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인실의 잠입
지하 3층 연금술 조제실에서 뿜어져 나온 하얀 알칼리 중화 안개가 통로를 자욱하게 메우고 있었다. 정화 기사단의 은 도금 갑옷이 산성 마력을 잃고 쇳소리를 내며 뒤엉키는 비명소리가 등 뒤로 멀어졌다. 발타자르 기사단장의 무시무시한 화염 오라가 안개를 증발시키며 전진해 오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와 정면으로 맞설 때가 아니었다.
“……이쪽이오. 서둘러야 하오.”
내 목구멍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거칠고 차가운 금속성 쇳소리를 냈다. 정화조에서 산성 가스를 들이마셔 영구적으로 굳어버린 성대는 말을 할 때마다 기도를 찢는 듯한 통증을 유발했다.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은 에테르 필사의 대가로 이미 절반쯤 백발로 변해 바스러져 있었다.
내 곁에서 나를 부축하던 에스더가 창백한 안색으로 나직하게 속삭였다.
“루카스, 몸이 너무 뜨거워요. 등 뒤의 마나 회로가 또다시 과열되고 있어요. 제발 무리하지 마세요.”
그녀의 손길이 내 어깨에 닿자 성스러운 치유의 온기가 등 뒤의 타오르는 통증을 일시적으로 가라앉혔다. 그녀의 목에 걸린 성물 펜던트의 은빛 보석에는 미세한 균열이 가 있어 정화 마력이 이전보다 약화되어 있었지만, 그녀는 내 자아 붕괴를 막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생명력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괜찮소. 멜키오르 스승님의 일기장을 찾지 못하면, 우리에게 다음 단계는 없소.”
나는 어둠 속에서 날렵하게 움직이는 소형 여기수, 엘리사를 바라보았다. 고양이처럼 유연한 몸매를 지닌 그녀는 짧은 머리칼 아래로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통로 모퉁이를 정찰하고 있었다.
“현자 양반, 바로 앞이 성물 봉인실이야. 하지만 경비 사제들의 감지 아티팩트가 사방에 깔려 있어. 쥐새끼 한 마리도 마력 파동 없이는 못 지나가게 촘촘하게 얽어놨다고.”
엘리사가 새침하게 툴툴거리면서도 허리를 숙여 기운을 극도로 압축하는 ‘고양이 발걸음 호흡법’을 전개했다. 그녀의 신체 윤곽이 어둠과 완벽히 동화되어 소리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도달한 곳은 교단이 이단자들에게서 빼앗은 고대 마도 유물들을 보관하는 ‘성물 봉인실’의 외곽 초소였다. 장엄한 대리석 문 주변으로 황금빛 신성 장막이 흐르고 있었고, 두 명의 경비 사제가 마력 탐지 나침반을 쥔 채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었다. 장막에 닿는 모든 유기물은 흔적도 없이 증발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결계였다.
스윽.
엘리사의 손끝이 바람처럼 부드럽게 경비 사제의 품을 스쳐 지나갔다. 소리도, 미세한 기류의 변화도 없었다. 사제들이 눈을 깜빡이는 찰나, 엘리사는 이미 그들의 품속에서 결계 제어 열쇠와 간수장의 ‘마법 탐지 우회 아티팩트’를 감쪽같이 소매치기해 낸 상태였다.
“어때? 이 정도면 쓸만하지?”
엘리사가 장난스럽게 은빛 아티팩트를 흔들어 보였다. 그녀가 아티팩트의 마법진을 작동시키자, 우리를 누르던 삼엄한 마력 탐지망이 일시적으로 우리를 무해한 허공으로 인지하기 시작했다. 황금빛 신성 장막이 미세하게 갈라지며 소리 없이 문이 열렸다.
봉인실 내부로 발을 내딛는 순간, 사방을 가득 메운 고대 유물들의 찬란한 마력 파동이 내 피부를 강하게 자극했다. 등 뒤에 새겨진 고대 제국의 금기서 문장들이 핏빛으로 붉게 타오르며 거칠게 맥박 치기 시작했다.
