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밖의 수사선과 기술적 파트너
“본 법정은 원고 대리인의 문서 감정 청구를 받아들여, 앞으로 24시간 동안 휴정을 선언합니다.”
쿵! 쿵! 쿵!
임시대행 재판관 오스카의 판사봉이 엄숙하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와 함께 명계 변방 재판소의 거대한 석조 문이 무겁게 열렸다. 피고석에 서 있던 사벨라 변호사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진 은빛 혀 반지는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계약서 밑바닥에 숨겨진 위조범 라울의 흑마법 주파수가 한우진의 ‘정의의 단안경’에 의해 백일하에 드러난 탓이었다.
“두고 보자, 레오 변호사. 감히 성황청의 무결한 직인을 모독한 대가는 뼈아플 것이다.”
사벨라는 살기 어린 눈빛을 쏘아붙이고는 바르가스 자작과 함께 서둘러 법정을 빠져나갔다. 우진은 흘러내리는 코피를 가볍게 닦아내며 변호인석 탁자를 짚었다. 단안경을 무리하게 가동해 라울의 주파수를 스캔한 여파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현재 그의 신성력은 1% 내외. 이대로 다음 공판에 나섰다간 인과의 반동으로 영혼이 소멸할 터였다.
“변호사님, 정말 대단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들이 24시간 동안 가만히 있을 리 없습니다.”
서기석에서 달려온 시몬이 우진을 부축하며 조바심을 냈다. 우진은 냉혹한 이성을 유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저들은 법정 밖에서 증거를 인멸하거나 우리를 물리적으로 제거하려 들겠지. 발레리아, 사무소 주변의 경계를 극상으로 끌어올려라.”
“명령을 받듭니다. 제 검이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변호사님의 영역을 침범하게 두지 않겠습니다.”
은빛 갑옷을 걸친 호위 기사 발레리아가 검자루를 꽉 쥐며 비장하게 답했다. 우진은 곧바로 마담 클레어의 살롱 지하에 마련된 임시 사법 사무소로 향했다. 24시간이라는 짧은 휴정 시간 동안, 자작가가 제출한 계약서의 마법적 위조 정황을 완벽하게 증명할 ‘공인 과학 감정 보고서’를 완성해야만 했다.
사무소 지하 밀실에 도착하자, 파란색 마법사 로브를 입은 천재 소년이 허공에 둥근 홀로그램 마법 서식을 띄워놓고 수식을 계산하고 있었다. 우진이 이번 소송을 위해 영입한 계약 마법의 천재 마법 학도, 아이작(Isaac)이었다.
“오셨어요, 변호사님? 법정 소식은 들었어요. 사벨라의 그 오만한 코대를 꺾어놓으셨다면서요?”
아이작이 특유의 영민한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우진은 품에서 복사해 온 자작가의 계약서 마법 사본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잡담은 시간 낭비다, 아이작. 이 계약서에 각인된 라울의 위조 마법진을 수학적으로 완벽하게 분해해야 한다. 법정의 배심원 석상들은 단순한 심증이 아니라, 위조가 불가능한 과학적 수식과 물증에만 반응하니까.”
“흐음, 계약 마법진의 기하학적 구조를 깨뜨려라…… 재미있겠네요. 마법도 결국 수식과 규칙의 지배를 받는 법이니까요.”
아이작은 즉시 자신의 ‘계약 분석용 단안경’을 고쳐 쓰며 계약서 사본을 마법 홀로그램으로 공중에 띄웠다. 그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파란색 마력 입자들이 계약서의 복잡한 마법 기하학 수식들을 실시간으로 분해하기 시작했다.
그때, 밀실의 문이 열리며 초록색 머리를 헝클어뜨린 여성이 들어왔다. 변방 연금술 길드 소속의 일류 연금술사, 엘레나(Elena)였다. 그녀는 항상 시약 얼룩이 묻은 가운을 입고 까칠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물질 분석에 있어서는 독보적인 실력자였다.
“비켜봐, 애송이. 마법진만 들여다본다고 진실이 나오는 줄 알아? 이 양피지에 스며든 잉크의 성분부터 분석해야지.”
엘레나는 자작가의 계약서 표면에 특수 시약을 떨어뜨렸다. 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잉크의 미세한 성분들이 분리되기 시작했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이 계약서에 사용된 잉크에는 시간을 인위적으로 비틀어 문서를 수십 년 전의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시간 왜곡 마력’의 미세한 흔적이 남아있어. 라울 그 곱추 늙은이가 쓰는 전형적인 위조 기법이지.”
엘레나가 ‘진실의 마법 현미경’을 들여다보며 신경질적으로 덧붙였다.
“좋은 흐름이다.”
우진은 자신의 왼쪽 눈에 ‘정의의 단안경’을 착용했다. 아이작의 분석 장비와 우진의 단안경이 마법적으로 동조하자, 공중에 투사된 위조 마법진의 스캔 속도가 비약적으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푸른빛의 수식들이 미친 듯이 나열되며 계약서의 왜곡 파형을 실시간으로 그려냈다.
“아앗!”
그 순간, 아이작이 마법진의 핵심 노드에 손을 대려다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계약서에 숨겨져 있던 시커먼 검붉은 마력 불꽃이 피어오르며 그의 손가락을 덮친 것이다. 자작가가 심어둔 역류 저주 마법(Backlash Curse)이었다.
“바보 같은 녀석! 함부로 만지지 말랬잖아!”
