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의 혀를 가진 변호사
명계 변방 재판소(Local Soul Court)의 무겁고 침침한 공기는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차가웠다. 높게 솟은 천장 아래, 어둠 속에 반쯤 묻힌 거대한 해골 석상들이 배심원석에서 법정 중앙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석상들의 빈 안광에서 흘러나오는 푸르스름한 영혼의 불꽃이 석조 바닥에 길고 기괴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재판석 중앙에는 흰 수염을 단정하게 기른 오스카 판사가 엄숙한 표정으로 판사봉을 쥔 채 앉아 있었고, 서기석의 시몬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깃펜을 고쳐 쥐었다.
“명계 변방 재판소 제1심 법정을 개막합니다.”
오스카 판사의 선언과 함께 법정의 육중한 철문이 닫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오늘의 소송은 젊은 소영주 크리스의 가문을 파멸시키고 영지민들의 영혼을 갈취한 바르가스 자작을 상대로 한 ‘영혼 구속 무효 소송’이었다. 원고석에는 창백한 안색의 크리스가 앉아 있었고, 피고석에는 오만한 미소를 지은 바르가스 자작이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작의 옆, 피고 변호인석에는 화려한 보석이 촘촘히 박힌 검은색 법복을 입은 여인이 서 있었다. 날카롭게 위로 치켜 올라간 눈매, 뱀을 연상시키는 매혹적이면서도 잔혹한 미소. 변방 재판소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는 자작가의 전속 사법 해결사, 사벨라(Sabella)였다.
사벨라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법복에 장식된 은빛 장신구들이 부딪치며 묘한 금속음을 냈다. 그녀의 오른손 검지에는 푸른빛을 머금은 설전의 은빛 혀 반지가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존경하는 재판관님, 그리고 신성한 율법의 목격자이신 배심원 여러분.”
사벨라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법정 내부의 차가운 공기를 부드럽게 녹여내듯 감미롭고 우아했다. 하지만 한우진은 그 목소리 기저에 흐르는 기괴한 마력의 파동을 직감했다.
‘기만의 변론술(Deceptive Pleading).’
단순한 화술이 아니었다.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감정을 조작하는 교묘한 정신 간섭 마법이었다.
“원고 크리스는 바르가스 자작 각하께서 강압과 허위 기소로 영지를 빼앗고 선대 영주의 영혼을 갈취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가련하고도 무지한 억지입니다.”
사벨라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그 가식적인 눈빛에는 영혼을 꿰뚫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선대 영주는 평생 영지를 방만하게 경영했습니다. 무리한 광산 개발로 가문은 막대한 채무를 졌고, 영지민들은 굶주림에 신음했습니다. 자작 각하께서는 멸문 위기에 처한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 막대한 은화를 지원하셨고, 선대 영주는 그 대가로 스스로의 영혼과 영지의 소유권을 자발적으로 양도하는 조약서에 서명한 것입니다. 여기, 그 무결한 계약서 원본이 있습니다.”
사벨라가 품속에서 황금빛 신성 인장이 찍힌 양피지를 꺼내 허공에 띄웠다. 계약서 표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황금빛 오라가 법정을 환하게 비추었다.
“제국의 공인 직인과 선대 영주의 친필 서명이 담긴 이 계약서는 양방의 합의 하에 체결된 완벽한 합법적 문서입니다. 자작 각하께서는 법에 따라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셨을 뿐입니다. 오히려 원고는 가문의 부채를 탕감받고도 사후의 의무를 회피하기 위해 이 신성한 법정을 기만하고 있습니다!”
사벨라의 은빛 혀 반지가 강렬한 파동을 뿜어냈다. 목소리에 실린 기만의 마력이 법정 전체를 휩쓸었다.
그 순간, 배심원석에 서 있던 거대한 해골 석상들의 안광이 푸른빛에서 서서히 붉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법정 내부의 인과율이 사벨라의 궤변에 동화되어 우진과 크리스를 향해 적대적인 압박을 가해오는 전조였다.
“앗……!”