유적의 보물들 사이, 중앙 제단 위에 굳건한 신성 결계로 봉인된 가죽 일기장이 보였다. 스승 멜키오르가 남긴 ‘멜키오르의 암호화된 양피지 일기’였다. 그 옆에는 내 손발이 되어줄 ‘특제 가죽 복원 메스’와 ‘에테르 투사기’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드디어 찾았소……”
내가 일기장을 향해 손을 뻗으려던 찰나, 봉인실 서고의 어두운 그늘 속에서 서늘하고 탐욕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결국 여기까지 기어 들어왔구나, 가짜 현자 놈.”
어둠을 가르고 걸어 나온 자는 순백의 사제 로브를 입은 젊은 사내였다. 손톱이 길고 날카로운 그의 손가락에는 푸른 마력을 흘리는 ‘부식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수석 심문관 베르나르트의 수석 제자이자, 내 살가죽을 박제해 스승에게 바치려 공명심에 눈이 먼 야심가, 에드워드였다.
“에드워드……”
내 목소리가 쇳소리를 내며 긁혔다. 에드워드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비열하게 웃었다.
“스승님께서 네놈의 등 가죽을 온전히 가져오라 하셨지. 하지만 내 손으로 직접 박리 마법을 가해 네놈의 얄팍한 지식을 먼저 빼앗아도 상관없겠지. 삼류 학도 주제에 고대의 위대한 마법을 흉내 내다니, 가당치도 않다!”
에드워드가 반지를 낀 손을 뻗었다. 그의 주변으로 기하학적 완결성이 결여된 조잡한 붉은 마법진들이 연쇄적으로 떠올랐다.
“죽어라, 이단자!”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공기를 녹여버릴 듯한 초강산성의 ‘산성 화살 마법’이 십여 발이나 형성되어 우리를 향해 쇄도했다. 닿는 즉시 뼈까지 녹여버릴 무시무시한 부식성 마탄이었다.
“위험해!”
엘리사가 에드워드의 허점을 노리고 그의 반지를 직접 훔치려 접근했으나, 에드워드 주변에 촘촘하게 전개된 미세한 열원 감지 결계에 닿는 순간 그녀의 옷자락 일부가 하얗게 타들어 갔다.
“꺄악!”
엘리사가 급히 뒤로 굴러 착지하며 신음했다. 에스더가 다급히 그녀의 앞으로 나서며 치유 장막을 펼치려 했지만, 에드워드가 쏘아 보낸 산성 마탄의 궤적은 너무나도 빨랐다.
‘냉정해져야 한다. 분석해라.’
나는 거친 호흡을 멈추고 ‘초인지 집중(Hyper-cognitive Concentration)’을 가동했다. 뇌세포의 연산 속도가 극한으로 치솟으며 사방의 시각 정보가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정지했다. 날아오는 산성 화살들의 궤적이 공중에 붉은색 마력 실선으로 가시화되어 그려졌다.
동시에 내 눈동자가 차가운 푸른빛으로 물들며 ‘마법 결함 투시(Magic Defect Clairvoyance)’ 능력이 활성화되었다. 에드워드가 자랑스레 전개한 붉은 마법진들의 정밀한 기하학적 구조가 내 뇌 속에서 실시간으로 분해되기 시작했다.
‘보인다. 교단이 가르치는 현대 신성 마법의 한계가.’
그의 마법진은 겉보기에는 화려하고 견고해 보였지만, 마력을 공급하는 중심 꼭짓점의 기하학적 균열선이 비정상적으로 왜곡되어 있었다. 고대 공식의 완벽함을 억지로 현대 신학에 대입하려다 생긴 치명적인 비대칭 결함점이었다.
나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메스로 공중에 완벽한 역삼각형 선을 그렸다. 내 등 뒤의 문신이 붉게 타오르며 메스 날 끝으로 정순한 에테르 마나를 방출했다.
지이이익!
내가 그어 내린 역삼각형의 선이 에드워드의 마법진 중앙 결함점을 정확히 관통했다.
“무, 무슨……?!”
에드워드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결함점을 타격당한 그의 마법진들이 하얗게 끓어오르며 순식간에 구조적 균열을 일으켰다. 공중을 날아오던 산성 화살들이 표적을 잃고 사방으로 흩어지더니, 이내 마력 공급이 차단되어 아무런 부식력도 없는 수증기로 변해 허공에서 허망하게 녹아내렸다.
