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옥패(靑玉牌)의 위장과 연무장의 결투
지하 감옥의 붕괴와 가주 설진천의 압도적인 화경(化境) 위압이 가해지던 절체절명의 순간, 그들을 구원한 것은 어둠 속에서 은밀히 움직인 온건파의 영수, 설지평 장로였다. 무영이 터뜨린 칠흑 같은 그림자 연막과 설지평이 미리 확보해 둔 가문 내부의 비밀 통로 덕분에 서진 일행은 철참 기사단의 포위망을 극적으로 우회하여 탈출할 수 있었다.
지하 통로의 출구에서 설지평은 창백하게 식어가는 서진의 손에 단단하고 차가운 청색 옥패 하나를 쥐여주었다. 바로 ‘설가 방계의 청옥패(靑玉牌)’였다. 가주의 눈을 피하기 위해 방계 호위무사의 신분으로 위장하라는 뜻이자, 이 지옥 같은 북해 설가 본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열쇠였다. 설지평은 나지막이 경고했다. 가문 내부의 대다수 장로와 무인들이 모여 있는 ‘설가 연무장(雪家 演武場)’으로 가, 설무진과 설태백의 배신 행위를 만천하에 폭로하고 정당한 비무를 통해 생존을 쟁취하라고.
***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깊은 밤.
웅장한 얼음 기둥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북해 설가의 심장부, 설가 연무장은 기이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단단한 청석 바닥 위에는 만년설산에서 내려온 하얀 눈이 얇게 깔려 있어, 발을 디딜 때마다 서늘한 소리가 연무장 전체에 낮게 울려 퍼졌다. 사방을 둘러싼 거대한 횃불들이 타오르며 붉은 불꽃을 허공에 뿌렸지만, 청석 바닥에서 올라오는 서늘한 냉기는 무인들의 발목을 얼려버릴 듯 차가웠다.
연무장 중앙의 높은 단상 위에는 가문의 급진파 장로인 설태백이 거만한 태도로 의자에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하린의 이복오빠 설무진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가문 무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설하린을 ‘이단과 내통하여 가문의 비보를 훔치고 도주한 반역자’로 규정하고, 그녀의 직위를 영구히 박탈하는 가문 총회를 진행하려던 참이었다.
“설하린은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 방계의 천재 설태풍을 새로운 후계자로 옹립하고, 이단 괴수 놈을 비호한 반역자들을 즉시 처단해야 마땅하다!”
설태백 장로의 칼날 같은 목소리가 연무장을 가득 메운 수백 명의 무인들 사이로 울려 퍼졌다. 무인들이 동요하며 웅성거리기 시작할 때, 연무장 입구의 거대한 철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차가운 눈바람과 함께 네 명의 인물이 연무장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설지평 장로가 건넨 청옥패를 허리춤에 차고, 낡은 가죽 약사복 위에 설가의 방계 호위무사 도포를 걸친 백서진이 그 중심에 있었다. 그의 얼굴은 은침술의 반동과 용혈 치유의 여파로 인해 여전히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으나, 그의 검은 눈동자 속 푸른 세로 동공은 용안(龍眼)의 정밀한 광채를 내뿜으며 연무장 전체의 마력 흐름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의 가슴뼈 아래 박힌 용골 심장 제어기는 성에가 낀 채 거칠게 째깍거렸지만, 곁에 선 설하린의 존재만으로도 간신히 고동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린은 은백색 머리칼을 휘날리며 단상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신룡의 혈맹 반지가 서진의 심장 박동과 동기화되어 붉고 푸른 안개를 은밀하게 내뿜고 있었다. 하린이 한설검을 대지에 강하게 꽂으며 외쳤다.
“누가 감히 나를 반역자라 부르는가!”
연무장 전체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설무진의 안색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마평에게서 서진이 감옥에서 무력화되었다는 보고를 받았을 텐데, 어떻게 하린과 함께 이곳에 나타났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린이 네가 기어코 이단 놈을 데리고 본가까지 기어들어 왔구나! 저 비열한 약사 놈을 즉시 사로잡아라!”
설무진이 소리치며 사설 무사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어둠 속에서 대기하고 있던 배검의 잔당들과 살수들이 서진의 목을 노리고 도약하려던 순간, 서진의 그림자 속에서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척 차단 파동이 일렁였다. 독고성이 붙여준 그림자 호위 무영이 그림자 보행으로 적들의 침투 경로를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살수들은 원인 모를 한기에 짓눌려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하린은 품속에서 마평의 시신에서 수거한 금화 주머니와 설무진의 친필 배신 서신을 단상 위로 던져버렸다. 청석 바닥 위에 부딪힌 청옥과 금화들이 쨍그랑거리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배신자는 내가 아닌 설무진이다! 그는 후계 자리를 찬탈하기 위해 용 사냥꾼 연합과 결탁하여 나를 제거하려 했고, 내 친모인 설미혜를 독살한 배후 역시 이 자리에 있는 급진파 장로들이다!”
