 짓누르는 압도적인 오한에 숨을 들이쉬었으나, 허파로 흘러드는 공기조차 미세한 얼음 가시가 되어 목구멍을 찔렀다. 그의 가슴뼈 중앙에 이식된 용골 심장 제어기가 불규칙하게 덜컹거리며 거친 금속 마찰음을 냈다.


째깍, 째깍, 찌르르륵.


태엽이 어긋나는 소리와 함께 제어기의 틈새로 붉은 용혈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설태풍과의 치열한 비무로 이미 마맥이 과열된 상태에서 가주의 위압을 정면으로 받아내자, 전신의 혈관이 타들어 가는 듯한 작열통이 서진의 전신을 덮쳤다. 그의 목덜미에 새겨진 푸른 용의 낙인이 붉게 물들며 경고의 빛을 발했다.


“서진 씨……!”


옆에 서 있던 설하린이 서진의 창백해진 안색을 보고 황급히 그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신룡의 혈맹 반지가 공명하며 은은한 푸른빛과 붉은 전격을 뿜어냈다. 하린의 차가운 한기 마력이 서진의 손끝을 타고 흘러들어 심장 제어기의 과열을 간신히 식혀주었지만, 가주가 뿜어내는 살기는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설진천은 연무장 바닥에 사방으로 흩어진 설무진의 매국 밀약 서신을 냉혹하게 내려다보았다. 가문의 차기 가주가 될 아들이 용 사냥꾼 연합과 야합해 가문의 비기를 팔아넘기려 했다는 추악한 진실. 그러나 설진천의 눈동자에는 자식의 죄에 대한 분노보다, 가문의 절대적인 권위와 위신이 일개 이단 약사 놈과 반역자 딸년 때문에 만천하에 실추되었다는 것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이 서려 있었다.


“추악한 쥐새끼들이 가문의 마당에서 감히 혀를 놀리는구나.”


설진천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연무장 전체를 진동시켰다. 단상 아래에서 사색이 되어 떨고 있던 설무진이 가주를 향해 기어갔다.


“아, 아버님! 저 서신은 위조된 것입니다! 저 이단 약사 놈이 저를 음해하기 위해 꾸민 짓입니다! 제발 저들을 당장 처단해 주십시오!”


“닥치거라, 무진.”


설진천은 무진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싸늘하게 뱉었다. 그의 시선은 오직 서진의 목덜미에 새겨진 용의 낙인과 하린의 약지에서 빛나는 반지에 고정되어 있었다.


“가문의 피를 더럽히고 비기를 훔친 역적들, 그리고 그 비밀을 들춘 이방인까지…… 이 연무장에 있는 모든 추악한 진실을 이 자리에서 영원히 얼려 묻어버리겠다.”


그의 결단은 냉혹했고 가차 없었다. 설진천은 허리춤에 찬 빙룡의 눈물 반지를 쥔 채, 연무장 중앙 바닥을 향해 강하게 오른발을 내디뎠다.


쿠우우우웅!


화경의 빙황 강기가 청석 바닥을 뚫고 대지 깊숙한 곳으로 흘러들었다. 서진은 용안을 개안해 대지 아래로 흘러드는 마력의 궤적을 쫓았다. 붉고 푸른 마력선들이 연무장 지하에 숨겨진 설가의 금지된 성소, 정령 안치소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고대부터 봉인되어 온 파멸의 힘이 도사리고 있었다.


“아버님이 기어코…… 금단의 봉인을 깨우려 하시는구나.”


하린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가주가 무엇을 하려는지 직감했다. 설진천은 가문의 파멸적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가문의 마지막 보루이자 통제 불가능한 재앙이라 불리던 고대 수호 마수의 봉인을 해제하려는 것이었다.


콰과과과광!


연무장 중앙의 청석 바닥이 거대한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쩍쩍 갈라지며 솟구쳤다. 갈라진 틈새 사이로 만년설산의 심처에서나 볼 수 있는 검푸른 냉기와 붉은 폭주 마력이 소용돌이치며 뿜어져 나왔다. 연무장 사방을 지탱하던 거대한 얼음 기둥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우지끈 부러져 내렸다.


“모두 대피해라! 바닥이 무너진다!”


온건파의 수장인 설지평 장로가 다급하게 소리치며 무인들을 뒤로 물러서게 했다. 그러나 피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갈라진 대지의 심연 속에서, 거대한 얼음과 바위로 이루어진 기괴한 형체가 천천히 솟구쳐 올랐다.


그것은 높이 10미터에 달하는 고대의 괴수, 폭주한 서리거인이었다.


거인의 전신은 결코 녹지 않는 청빙(靑氷)과 험준한 설산의 암석으로 뒤덮여 있었고, 뼈마디마다 검푸른 서리 안개가 이글거렸다. 텅 빈 눈동자 속에서는 이성을 잃은 붉은 폭주 마력이 타오르고 있었다. 거인이 상체를 드러내며 허공을 향해 포효하자, 음파를 타고 밀려온 충격파가 연무장 전체의 유리를 산산조각 내며 무인들을 뒤로 날려버렸다.


“크으으으으아아아아!”


