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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에 얽힌 붉은 인과의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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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도의 축축하고 비린 공기를 뚫고 나온 한우진은 옷자락을 여몄다. 명계의 변두리, 삶과 죽음의 경계에 걸쳐진 안개의 마을 ‘네펠(Nephel)’은 온통 은백색의 서리로 뒤덮여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차가운 한기가 폐부를 찔렀고, 허공을 떠도는 안개는 마치 살아 있는 유령처럼 우진의 회색 사제복 주변을 맴돌았다.


“형, 진짜 괜찮겠어? 안토니오 사제의 눈을 피해서 여기까지 오는 건 너무 위험했어. 몸도 성치 않은데……”


조수 시몬이 사시나무 떨듯 어깨를 움츠리며 소리 죽여 속삭였다. 그의 걱정대로 우진의 상태는 최악에 가까웠다. 그림의 만물상에서 정의의 단안경을 무리하게 사용한 탓에 왼쪽 눈은 핏발이 서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관자놀이에는 바늘로 찌르는 듯한 극심한 편두통이 가시지 않았다.


[견습 영혼 변호인의 신성력 수치: 2%]

[경고: 육체적 과부하로 인해 일시적인 마력 역류 현상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겨우 2%라.’


우진은 혀끝을 깨물며 덮쳐오는 어지러움을 억눌렀다. 현대 한국에서 무패 신화를 쓰던 엘리트 변호사 시절에도 피고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사흘 밤낮을 새우는 일은 허다했다. 이 정도 육체적 고통에 굴복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보다 시급한 것은 이 세계에서 자신이 유일하게 지켜야 할 피붙이들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우진은 시몬의 안내를 받아 마을 외곽의 낡고 허름한 목조 오두막으로 향했다. 썩어가는 판자 사이로 안개가 스며드는 그 비참한 집이, 바로 역사 왜곡의 누명을 쓰고 처형당한 기록관 아서의 남겨진 가족들이 숨어 사는 은신처였다.


조심스럽게 나무 문을 밀고 들어가자, 매캐한 약초 타는 냄새와 함께 차가운 서리가 가득한 방 안이 드러났다. 방 구석의 초라한 침상 위에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중년 여성 마리아가 깊은 혼수 상태에 빠져 있었고, 그 곁을 지키던 창백한 안색의 소녀가 인기척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오빠?”


갈색의 깊은 눈동자, 오빠인 레오를 빼닮아 영민해 보이는 이목구비. 하지만 그녀의 뺨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목에는 푸르스름한 저주의 낙인이 흉터처럼 새겨져 있었다. 레오의 여동생 한나였다.


“한나야.”


우진은 자신도 모르게 레오의 영혼이 가진 감정에 동조되어 목소리를 떨었다. 한나는 오빠의 모습을 보더니,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며 그의 품으로 안겨왔다.


“오빠, 진짜 살아 돌아온 거야? 재판소에서 오빠가 처형당할 거라는 소문을 듣고…… 내가, 내가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서……”


“괜찮다. 난 멀쩡히 살아 있어. 오히려 변호사로서 정식 발언권까지 얻어냈지.”


우진은 한나의 얇은 어깨를 다독이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그의 이성은 슬픔에 잠기는 대신, 차갑고 매섭게 작동하기 시작했다. 우진은 품속에서 ‘정의의 단안경’을 꺼내 왼쪽 눈에 착용했다. 지독한 두통이 다시 뇌를 찔렀지만, 그는 마력을 쥐어짜 한나의 전신을 스캔했다.


단안경의 렌즈 너머로 한나의 영혼 상태가 푸른색의 스펙트럼으로 도식화되어 나타났다. 그리고 그녀의 심장 부근을 스캔하는 순간, 우진의 호흡이 멎었다.


가냘픈 심장을 칭칭 동여매고 있는 것은 쇠사슬 모양의 시커먼 붉은 마력 실타래였다. 그것은 단순한 질병이 아니었다. 실타래의 끝은 허공으로 길게 뻗어 나가, 보이지 않는 성황청의 거대한 신성 결계와 연결되어 있었다.


