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하는 암살자와 영혼 대역 인형
명계 변방 재판소의 지하 깊은 곳, 레오의 임시 거처이자 먼지 쌓인 법률 서적들이 가득한 지하 기록실은 밤이 되면 지독한 냉기로 가득 찼다. 사방을 에워싼 석조 벽에서는 축축한 습기와 함께 명계 특유의 음산한 원혼의 기운이 스며 나왔다.
한우진은 낡은 책상 위에 올려진 촛불 하나에 의지해 두꺼운 가죽 장부를 넘기고 있었다. 사흘 뒤로 예정된 에드워드 4세의 최종 공판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의 정신은 온전히 글자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관자놀이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극심한 두통이 끊임없이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으윽…….”
우진은 신음하며 이마를 짚었다. 낮에 있었던 2차 공판에서 가스톤의 위증을 폭로하고, 명계 법정의 근본 규칙인 ‘위증죄의 마법적 집행’을 강제로 끌어다 쓴 대가였다. 당시 그의 신성력 수치는 겨우 3%에 불과했다. 법정의 절대적인 시스템을 동조시키는 과정에서 영혼의 마력을 한계까지 쥐어짜 냈으니, 육체에 과부하가 걸리는 것은 당연했다. 입가에는 지난 밤 흘렸던 마른 피 흔적이 여전히 붉게 남아 있었다.
‘현재 내 남은 신성력은 1.5% 내외. 이 상태에서 안토니오 사제와 요한 재판관이 순순히 다음 재판을 기다릴 리가 없다.’
우진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어둠침침한 기록실 구석을 응시했다. 가스톤은 배심원 석상들에 의해 검은 사슬에 묶여 영혼 감옥으로 압송당했다. 그리고 끌려가기 직전, 자신에게 위증을 교사하고 뇌물을 준 배후가 안토니오 사제라는 사실을 법정 전체에 비명 지르듯 자백했다.
안토니오 사제의 탐욕스러운 얼굴이 분노와 공포로 일그러지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사법적인 수단으로 자신을 이길 수 없음을 깨달은 자들이 취할 행동은 뻔했다. 법정이라는 안전망을 벗어난 지금, 그들은 반드시 사적인 무력을 동원해 자신을 영구히 침묵시키려 할 것이다.
우진은 조용히 로브 안쪽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거칠고 까칠한 지푸라기의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낮에 고블린 정보 상인 그림의 만물상에서 밀수품 장부를 빌미로 반협박하여 뜯어낸 ‘영혼 대역 인형’이었다.
‘그림 녀석이 동방의 주술사에게서 겨우 구해온 일회성 보명 유물이라고 했지. 치명적인 독약이나 기습을 단 한 번 완벽하게 대역 전가하고 소멸한다고 했다.’
우진은 인형의 머리 부분에 미리 떨어뜨려 둔 자신의 피 한 방울이 마법적으로 스며들어 붉은 흔적을 남긴 것을 확인했다. 이 세계에서 자신은 칼 한 자루 제대로 휘두를 수 없는 육체적 약자였다. 현대 한국의 형사 변호사로서 축적된 증거 분석력과 논리가 아무리 뛰어나도, 밤중에 날아드는 자객의 칼날 앞에서는 종이 인형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그는 철저히 방어책을 준비해 두었다.
스으으으—.
그때, 지하 기록실 내부의 공기가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촛불의 불꽃이 흔들리지도 않았다. 소리도 없었고, 어떠한 마력의 파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우진의 형사 변호사로서 단련된 직관, 그리고 고대 법률가의 반지가 미세하게 차가운 서리를 내뿜으며 경고를 보냈다.
‘왔군.’
우진은 책상 위에 펼쳐진 장부를 바라보며 눈동자만을 움직였다.
그림자 속에서, 물리적인 형체가 없는 것처럼 매끄럽고 은밀하게 움직이는 검은 실루엣이 나타났다. 얼굴을 가죽 마스크로 가리고, 온몸에 음산한 독약 병과 단검을 차고 있는 사내. 명계에서 악명 높은 독약 살인마이자 안토니오가 고용한 일류 암살자, 브루노였다.