“이, 이게 무슨 괴물이란 말이냐!”


무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무기를 떨어뜨렸다. 설가 본가를 지키는 장로들이 서둘러 세 명씩 조를 이루어 무기를 대지에 꽂았다. 가문의 비기인 설가 삼중결계법(薛家 三重結界法)을 전개해 거인을 포획하려는 시도였다.


“삼중결계, 전개! 거인의 발을 묶어라!”


세 명의 정예 무사들이 방출한 빙결 마력이 정삼각형 구도를 그리며 서리거인의 발밑에서 거대한 얼음 장벽 삼각기둥을 솟구치게 만들었다. 그러나 서리거인은 그들의 결계를 비웃듯 발을 가볍게 내디뎠다.


콰아아앙!


단 한 번의 짓밟힘에 삼중결계의 얼음 장벽이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바스러졌다. 결계가 깨지며 발생한 강력한 반동 마력이 시전했던 세 무사의 단전을 강타했고, 그들은 피를 토하며 뒤로 나뒹굴었다. 더 끔찍한 것은, 그들이 방출했던 빙결 마력이 서리거인의 절대 한기 피부에 그대로 흡수되어 거인의 몸집을 더욱 거대하고 단단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었다.


“바보 같은 놈들! 일반적인 빙결 공격은 저 괴수에게 오히려 약이 될 뿐이다!”


서진이 용안으로 거인의 마력 흡수 흐름을 읽어내고 소리쳤지만, 이미 연무장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통제력을 잃은 서리거인은 눈앞에 보이는 모든 생명체를 말살하려는 듯, 거대한 바위 주먹을 휘둘러 철참 기사단 무사들과 빙벽성 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짓밟기 시작했다.


“크아악! 살려줘!”


“가주님! 제발 봉인을 다시 걸어주십시오!”


기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거인의 발아래에서 깔려 죽어갔지만, 단상 위의 설진천은 그 참상을 차가운 눈으로 방관할 뿐이었다. 그에게는 가문의 비밀을 아는 자들이 거인의 손에 몰살당하는 것이 오히려 완벽한 입막음이었다.


“주군, 위험합니다! 뒤로 물러서십시오!”


어둠 속에서 그림자처럼 나타난 무영과 하린의 시녀 설영이 서진의 앞을 막아섰다. 설영은 아직 어깨의 상처가 완벽히 회복되지 않았음에도 창을 쥐고 있었고, 무영은 연검을 휘두르며 낙석들을 쳐냈다. 두 사람은 서진을 안전하게 대피시키기 위해 서리거인의 목덜미를 기습하려 동시에 도약했다.


“하앗!”


설영의 창끝과 무영의 연검이 서리거인의 목덜미 틈새를 향해 매섭게 날아갔다. 그러나 거인이 가볍게 고개를 돌리며 거친 한기 폭풍을 내뿜었다.


콰아아아아!


“으아악!”


절대 영도의 칼바람이 두 사람의 전신을 덮쳤다. 설영과 무영은 거인의 압도적인 풍압과 한독을 견디지 못하고 허공에서 그대로 튕겨 나가 연무장 바닥의 얼음 더미 위로 거칠게 추락했다. 추락한 충격으로 설영의 어깨 상처가 다시 터져 붉은 피가 눈밭을 적셨고, 무영 역시 내상을 입고 신음했다.


“설영! 무영!”


서진이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 했으나, 가슴의 제어기가 다시 거칠게 비명을 지르며 그의 발목을 잡았다.


“컥……!”


서진은 무릎을 꿇으며 바닥에 피를 토했다. 붉은 피가 차가운 청석 바닥에 닿자마자 서리처럼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심장 제어기가 과열을 이기지 못해 삐걱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그때, 서리거인의 거대한 붉은 눈동자가 비무대 중앙에 쓰러져 있는 서진과 그를 부축하는 하린을 향해 고정되었다. 거인은 대지를 뒤흔드는 걸음걸이로 두 사람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거인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청석 바닥이 영하 100도의 빙판으로 변하며 얼어붙었다.


“서진 씨, 내 뒤에 있어요.”


설하린이 서진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그녀의 은백색 머리칼이 거인의 한기 폭풍에 거칠게 휘날렸다. 하린은 한설검을 두 손으로 꽉 쥐었다. 검날 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안개가 그녀의 가늘게 떨리는 손끝을 감쌌다.


그녀의 눈빛에는 더 이상 가문에 대한 일말의 미련이나 두려움도 남아있지 않았다. 자신을 정략결혼의 도구로만 쓰고, 친모를 독살했으며, 이제는 자신과 자신이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남편 백서진마저 괴물의 먹이로 주려는 가문의 냉혹함에 그녀는 완전히 환멸을 느꼈다.


평생 가문을 위해 검을 쥐겠다던 맹세의 굴레가, 하린의 마음속에서 완벽하게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하린은 왼손 약지의 혈맹 반지를 바라보았다. 서진의 심장 박동과 완벽하게 연결되어 뛰고 있는 붉고 푸른 안개. 이 남자가 죽으면 자신도 죽는다. 아니, 이 남자가 없는 세상은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당신은…… 내가 지켜.”