[특수 분석: ‘여동생 한나의 저주받은 인과의 실’을 포착했습니다.]

[정보: 가문의 사법적 복권과 진실 기록을 막기 위해 성황청이 인위적으로 묶어둔 고위 인과율 왜곡 저주입니다. 매달 가문의 생명 마력을 강제로 빨아들여 성황청의 제단으로 송신합니다.]


‘이런 악랄한 놈들.’


우진의 눈에 서늘한 살기가 감돌았다. 성황청은 아버지를 처형한 것도 모자라, 남겨진 자식들의 영혼까지 인과율의 노예로 묶어두고 서서히 말려 죽이고 있었던 것이다. 가문이 법적으로 완벽하게 복권되지 않는 한, 이 저주는 절대로 풀리지 않는 구조였다.


우진은 자신의 손끝에 정의의 신성력을 미세하게 모았다. 어떻게든 이 실타래를 조금이라도 끊어내고 싶었다.


“한나야, 잠시만 가만히 있어라.”


우진이 한나의 가슴팍에 손을 얹고 신성력을 주입하려 시도한 순간이었다.


지직! 파앗!


“아아악!”


한나가 심장을 쥐어짜며 비명을 질렀고, 그녀의 목에 새겨진 저주 낙인이 핏빛으로 붉게 타올랐다. 우진의 신성력이 닿자마자 저주의 실타래가 광폭하게 반응하며 한나의 심장을 조여버린 것이었다. 한나의 입술이 순식간에 파랗게 질리며 숨을 쉬지 못했다.


[경고! 인과의 저주에 대한 직접적인 무력/신성 정화 시도는 강력한 반동을 유발합니다. 피고인의 완전한 사법적 무죄 판결과 역사 복원을 통해서만 정화가 가능합니다.]


“형! 당장 멈춰! 한나가 죽어!”


시몬이 경악하며 우진의 팔을 잡아끌었다. 우진은 즉각 신성력 주입을 중단했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내 힘을 직접 주입하는 건 불가능한가. 법정 밖의 얄팍한 마법적 힐링 따위로는 이 사법적 저주를 깰 수 없다는 뜻이군.’


우진은 자신의 오판을 인정하고 즉각 전술을 바꿨다. 그는 품에서 여사제 아이린이 제공했던 ‘아스트레아의 성수 병’을 꺼냈다. 투명한 유리병 속에서 푸른빛의 성수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우진은 성수 한 방울을 한나의 입술에 떨어뜨렸다.


스으으으…….


정의의 여신의 가호가 깃든 성수가 한나의 목구멍으로 넘어가자, 폭주하던 붉은 저주의 불꽃이 일시적으로 진정되며 푸른 안개 속으로 가라앉았다. 한나의 호흡이 서서히 돌아왔고, 창백하던 뺨에 아주 미세한 붉은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하아, 오빠. 방금 내 심장이 타들어 가는 줄 알았어. 하지만 지금은 아주 따뜻해.”


한나가 겨우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우진은 안도하면서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굳건한 투지로 벼려냈다.


‘성황청과의 사법적 인과 자체를 깨부수지 않으면 한나도, 어머니도 결국 소멸한다. 에드워드 4세의 재판에서 반드시 승리해 대량의 신성력을 얻고 가문의 명예를 복원해야만 해.’


그때, 침상에 누워 있던 어머니 마리아가 미세하게 신음을 흘리며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아서…… 일지는…… 지하 기록실…… 그 비밀스러운 돌 뒤에…… 기록관의 언어로……”


혼수 상태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내뱉는 어머니의 말에 우진의 지성이 번뜩였다.


‘기록관의 언어? 지하 기록실의 돌 뒤?’


우진은 즉각 레오의 기억 파편들을 맹렬하게 대조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역모죄로 처형당하기 직전, 어린 레오에게 남겼던 수수께끼 같은 말이 뇌리를 스쳤다.


