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병상련의 의뢰인과 기획 소송
마담 클레어의 살롱 지하는 지상의 화려한 사교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두꺼운 석조 벽이 외부의 모든 소음을 차단했고, 벽면을 따라 흐르는 차단 결계는 성황청 성기사들의 신성 탐지 마법을 완벽하게 튕겨내고 있었다. 은은한 촛불 아래에서 한우진은 책상 위에 펼쳐진 바르가스 자작가의 기밀 장부를 내려다보았다.
왼쪽 눈에 착용한 ‘정의의 단안경’ 렌즈가 미세한 기계음을 내며 회전했다. 렌즈를 투과한 빛은 장부 가장 깊숙한 곳, 붉은 인장 아래에 숨겨진 잔혹한 인과율의 실타래를 가리키고 있었다. 황도 사법 대주교 일라리오의 서명. 우진의 전임자이자 이 몸의 아버지였던 아서를 죽음으로 몰고 가고, 가문 전체에 붉은 저주를 내린 진짜 흑막의 흔적이었다.
“일라리오 대주교…….”
우진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입안에서 비릿한 피맛이 맴돌았다. 전날 밤 안토니오 사제를 단죄하고 재판소 폭파 음모를 저지하는 과정에서 ‘인과적 무효화’를 시전한 반동이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탓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성은 그 어느 때보다 명징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똑똑.
무거운 석조 철문이 조용히 열리며 마담 클레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화려한 부채로 입가를 가린 채, 매혹적이면서도 긴장감이 서린 눈빛으로 우진을 바라보았다.
“변호사님, 귀한 손님이 찾아오셨어요. 당신과 아주 닮은…… 억울한 사연을 품은 영혼이랍니다.”
클레어의 뒤를 따라 밀실 안으로 들어선 사내는 한눈에 보기에도 초췌한 몰골이었다. 빛바랜 푸른색 귀족 복장을 걸치고 있었지만, 옷자락은 여기저기 헤어져 있었고 어깨는 깊은 절망감으로 짓눌려 있었다. 그의 갈색 눈동자에는 두려움과 실낱같은 희망이 뒤섞여 요동치고 있었다.
그는 우진을 보자마자 무릎을 꿇으려 했다. 우진이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지탱했다.
“의뢰인 분, 변호사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사내는 마른침을 삼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 제 이름은 크리스(Chris)입니다. 바르가스 영지 북부를 다스리던 소영주 가문의 후계자입니다. 변호사님, 제발 저희 가문과 영지민들을 구해 주십시오!”
크리스의 목소리에는 뼛속 깊은 한 서린 분노와 슬픔이 서려 있었다. 우진은 그를 의자에 앉히고 따뜻한 차를 한 잔 건넸다. 크리스는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쥐고 자신의 비극적인 사연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바르가스 자작과 성황청 서부 대성당이 공모했습니다. 그들은 저희 가문이 이단 서적을 은닉했다는 허위 기소장을 작성해 아버지를 종교 재판에 넘겼습니다. 아버지는 사후 세계의 단두대 앞에서도 결백을 주장하셨지만, 매수된 재판관 요한은 판결을 미루며 아버지를 고문했습니다. 결국 자작은 아버지가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틈을 타, 영지와 영지민들의 사후 영혼 소유권을 자신에게 양도한다는 조약서에 강제로 서명하게 만들었습니다.”
크리스가 품속에서 거칠게 구겨진 양피지 한 장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것이 그들이 강제로 서명하게 만든 ‘영지 양도 계약서 원본’입니다. 아버지는 서명 직후 영혼이 소멸하셨고, 저희 가문은 역모죄로 몰려 몰락했습니다. 이제 저마저 이단심문소에 끌려가 영혼이 찢길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변호사님, 이 불평등하고 부당한 계약을 파기할 방법이 없겠습니까?”
우진은 묵묵히 계약서를 바라보았다. 그는 왼쪽 눈의 정의의 단안경을 활성화했다. 관자놀이를 찌르는 듯한 미세한 통증과 함께, 단안경의 렌즈가 격렬하게 회전하며 계약서 표면을 스캔했다.
[특수 분석: 계약서 기저에 숨겨진 마법적 인과율을 탐지합니다.]