하린의 처절하고도 단호한 폭로에 연무장에 모인 방계 무인들과 온건파 전사들이 격렬하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설태백 장로는 얼굴을 험악하게 굳히며 단상에서 일어났다.
“닥쳐라! 반역자의 궤변일 뿐이다! 기사단은 저 이단 괴수와 미친 기집애를 당장 처형해라!”
“가문의 법률은 장로 한 명의 독선으로 좌우되지 않소, 설태백 장로.”
그때, 단상 아래에서 대나무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인자하지만 범접할 수 없는 기백을 뿜어내며 걸어 나왔다. 온건파의 수장, 설지평 장로였다. 그는 지팡이로 청석 바닥을 쿵 하고 내리치며 엄숙하게 선언했다.
“가문의 정통 규율에 따르면, 직계 후계자가 중대한 범죄 혐의를 제기받았을 때, 그녀는 연무장 위에서 정당한 비무(比武)를 통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권리가 있소. 이를 거부하는 자야말로 가문의 선조들을 배신하는 반역자요!”
설지평의 정통 규율 제시 앞에 설태백은 이를 갈며 주춤했다. 가문 내부의 여론이 급격히 온건파와 하린의 편으로 기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때, 설무진의 뒤편에서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파란 무복을 입은 은발의 청년이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설가의 방계 천재이자 하린의 자리를 노리던 설태풍이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가문을 대표하여 저 반역자 소저의 목을 베고 결백을 심판하지요. 하린 소저, 검을 뽑으십시오.”
설태풍이 자신의 비전 보검을 뽑아 들자, 연무장 전체에 폭풍 같은 빙설 기류가 사납게 휘몰아쳤다.
하린은 검을 쥐려 했으나, 서진의 가슴속 제어기에서 새어 나오는 붉은 증기를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서진은 지금 극심한 마력 고갈과 전신 쇠약 상태였다. 하린은 서진과 생명력을 공유하고 있었기에, 그녀가 비무에서 마력을 과도하게 소모하면 서진의 심장이 먼저 멈춰버릴 터였다.
결국 하린은 연무장 전체를 향해, 자신의 모든 명예를 내려놓은 충격적인 선언을 던졌다.
“내 목숨과 심장은 이미 이 사내와 하나로 묶여 있다. 내 단전이 이 사내의 생명을 지탱하고 있으니, 가문의 대리 비무 규율에 따라 나의 반려이자 호위무사인 이 사내가 나를 대신해 비무대에 오를 것이다!”
수백 명의 가문 무인들이 경악하며 비명을 지르듯 웅성거렸다. 고결한 설가의 차녀가 무공도 모르는 창백한 약사 놈과 생명력을 공유하는 서약을 맺었다는 사실은 가문 전체의 가치관을 뒤흔드는 일이었다. 하린은 부끄러움으로 뺨을 붉히면서도, 서진의 옷깃을 남몰래 꽉 쥐며 그의 귀에 걸린 질투 감지 귀걸이를 향해 맹목적인 신뢰와 애정의 파동을 보냈다.
짤랑ㅡ 짤랑ㅡ.
서진의 오른쪽 귀에 걸린 질투 감지 귀걸이가 요란하면서도 감미로운 방울소리를 울리기 시작했다. 반지를 타고 흐르는 하린의 뜨거운 애정 파동이 서진의 얼어붙어가던 단전을 부드럽게 녹여내기 시작했다. 서진은 단전의 용혈 온도를 천천히 끌어올리며 전신에 미세한 투기 방출(投氣 放出) 결계를 전개했다. 창백했던 그의 피부 위로 은은한 푸른빛과 붉은 아지랑이가 소용돌이치며 기이한 위압감을 풍겼다.
서진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설가 방계의 청옥패를 연무장 바닥을 향해 툭 던졌다.
탁ㅡ! 쨍그랑.
청옥패가 차가운 청석 바닥 위를 미끄러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위장의 껍질을 벗어던지고, 오직 하린의 명예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비무대 위로 당당히 올라서는 백서진의 기백은 눈빛만으로도 사방의 무인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방계의 천재라 불리는 자의 검술이 얼마나 대단한지, 내가 직접 확인해 주지.”
서진의 창백하면서도 의연한 선언에 설태풍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감히 가문의 벌레 같은 약사 놈이 자신을 도발하다니, 용서할 수 없는 모욕이었다.
“이 건방진 쥐새끼가 기어코 죽기를 자청하는구나! 폭풍빙설검(暴風氷雪劍)!”
설태풍이 광소하며 검을 치켜들자, 연무장 청석 바닥의 얇은 눈들이 일제히 거대한 소용돌이가 되어 서진의 심장을 얼려버릴 듯한 참격의 기류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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