‘가장 어두운 진실은 빛이 닿지 않는 바닥 밑에 묻히고, 법의 눈은 침묵의 돌 뒤에서 세상을 본다.’


우진은 무릎을 탁 쳤다. 그것은 기록관 가문 특유의 암호화된 이중 언어였다.


‘지하 기록실…… 내가 머물던 임시 거처의 바닥 벽돌 중 하나다. 침묵의 돌이라는 것은 법정의 배심원 석상을 마주보는 방향의 벽돌을 뜻하는 거였어!’


마침내 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숨겨둔 진짜 역사 검열 일지, 즉 ‘아서의 숨겨진 비밀 일지 위치’의 단서를 완벽하게 해독해 낸 순간이었다. 그 일지만 있다면 성황청이 에드워드 4세의 역사를 어떻게 왜곡했는지 증명할 결정적인 스모킹 건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오두막 밖의 서리 덮인 안개 속에서 불길한 기척이 느껴졌다.


저벅, 저벅, 저벅.


무거운 강철 장화가 얼어붙은 흙바닥을 밟는 소리. 그리고 붉은색 마력의 파동이 안개를 찢으며 오두막 주변을 휩쓸기 시작했다. 안토니오 사제가 보낸 순찰 사제단이 마을을 수색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레오 형! 사제들의 감시망이 여기까지 좁혀왔어! 어쩌지? 여기서 들키면 무단 외출 및 이단 공모죄로 즉각 처형이야!”


시몬이 사색이 되어 우진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밖에서 붉은 마력 탐지 오라가 창문 틈새로 스며들어 방 안을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우진은 차갑게 가라앉은 안광을 빛내며 고대 법률가의 반지를 낀 손가락을 쥐었다. 직접적인 무력 충돌은 자살 행위였다. 우진은 남은 신성력을 쥐어짜 아이린의 ‘진실의 빛’ 마력을 미세하게 전개했다. 은백색의 정화 오라가 오두막 내부의 공기를 감싸며, 외부에서 스며드는 붉은 탐지 오라의 주파수와 완벽하게 동조(Sync)를 이루었다.


스으으으…….


마치 안개와 하나가 된 것처럼, 오두막 내부의 마력 반응이 외부 탐지기에는 완벽한 무(無)의 상태로 감지되었다.


창밖으로 붉은 로브를 걸친 사제 세 명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오두막 문 앞을 지나쳐 갔다. 그들이 들고 있는 마력 탐지 보주가 격렬하게 회전했으나, 우진의 정교한 주파수 동조 덕분에 아무런 경보도 울리지 않았다. 사제들의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방 안에는 팽팽한 긴장감과 숨소리만이 맴돌았다.


후우.


우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단안경을 벗었다. 극도의 긴장과 마력 소모로 인해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왔다.


“한나야, 어머니를 잘 부탁한다. 내가 반드시 진짜 일지를 찾아내 가문의 누명을 벗기고 이 저주를 끊어내마.”


“응, 오빠. 조심해야 해. 난 언제나 오빠를 믿어.”


한나가 오빠의 손을 꼭 쥐며 다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진은 시몬을 재촉해 오두막을 빠져나왔다. 이제 아버지가 숨겨둔 비밀 일지를 확보하기만 하면 사흘 뒤의 재판에서 안토니오와 펠릭스의 목을 완벽하게 조일 수 있었다.


하지만 재판소 지하 기록실로 향하는 비밀 통로로 들어서기 직전, 우진은 레오의 기억 속에서 가장 거대하고 어두운 장벽의 정체를 떠올렸다.


아버지가 비밀 일지를 숨겨두었다고 증언한 지하 기록실의 특정 벽돌 뒤 공간. 그곳은 단순한 지하 벽이 아니었다. 그 구역은 성황청이 강력한 마법적 봉인과 결계를 쳐두고 고위 기록관 외에는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는 금역,


바로 ‘금지된 기록 보관소(Forbidden Archive)’의 내부 경계선 너머였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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