[경고: 계약서의 서명 란 하부에 미세한 ‘영혼 구속 마법진’이 은닉되어 있습니다. 서명자의 영혼 마력을 강제로 빨아들여 바르가스 자작가의 금광 동력원으로 영구 귀속시키는 악랄한 예속 계약입니다.]
렌즈 너머로 붉게 이글거리는 구속 마법진의 궤적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우진의 눈빛이 극도로 차가워졌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조수 시몬이 사시나무 떨듯 떨며 우진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변호사님, 이건 너무 위험합니다. 바르가스 자작은 변방 영지의 실질적인 군사력을 쥐고 있는 대귀족입니다. 게다가 그의 사적 기사단인 ‘바르가스 기사단’의 단장 제랄드는 무자비하기로 악명이 높습니다. 만약 자작을 상대로 정식 소송을 제기한다면, 재판이 열리기도 전에 자작의 기사들이 이 살롱 지하를 피바다로 만들 겁니다!”
시몬의 경고는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바솔로뮤 추기경의 체포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대귀족인 자작을 건드리는 것은 스스로 호랑이 굴로 걸어 들어가는 꼴이었다. 하지만 우진은 가볍게 콧방웃을 쳤다. 현대 한국에서 수많은 거대 기업과 권력자들을 법정에서 단죄했던 천재 변호사의 오만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렸다.
“시몬, 칼을 쥔 자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법보다 위에 있다고 믿지. 하지만 그 칼날을 휘두를 수 있는 명분 자체가 법에서 나온다는 사실은 망각하곤 해. 법정이라는 무대 위에 그들을 올려놓기만 하면, 그들이 자랑하는 대검은 한낱 고철 덩어리에 불과해진다.”
우진은 바르도의 고대 법전을 펼쳤다. 책장이 스스로 넘어가며 푸른빛의 고대 율법 조항들을 띄웠다. 우진은 제국의 민법과 고대 계약법 조항들을 머릿속으로 대조하기 시작했다.
현대 법학의 핵심 이론인 ‘기망과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의 취소’ 조항이 머릿속에서 마법적인 도식으로 변환되었다. 이세계의 고대 법률에도 동일한 맥락의 조항이 존재했다.
“제국 민법 제104조, 그리고 고대 사법령 제12조에 따르면, 사기나 강박, 혹은 허위 기소라는 불법적인 원인에 의해 체결된 영혼 소유 계약은 그 원천적 하자가 증명되는 즉시 소급하여 무효화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영혼 계약 법적 파기 절차’다.”
우진은 크리스를 똑바로 응시했다.
“크리스 씨, 당신은 가문을 살리기 위해 영혼을 걸 준비가 되었습니까?”
크리스는 잠시 주춤했으나, 이내 우진의 매서운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절대적인 확신을 보고 이빨을 악물었다.
“제 영혼뿐만 아니라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 그 위선자들의 목을 벨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좋습니다. 소송을 개시합니다.”
우진은 깃펜을 들어 양피지 위에 정교한 기소장을 작성해 내려갔다. 피고 바르가스 자작, 원고 소영주 크리스. 청구 취지는 강박에 의한 영지 및 사후 영혼 소유 계약의 원천 무효화 및 신분 복권.
기소장을 작성하는 동안 우진의 관자놀이에는 핏대가 섰고, 만성적인 두통이 뇌를 찔렀지만 그는 펜을 멈추지 않았다. 이 기획 소송은 단순히 크리스를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자작이 법정에 제출할 진짜 영토 조약서 원본의 밑바닥에 숨겨진 일라리오 대주교의 서명을 만천하에 드러내어, 대주교의 목을 벨 완벽한 사법적 단두대를 빌드업하는 첫걸음이었다.
기소장이 완성되자, 우진은 품속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수석 변호인의 문장을 찍어 봉인했다. 이제 남은 것은 이 소송 고지서를 자작에게 정식으로 송달하는 것이었다. 자작가의 철통같은 경비망을 뚫고 기소장을 전달해야 하는 난제가 남았다.
“그 일이라면 제게 맡겨 주십시오, 변호사님!”
밀실 구석의 그림자 속에서 영악한 눈빛을 지닌 소년이 걸어 나왔다. 우진의 전속 전령이자 날랜 발을 가진 소년 한스(Hans)였다. 한스는 자신의 보물인 ‘바람의 가죽 장화’를 탁탁 털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자작가의 경비 기사들이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있어도, 저 한스의 바람 같은 발걸음은 결코 잡지 못할 겁니다. 자작의 집무실 책상 위에 이 종이 조각을 정확하게 배달해 드리죠.”