서기석의 시몬이 사벨라의 정신 간섭 마력에 노출되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손에 쥐고 있던 기록 펜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며 잉크가 사방으로 번졌다. 크리스 역시 숨이 막히는 듯 가슴을 움켜쥐고 비틀거렸다.
우진 역시 머리를 짓누르는 극심한 과부하를 느꼈다. 전날 밤의 여파로 신성력은 겨우 1.5% 수준에 불과한 극한의 상태. 관자놀이가 터질 것처럼 아파왔고 입안에서 비릿한 피맛이 맴돌았다.
‘감정적으로 대응하면 배심원들의 이성은 완전히 마비된다. 저 반지의 기만 오라를 먼저 상쇄해야 해.’
우진은 이빨을 악물며 왼쪽 손가락에 끼워진 고대 법률가의 반지를 책상 밑바닥에 가볍게 문질렀다. 반지에 자신의 남은 신성력을 미세하게 주입하자, 차갑고 맑은 은빛 서리 같은 정화의 오라가 우진의 전신을 감싸 안았다. 머릿속을 짓누르던 사벨라의 기만 마법이 유리창이 깨지듯 산산조각 나며 이성이 명징하게 돌아왔.
우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창백한 얼굴 위로 서늘한 안광이 빛났다.
“이의 있습니다(Objection).”
우진의 목소리가 법정의 진동을 뚫고 정적을 깨뜨렸다. 비록 몸은 만신창이였으나, 그의 목소리에는 명계의 수석 변호인으로서의 엄숙한 권위가 실려 있었다.
“피고 대리인은 화려한 화술로 본질을 흐리고 있습니다. 제국 사법령 제12조, 그리고 계약법의 대원칙에 따르면, 모든 계약은 쌍방의 자유의지와 정당한 절차적 무결성 하에 성립되어야 합니다. 피고 측이 제출한 저 계약서에는 치명적인 절차적 하자가 존재합니다.”
사벨라는 눈매를 가늘게 뜨며 우진을 쏘아보았다. 그녀의 은빛 반지가 불길하게 요동쳤다.
“하자가 존재한다고 하셨습니까, 레오 변호사? 제국의 수석 기록관이었던 당신의 아버지가 보증했던 공인 직인마저 부정하겠다는 무모한 허세로 들리는군요.”
“허세인지 아닌지는 증거가 말해줄 것입니다.”
우진은 품속에서 ‘정의의 단안경’을 꺼내 왼쪽 눈에 착용했다. 렌즈가 미세한 태엽 소리를 내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특수 분석: 피고 측 계약서의 마력 잔류 등고선을 투사합니다.]
[경고: 신성력 소모로 인해 왼쪽 안구에 극심한 피로가 가중됩니다.]
우진은 안구 속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극통을 견디며 마력을 단안경에 집중시켰다. 단안경의 렌즈 너머로 허공에 떠 있는 계약서 원본의 표면이 반투명하게 벗겨지며, 그 기저에 흐르는 마력의 왜곡 파형이 선명하게 도식화되어 나타났다.
선대 영주의 서명이 새겨진 계약서의 가장 밑바닥, 황금빛 제국 직인의 틈새로 아주 미세하고 기괴한 파동이 감지되었다. 그것은 성황청의 무결한 신성 마력이 아니었다. 검고 축축하며, 시간을 비틀어 억지로 조작해 낸 음산한 흑마법의 흔적이었다.
우진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3화에서 단안경으로 성황청 사료를 감정했을 때 느꼈던 그 기괴한 주파수, 그리고 그림의 만물상에서 보았던 위조 면죄부들에 새겨져 있던 그 특유의 마력 파동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다.
그것은 변방의 사법 체계를 뒤흔들며 성황청의 비호 아래 모든 위조 계약서를 전담해 온 음지의 대가, 흑마법사 라울(Raoul)의 고유한 위조 주파수였다.
우진은 단안경을 낀 채 사벨라를 똑바로 응시했다.
“사벨라 변호사. 당신이 완벽하다고 주장하는 그 계약서의 서명 날인 부분에…… 왜 역사 왜곡의 위조범, 라울의 흑마법 주파수가 새겨져 있는 것입니까?”
그 선언과 동시에, 사벨라의 오만한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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