“마법진이…… 부식당했다고? 내 완벽한 정화식이 어째서!”
에드워드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마법이 깨지며 발생한 마력 역류 파동이 그의 오른팔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그의 은제 메스를 쥐고 있던 손가락 가죽이 미세하게 부식되며 붉은 핏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이 교단이 왜곡한 가짜 기적의 한계요.”
나는 쇳소리 섞인 목소리로 나직하게 읊조리며, 등 뒤의 과열된 혈류량을 조율했다. 가슴 속에서 멜키오르 스승님의 잔류 사념이 분노로 요동치고 있었다.
나는 에드워드가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손가락 끝으로 공중에 완벽한 정방형의 마도 선을 그리는 ‘고대 기하 영창(Ancient Geometric Chant)’을 시전했다. 내 입술 사이로 차갑고 무거운 고대어의 1음절이 방출되었다.
“라(Ra)—!”
공중에 그려진 선명한 붉은색 기하학 문양이 폭발하듯 빛났다. 에테르의 흐름이 정방형의 규격 안에 갇혀 극도로 압축되더니, 전방을 향해 상상을 초월하는 물리적 충격파를 폭풍처럼 뿜어냈다.
콰아아아앙—!
“끄으아아악!”
에드워드는 자신이 전개하려던 방어 장벽째 물리적 충격파에 밀려나, 봉인실의 단단한 대리석 벽면에 정면으로 처박혔다. 콰직하는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그가 피를 토하며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의 오른팔 마나 회로는 완전히 파괴되어 부식 독이 그의 살가죽을 검게 태우기 시작했다. 에드워드는 비참한 신음을 내지르며 완전히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하아…… 하아……”
고대 기하 영창을 무리하게 발성한 대가로 내 목구멍에서 뜨거운 핏물이 울컥 솟구쳤다. 성대가 마력의 열기에 그을려 목소리가 더욱 거친 쇳소리로 변해가는 신체적 대가를 치렀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제단으로 다가갔.
스윽.
나는 결계가 풀린 제단 위에서 멜키오르 스승님의 양피지 일기장과 특제 복원 메스, 에테르 투사기를 품속으로 회수했다. 드디어 가문의 잃어버린 유산과 복원 도구들을 되찾은 것이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가죽 일기장의 표면에 새겨진 마법 암호를 응시했다. 조모 실비아에게 배웠던 고대어 자모음 대입법을 머릿속으로 연산하며, 일기장의 첫 번째 봉인 구절을 조용히 해독해 내기 시작했다.
[여명의 불꽃이 꺼질 때, 진실은 가장 깊은 심연의 흙 속에 묻히리라.]
그 문장을 완전히 해독하여 내 입술로 나직하게 영창하는 순간, 상상을 초월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두근! 두근!
내 등 가죽에 새겨진 고대 제국의 금기서 문신 전체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거칠고 폭발적으로 맥박 치기 시작했다. 전신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에테르 마나가 시뻘겋게 과열되며 상상을 초월하는 고열이 척추를 타고 뇌세포로 곧바로 역류했다.
“아아아악!”
나는 극심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등 뒤의 핏빛 문장들이 장엄하게 발광하며, 봉인실의 차가운 대리석 바닥을 뚫고 지하 5층 아래의 깊고 차가운 어둠을 향해 보이지 않는 마력의 이정표를 일직선으로 가리키기 시작했다. 그곳에 진짜 여명 제국의 마지막 건국사 비석이 묻혀 있음을 가리키는 강력한 인과율의 외침이었다.
“루카스! 정신 차려요!”
에스더가 나를 붙잡으려던 순간, 봉인실 사방의 대리석 벽면에서 거대한 마찰음과 함께 강철 격벽들이 차례로 내려앉기 시작했다. 에드워드가 쓰러지며 가동한 비상 결계 시스템이 작동한 것이었다.
쾅! 쾅! 쾅!
성물 봉인실의 모든 도주로가 두꺼운 강철 격벽으로 가로막혀 완벽히 고립되었다. 동시에 격벽 너머 지상에서부터, 감찰관 기제라가 보낸 교황청 특급 전사들의 무거운 군화 발소리가 봉인실을 향해 빠르게 좁혀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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