엘레나가 황급히 정화의 마나 정수를 아이작의 손에 뿌렸다. 아이작의 우측 손가락들이 일시적으로 마비되어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죄송해요, 변호사님…… 위조 마법진의 방어 체계가 생각보다 너무 강해요. 일반적인 해독법으로는 수식을 더 이상 전개할 수가 없어요.”
아이작이 고통스러운 듯 이빨을 악물며 말했다. 우진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을린 계약서를 내려다보았다.
“마법의 효과를 직접 힘으로 부정하려 하지 마라, 아이작. 계약이란 쌍방의 합의다. 그러나 한쪽이 기망(fraud)을 목적으로 마법적 장치를 숨겼다면, 그 계약은 성립 요건 자체를 상실한다. 현대 법학의 논리를 대입해라. 마법진 내부의 기하학적 설계 오류를 수학적으로 증명하는 거다. 적들이 억지로 수식을 맞추기 위해 왜곡한 그 ‘균열’을 찾아내.”
우진의 지적이고 명쾌한 설명에 아이작의 눈이 번쩍 뜨였다.
“기망에 의한 계약 무효……! 그래요, 억지로 수식을 맞추느라 마법진의 대칭 구조가 미세하게 일그러져 있어요! 그 기하학적 오류를 공식화하면 역류 저주를 우회할 수 있어요!”
아이작은 마비된 손가락의 통증도 잊은 채, 다시 왼손으로 마법 서식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엘레나 역시 특수 시약들을 아낌없이 소모하며 잉크 속 라울의 마력 주파수를 분리해 도식화했다.
한편, 사교계 살롱 외부의 정원.
밀짚모자를 깊게 눌러쓴 늙은 정원사 벤(Ben)은 굽은 허리로 묵묵히 전정가위를 놀리고 있었다. 장미 넝쿨을 다듬는 그의 손길은 평화로워 보였지만, 그의 매서운 눈빛은 사방의 미세한 공기 흐름을 쫓고 있었다.
바스락.
정원 외곽의 수풀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일반인이라면 바람 소리로 치부했겠지만, 과거 수많은 전장을 누볐던 은퇴한 무인 벤의 감각은 속일 수 없었다. 자작가가 보낸 정예 밀정들이 살롱 내부로 침투해 아이작의 분석 장비를 파괴하려 다가오고 있었다.
벤은 입가에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장미들이 손님을 반기지 않는군.”
벤이 바닥에 전정가위를 가볍게 내리찍자, 그가 정원에 심어두었던 식물 경보 결계가 소리 없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 밀정들의 발밑에서 장미 가시 넝쿨들이 뱀처럼 솟구쳐 올라 그들의 다리를 단단히 결박했다.
“윽……! 이 가시들이……!”
밀정들이 당황하여 단검을 뽑아 들려던 찰나, 이미 벤의 거구의 체구가 그들의 등 뒤에 도달해 있었다.
스윽, 서걱!
벤이 쥔 마법 강화 전정가위가 어둠 속에서 차가운 궤적을 그렸다. 단 한마디의 비명조차 새어 나오지 않았다. 벤은 소리 없이 쓰러진 밀정들의 신체를 정원 구석의 흙바닥으로 밀어 넣으며 밀짚모자를 고쳐 썼.
“조용히 묻히는 게 장미의 거름이 되는 길이지.”
완벽한 일상 보안이 유지되는 동안, 지하 밀실 내부의 분석은 절정에 달해 있었다.
“성공했어요! 변호사님!”
아이작이 환호성을 질렀다. 공중에 투사된 계약서의 위조 마법진이 수학적으로 완전히 해체되어 붉은색 오류 수식들로 가득 차 있었다. 라울이 조작한 마력 주파수와 자작가의 위조 행위가 완벽하게 도식화된 ‘공인 감정 보고서’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우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보고서 하단에 자신의 수석 변호인 서명을 남기려 깃펜을 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마법진의 흐름을 역추적하던 아이작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커멓게 질려갔다. 그의 눈동자가 공포로 격렬하게 흔들렸다.
“변호사님…… 이건, 이건 단순한 서명 위조 계약서가 아니에요.”
“무슨 뜻이지?”
우진이 깃펜을 멈추고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아이작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마법진의 가장 깊은 코어 부분을 가리켰다.
“이 위조 마법진의 종착지는 자작가의 금고가 아니에요. 계약이 유지되는 한…… 크리스 가문의 영지와 영지민 수천 명의 생명 마력 자체를 실시간으로 빨아들이는 거대한 빨대(Siphon) 장치예요. 그리고 그 마력이 흘러 들어가는 최종 목적지는…… 바르가스 자작가가 아니라, 성황청 서부 대성당(Western Cathedral of Holy See)의 중앙 제단이에요!”
밀실 내부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단순한 영주와 사제 개인의 탐욕인 줄 알았던 비리의 배후에, 성황청이라는 거대한 신권 제국의 추악한 영혼 수확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우진은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붉게 빛나는 보고서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가에 냉혹한 미소가 걸렸다.
“성황청이 직접 꽂아둔 빨대라…… 사벨라 변호사, 당신들이 감추려던 추악한 진실이 바로 이것이었군.”
우진은 망설임 없이 보고서 위에 자신의 은빛 사법 서명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마침내 제국의 신권을 정면으로 무너뜨릴 가장 강력한 스모킹 건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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