브루노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그는 완벽한 ‘기척 차단 마법’을 전개한 채 우진의 등 뒤로 소리 없이 접근했다. 그의 오른손에는 무색무취의 치명적인 독약, ‘레테의 눈물’이 듬뿍 묻은 차가운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단검의 칼날이 어둠 속에서 불길한 보랏빛으로 번뜩였다.
브루노의 눈빛에 잔혹한 살기가 서렸다. 단번에 심장을 꿰뚫어 영혼을 녹여버리겠다는 명백한 의지였다.
쉬익!
소리 없는 참격이 우진의 등 뒤에서 뿜어져 나왔다. 브루노의 단검이 우진의 왼쪽 등덜미를 뚫고 그대로 심장이 있는 위치를 정확하게 관통했다.
푸학!
칼날이 살을 찢고 들어가는 축축한 타격음이 기록실의 정적을 깨뜨렸다. 브루노의 입가에 완벽한 암살을 확신하는 비열한 미소가 걸리려던 그 순간.
“키이이이익—!”
인간의 것이 아닌, 소름 끼치도록 기괴하고 높은 비명 소리가 기록실 허공을 찢었다.
브루노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흔들렸다. 단검이 꿰뚫은 것은 레오의 마른 몸이 아니었다. 우진의 로브 안쪽 주머니에서 뿜어져 나온 시커먼 녹색 불꽃이 순식간에 그의 몸 전체를 감쌌다. 우진의 품속에 있던 지푸라기 인형이 시커멓게 불타오르며 완전히 소멸하고 있었다.
쿠웅!
동시에 대역 전가 마법의 반동으로 인해 강력한 충격파가 발생했다. 우진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강한 타격력에 밀려 앞으로 3미터가량 튕겨 나갔다. 책상 위로 거칠게 엎어진 우진은 낡은 법률 서적들과 함께 바닥을 굴렀.
“쿨럭! 쿨럭!”
우진은 가슴을 움켜쥐고 격렬하게 기침을 토해냈다. 실제로 단검에 찔린 것은 아니었지만, 대역 인형이 타격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영적 진동이 그의 약한 영체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뇌가 깨질 듯한 두통이 밀려왔고,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그는 살아 있었다.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었고, 레테의 눈물이라는 치명적인 독약은 그의 몸에 단 한 방울도 닿지 않았다.
“……대역 인형이라고?”
브루노가 가죽 마스크 너머로 거친 목소리를 뱉어냈다. 사법적 절차와 법 따위는 강자들의 장난감이라 비웃던 일류 살수였지만, 설마 변방의 가난한 기록관 놈이 이런 고가의 보명 유물을 소지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브루노는 신속하게 자세를 고쳐 잡았다. 기습은 실패했지만, 눈앞의 변호사 놈은 마력이 거의 방전된 무력한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다. 한 번 더 칼을 휘두르면 그뿐이었다. 브루노가 다시 단검을 치켜들며 우진의 목을 향해 도약하려 했다.
“침입자다! 경비……!”
우진이 바닥을 기며 목이 터져라 외쳤다.
스윽—!
그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지하 기록실의 두꺼운 철문 뒤 그림자 속에서 은빛 광휘가 번쩍였다.
콰아아앙!
철문이 부서지는 굉음과 함께, 은빛 갑옷을 입은 날렵한 체구의 여기사가 폭풍처럼 기록실 내부로 난입했다. 붉은색 단발머리를 휘날리며 차가운 벽안을 번뜩이는 검사, 발레리아였다. 그녀는 낮에 우진이 법정에서 사법적 정의를 관철하는 모습에 깊은 감화를 받고, 그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어둠 속에서 조용히 대기하고 있었다.
“이 더러운 쥐새끼가 감히 어디에 칼을 들이미느냐!”
발레리아의 맑고 날카로운 호통이 기록실 전체를 흔들었다. 그녀의 손에 쥔 은빛 장검에서 찬란한 ‘성광 검술’의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눈부신 백색의 빛이 어두운 지하 공간을 대낮처럼 밝히며 브루노의 시야를 강제로 멀게 만들었다.
“치윽!”