하린의 입술 사이로 결연한 다짐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단전의 모든 빙결 마력을 한설검에 주입하며 서리거인의 거대한 다리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슈우우우욱!


하린의 신형이 눈부신 은빛 궤적을 그리며 거인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녀는 거인의 무릎 관절을 향해 매서운 한기 참격을 연속으로 날렸다.


챙! 챙! 콰장창!


거인의 단단한 청빙 비늘 표면에 예리한 균열이 가며 검푸른 파편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무인들을 짓밟으려던 거인은 갑작스러운 하린의 공격에 고통스러운 신음을 지르며 그녀를 향해 거대한 손바닥을 내리쳤다.


“크르르릉!”


쿠웅! 쿠웅!


거인의 거대한 손바닥이 비무대 바닥을 내리칠 때마다 지반이 무너져 내렸다. 하린은 유연한 신법으로 거인의 공격을 간발의 차로 피하며, 오직 서진에게 거인의 시선이 닿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그의 주의를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서진의 용안이 급격하게 회전했다. 흑백의 투시 시야 너머로, 서리거인의 거대한 몸체를 구성하는 마력의 실태가 입체적으로 그려졌다. 거인의 심장 부근에 깃든 고대의 정령 기운은 기이하게 뒤틀려 폭주하고 있었고, 그 뒤편으로는 지하 성소인 정령 안치소에서 끊임없이 서리 에너지가 흘러들어 거인의 상처를 실시간으로 치유하고 있었다.


‘재생 속도가 너무 빨라. 저 거인의 몸체는 지하 정령 안치소의 상급 빙정석과 직접 연결되어 있어 에너지를 무한히 공급받고 있다. 공급원을 차단하지 않으면 하린 소저의 마력이 먼저 바닥나고 말 거야.’


서진은 가슴을 부여잡으며 이성적으로 상황을 분석했다. 지금 하린의 공격은 거인에게 타격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인은 주위의 한기를 흡수해 끊임없이 재생하고 있었다. 반면 하린의 마력은 급격하게 소모되고 있었다.


“하린 소저! 정면 대결로는 저 거인을 쓰러뜨릴 수 없습니다! 거인의 몸체는 지하 정령 안치소와 연결되어 지속적으로 재생되고 있습니다! 공급원을 차단해야 합니다!”


서진의 다급한 외침이 전음석의 파동을 타고 하린의 귓가에 울렸다. 그러나 하린은 대답할 여유조차 없었다. 서리거인이 양손을 대지에 꽂으며 전방을 향해 거대한 한기 포효를 내뿜었기 때문이었다.


“크으으으으아아아아!”


거인의 아가리에서 방출된 절대 영도의 서리 브레스가 백색의 거대한 해일이 되어 비무대 전체를 덮쳤다. 닿는 모든 생명체를 순식간에 동사시키는 죽음의 안개였다. 브레스의 궤적 끝에는 마맥이 꼬여 움직이지 못하는 서진과 부상당한 설영, 무영이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안 돼……!”


하린은 비명을 지르며 서진의 전방으로 몸을 던졌다. 그녀는 부러져가는 한설검을 대지에 강하게 꽂으며 가문 최후의 방어막을 전개했다.


‘빙화검결, 만년한설 장벽(萬年寒雪 障壁)!’


콰구구구궁!


두 사람의 전방으로 높이 5미터에 달하는 거대하고 투명한 얼음 방패막이 솟구쳐 올랐다. 그와 동시에 서리거인의 절대 영도 브레스가 얼음 장벽을 정면으로 강타했다.


콰아아아아아앙!


연무장 전체가 눈부신 백색 광폭풍에 휩싸였다. 장벽 표면으로 쏟아지는 거대한 서리의 압력은 하린의 단전을 무자비하게 짓눌렀다. 하린은 입술을 깨물며 버텼으나, 그녀의 입술 사이로 붉은 선혈이 흘러내려 하얀 눈밭을 적셨다.


쩍, 쩍쩍, 쩍!


절대 영도의 압력을 견디지 못한 만년한설 장벽 표면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하린이 쥐고 있던 한설검의 검날에도 미세한 균열이 가며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렸다.


“아으윽……!”


하린은 무릎을 꿇으며 신음했다. 반지를 타고 전해지는 그녀의 마력 소모 수치는 이미 80%를 넘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단전이 텅 비어가며 전신 사지가 얼어붙는 듯한 한독의 부작용이 그녀를 덮쳤다. 장벽이 무너지면, 그 배후에 있는 서진과 동료들은 흔적도 없이 얼어 죽을 터였다.


서리거인은 첫 번째 브레스가 끝나가자, 승기를 잡았다는 듯 거대한 바위 오른손 주먹을 허공 높이 치켜들었다. 장벽을 단숨에 부수고 그 아래의 두 사람을 짓밟아 으스러뜨리려는 무자비한 기세였다.


거인의 거대한 그림자가 하린과 서진의 머리 위를 어둡게 뒤덮었다. 주먹이 낙하하기 직전의 절체절명의 순간, 연무장의 공기는 숨이 막힐 듯한 침묵 속에 잠겼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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