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심문관 헤르만의 덫
치이이익—!
살점이 타들어 가는 지독한 냄새와 함께, 우진의 손가락 끝에서 시붉은 성화(Holy Fire)의 불꽃이 튀었다. 극심한 고통이 말초신경을 타고 뇌리를 찔렀지만, 우진은 신음 한 자락 흘리지 않고 한나의 머리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레오 형! 제발 손을 놓으십시오! 이단심문소의 불꽃입니다! 영혼까지 태워버릴 기운이라고요!”
옆에서 지켜보던 서기 시몬이 경악하며 우진의 손을 떼어내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차가운 눈빛으로 시몬을 제지하며, 머리핀 주위를 맴도는 붉은 마력의 주파수를 응시했다.
이단심문관 헤르만.
성황청의 가장 잔혹한 도살자이자, 사법 대주교 일라리오의 숨겨진 칼날. 그 미치광이가 마침내 우진의 가장 취약한 약점인 여동생 한나를 인질로 잡은 것이다.
탁자 위에는 머리핀과 함께 배달된 핏빛 밀서가 놓여 있었다. 밀서 표면에는 이단심문소의 공식 직인과 함께, 헤르만의 서늘한 전언이 새겨져 있었다.
[에드워드 4세의 폭군 누명 재판 소송을 즉각 취하하라. 사흘 뒤 최종 공판일까지 소송 취하서가 접수되지 않는다면, 네 여동생 한나는 이단 제단 위에서 성화의 제물로 바쳐질 것이다.]
“어떡해…… 어떡합니까, 형.”
시몬이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
“상대는 이단심문소입니다. 제국의 그 어떤 귀족도, 심지어 황실조차 그들이 ‘이단’이라 낙인찍은 자를 함부로 비호하지 못합니다. 한나의 목에 ‘이단의 쇠사슬’이 채워졌다면, 이미 판결이 내려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당장 에드워드 4세의 소송을 취하해야 합니다!”
“소송을 취하하라고?”
우진이 피가 배어 나오는 입술을 깨물며 나지막이 되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서늘할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예! 한나의 목숨이 걸려 있지 않습니까! 저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고 한나를 구해야 합니다!”
“어리석은 소리.”
우진의 차가운 일갈에 시몬이 헙 하고 숨을 들이켰다.
“납치범의 요구를 고스란히 들어주는 협상가는 스스로 목줄을 넘겨주는 것과 같다. 내가 소송을 취하하는 순간,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법적 방패인 ‘사법적 면책권’은 소멸한다. 그 뒤에 헤르만이 약속을 지켜 한나를 풀어줄 것 같나? 아니, 방패가 사라진 우리 가문 전체를 이단으로 몰아 흔적도 없이 불태워버릴 거다.”
현대 한국에서 거대 기업의 납치 협박 사건을 수십 번이나 해결했던 천재 형사 변호사로서의 기억이 우진의 머릿속에서 냉혹하게 작동하기 시작했다. 적이 인질을 잡았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동요하지 않는 것이다. 감정적인 폭주는 협상 테이블에서 가장 빠른 패배를 자초할 뿐이다.
우진은 왼쪽 눈가로 손을 가져가 ‘정의의 단안경’을 고쳐 썼다. 전날 밤 제국 헌법 제3조를 강제로 발동하느라 남은 신성력은 단 0.1% 미만의 극단적인 방전 상태. 관자놀이가 깨질 듯한 극통과 함께 시야가 붉게 흔들렸지만, 우진은 마력을 쥐어짜 머리핀을 정밀 스캔했다.
단안경의 렌즈 너머로 머리핀에 잔존하는 마력 스펙트럼이 도식화되어 나타났다.
한나의 몸속에 흐르는 ‘붉은 저주의 피’가 납치 당시의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역류한 흔적이 선명했다. 하지만 그 고통스러운 저주의 파동 속에서도, 한나의 자아는 꺾이지 않고 굳건한 매듭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녀석, 울지 않았군.’
우진의 가슴 한구석이 아릿하게 조여왔다. 한나는 납치당하는 순간에도 오빠인 우진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가문의 비밀인 저주의 피가 폭주하는 것을 이빨을 악물고 억누르며 버틴 것이다. 오빠가 자신을 구하러 올 것임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으면서.
“기다려라, 한나야. 오빠가 곧 간다.”