브루노는 눈을 찌푸리며 본능적으로 뒤로 도약했다. 그는 품속에서 세 자루의 독 단검을 꺼내 발레리아를 향해 전력으로 투척했다. 단검들이 허공을 가르며 날카로운 파공음을 냈다.
챙! 챙! 챙!
하지만 발레리아의 검은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은빛 장검이 반원을 그리며 성광의 장벽을 형성했고, 날아들던 독 단검들은 허공에서 불꽃을 튕기며 무력하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빛의 이름으로, 죄인을 단죄하노라!”
발레리아가 대지를 박차고 나갔다. 그녀의 신형이 빛의 궤적을 그리며 브루노의 눈앞까지 순식간에 쇄도했다.
브루노는 다급히 그림자 기동술을 사용해 어둠 속으로 숨으려 했다. 그의 몸이 반투명한 검은 안개로 변하려던 그 찰나, 발레리아의 은빛 장검이 사선으로 매섭게 그어졌다.
서걱!
“크아아악!”
브루노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성광의 참격이 그림자 마나를 정면으로 찢어발기며 그의 양팔 관절과 허벅지를 정확하게 베어 넘겼다. 검은 안개가 산산이 부서지고, 피를 흘리는 브루노의 몸이 바닥으로 무겁게 추락했다. 그의 손에 쥐여 있던 단검이 땡그랑 소리를 내며 저만치 굴러갔다.
발레리아는 주저 없이 브루노의 가슴을 부츠로 강하게 짓눌렀다. 그녀의 검끝이 브루노의 목울대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차가운 벽안에는 단 한 점의 자비도 없었다.
“움직이면 영혼을 통째로 베어버리겠다.”
브루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빨을 갈았지만, 사지가 잘려 나간 상태에서는 더 이상 반항할 마력도, 체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완벽한 제압이었다.
우진은 책상을 붙잡고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전신은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고, 뇌파가 흔들리는 극심한 두통이 지속되었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얼음처럼 차갑고 이성적이었다.
“……고맙군, 발레리아 기사.”
우진이 쉰 목소리로 말하며 천천히 브루노에게 다가갔다. 발레리아는 우진의 상태를 살피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지만, 이내 기사답게 엄숙한 태도를 유지했다.
“변호사님의 신념을 지키는 것이 제 검의 정당성입니다. 이 자를 어떻게 처리할까요? 당장 목을 벨까요?”
“아니, 살려두어야 한다. 법정 밖의 살인은 사법적 가치가 없지만, 살아있는 자객은 최고의 증거가 되지.”
우진은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는 브루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왼쪽 눈의 정의의 단안경을 가볍게 톡 치며 활성화했다. 렌즈 너머로 브루노의 신체에 남아 있는 마력 파동들이 선명하게 스캔되었다.
우진은 브루노의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살수의 옷 안쪽 깊은 곳에서, 두꺼운 양피지 한 장이 만져졌다. 우진이 그것을 꺼내 들자, 브루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것은 붉은색 밀랍으로 단단히 봉인된 비밀 서신이었다.
우진이 단안경을 통해 서신의 봉인 부분을 응시하는 순간, 렌즈 우측의 수치들이 급격히 요동치며 특정 마력 주파수를 감지해 냈다.
봉인 표면에 새겨진 기괴하고 정교한 문양. 그것은 단순한 밀랍 인장이 아니었다. 성황청 사제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고유한 신성 마력의 흔적, 그리고 그 기저에 흐르는 축축하고 탐욕스러운 마력의 지문.
[특수 분석: 암살 의뢰 밀서의 마법 봉인을 감지했습니다.]
[정보: 기소인 안토니오 사제의 고유한 타락한 신성 마력 각인이 새겨져 있습니다. 위조가 불가능한 살인 교사의 명백한 물증입니다.]
우진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피로에 찌든 그의 얼굴 위로, 마침내 안토니오의 목줄을 완벽하게 쥘 수 있는 사법적 스모킹 건을 확보했다는 냉혹한 승리감이 피어올랐다.
“안토니오 사제…….”
우진은 밀서를 쥐어짜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네가 스스로 내 목을 칠 칼날을 쥐여주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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