우진은 한스의 어깨를 토닥이며 기소장을 건넸다.
“부탁한다, 한스. 몸조심해라.”
한스는 바람처럼 몸을 날려 살롱의 비밀 통로를 빠져나갔.
* * *
같은 시각, 바르가스 자작가의 화려하고 육중한 집무실.
자작은 콧수염을 만지며 값비싼 명계의 포도주를 들이켜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철갑 갑옷을 입은 기사단장 제랄드가 굳건히 서 있었다.
“자작 각하, 변방 재판소의 그 건방진 기록관 놈이 바솔로뮤 추기경의 체포령을 피해 마담 클레어의 살롱 지하에 숨어들었다는 첩보가 있습니다. 당장 기사단을 동원해 살롱을 쓸어버릴까요?”
자작은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클레어의 살롱은 황도의 눈귀가 닿는 곳이다. 무작정 칼을 휘두르면 곤란해. 어차피 쥐새끼처럼 숨어 있는 놈이다. 추기경의 사냥개들이 숨통을 조여 가면 스스로 기어 나와 목숨을 구걸하겠지.”
그때였다.
휘이이잉—.
창문 틈새로 미세한 바람이 불어오는가 싶더니, 자작의 책상 위에 가볍게 먼지가 내려앉았다. 자작과 제랄드가 검자루를 쥐며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열린 창문 너머로 밤하늘의 은빛 달빛만이 비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자작의 시선이 책상 중앙에 닿는 순간, 그의 동공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언제 놓였는지 알 수 없는, 눈부신 은빛 사법 인장이 찍힌 양피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명계 변방 재판소 공식 소송 고지서]
[피고: 바르가스 자작]
[원고: 소영주 크리스]
[혐의: 허위 기소 및 강박에 의한 영혼 소유 계약 조작]
자작은 고지서를 집어 들고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글자 하나하나가 그의 아킬레스건을 정확히 찌르고 있었다. 자작의 얼굴이 분노로 시커멓게 일그러졌다.
“이, 이 건방진 벌레 같은 놈들이…… 감히 나를 기소해? 대역죄인 가문의 핏줄 놈이 감히 대귀족인 나를 법정에 세우겠다고!”
자작은 광기 어린 포효와 함께 기소장을 두 동강으로 찢어발겼다. 찢어진 양피지 조각들이 바닥으로 휘날렸다. 제랄드가 메이스를 꽉 쥐며 살기를 뿜어냈다.
“각하, 지금 당장 기사단을 이끌고 가서 그 변호사 놈의 목을 베어 오겠습니다!”
“기다려라!”
자작이 제랄드를 제지했다. 분노 속에서도 그의 교활한 지성이 작동하고 있었다. 명계 법정의 규칙은 절대적이었다. 정식 소송이 접수된 이상, 피고가 재판을 무단으로 거부하거나 변호인을 사적으로 살해하면 법정의 신성불가침 결계가 자작가의 가문 전체를 이단으로 규정해 영혼을 소멸시킬 터였다. 합법적인 방패가 필요했다.
자작은 집무실 벽면의 비밀 문을 열고, 어둠 속을 향해 엄숙하게 선언했다.
“그녀를 불러와라. 변방 재판소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한 적 없는, 우리 가문의 전속 사법 해결사를.”
어둠 속에서 구두 굽 소리가 또각거리며 울려 퍼졌다.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눈매에 화려한 보석이 박힌 변호사 법복을 입은 여인. 뱀을 연상시키는 매혹적이면서도 잔혹한 미소를 지은 사벨라(Sabella)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녀의 손가락에는 상대의 말문을 막히게 만드는 ‘설전의 은빛 혀 반지’가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사벨라는 바닥에 찢어진 기소장 조각을 구두 굽으로 짓밟으며, 자작을 향해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자작 각하, 부르셨습니까? 변방의 그 가련한 벌레 한 마리가 드디어 제 발로 단두대를 짜 들고 기어 왔군요.”
그녀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은빛 반지를 어루만졌다.
“걱정 마십시오. 법정이라는 무대 위에서, 그 건방진 변호사 놈의 영혼을 한 조각도 남김없이 짓밟아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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