우진은 머리핀을 소중히 품에 넣고, 탁자 위에 놓인 ‘바르도의 고대 법전’을 펼쳤다. 책 표지의 천칭 문양이 우진의 미세한 신성력에 반응해 희미한 은백색 광휘를 뿜어냈다.
“발레리아.”
“예, 변호사님.”
기록실 구석에서 검에 균열이 간 채 침묵을 지키던 호위 기사 발레리아가 한 걸음 나섰다. 그녀의 눈동자 역시 이단심문소의 비열한 행태에 대한 무인으로서의 끓어오르는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이단심문관 헤르만이 기소 절차를 무시하고 사적으로 인질극을 벌였다. 이단심문소 내부 규정 중에 그들의 폭거를 법적으로 가로막을 조항이 분명히 존재할 거다. 바르도의 기록을 추적해라.”
우진의 명령에 법전의 책장들이 스스로 빠르게 넘어가기 시작했다. 마도서의 정령이 푸른 마력 입자를 휘날리며 허공에 글자를 새겼다.
스르륵, 슥.
[성황청 종교 재판 특별 조례: ‘이단 기소 방어 규정’ 제12조]
[내용: 이단심문관이 피고인을 이단 혐의로 정식 구금하거나 기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3인 이상의 독립된 성직자의 증언이나 명백한 이단 마법적 물증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를 위반한 자의 신변 확보는 사법적 정당성이 없는 ‘불법 납치 및 구금’으로 규정하며, 고등재판소의 즉각적인 탄핵 대상이 된다.]
우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차갑고 날카로운 변호사의 미소였다.
“찾았다. 헤르만, 네놈이 제아무리 무소불위의 도살자라 할지라도 성황청의 공식 집행관인 이상, 스스로 만든 법률의 그물망을 완전히 찢어발길 수는 없다.”
헤르만은 우진을 굴복시키기 위해 안개의 마을 네펠을 기습하고 한나를 무단으로 납치했다. 증인도, 이단 물증도 없이 오직 블랙메일(협박)만을 목적으로 저지른 사법적 폭거. 이는 이단심문소 스스로의 존립 근거를 부정하는 명백한 ‘직권남용 및 불법 구금죄’였다.
“시몬. 깃펜을 들어라.”
우진이 서늘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예? 예, 형! 소송 취하서를 작성할까요?”
“아니.”
우진은 고대 법률가의 반지를 낀 손으로 탁자를 강하게 내리쳤다.
“역기소장(Countersuit)을 작성한다.”
“역기소장이라고요……?”
시몬과 발레리아, 그리고 라우라의 눈이 동시에 크게 흔들렸다.
“피고인은 이단심문관 헤르만. 죄명은 직권남용, 불법 구금, 그리고 에드워드 4세 재판에 대한 사법 방해죄다. 헤르만의 불법 납치 행위를 명계 변방 재판소와 종교 법정에 정식으로 기소한다.”
“형, 미쳤습니까!”
시몬이 깃펜을 떨어뜨리며 비명을 질렀다.
“이단심문관을 기소한다고요? 명계 역사상 그런 전례는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신의 대리인으로서 심판을 내리는 자들이지, 심판을 받는 자들이 아닙니다!”
“전례가 없다면 내가 만들면 된다.”
우진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형형한 안광을 뿜어내며 말을 이었다.
“저들이 신의 이름으로 법을 집행한다면, 그 법을 어긴 자 역시 신의 이름으로 단죄받아야 마땅하다. 헤르만은 사법적 절차를 완전히 짓밟고 사적 이익을 위해 인질극을 벌였다. 이는 명계 사법 체계 전체에 대한 선전포고다. 내가 소송을 취하하는 순간 우리는 패배하지만, 역기소장을 던지는 순간 판은 ‘한나의 이단 재판’이 아닌 ‘헤르만의 직권남용 재판’으로 전환된다.”
우진은 바르도의 법전 위로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아주 미세한 은백색 신성력이 양피지 위로 스며들며, 헤르만의 죄상을 조목조목 찢어발기는 역기소장의 초안을 새겨나갔다.
“헤르만은 내가 동생의 목숨 때문에 두려움에 떨며 무릎을 꿇을 거라 확신하고 있겠지. 그 오만이야말로 네놈의 목을 벨 가장 완벽한 올가미가 될 것이다.”
우진은 완성된 역기소장을 정성스럽게 접어 붉은 왁스로 봉인한 뒤, 고대 법률가의 반지를 찍어 푸른빛의 사법적 낙인을 새겼다.
“헤르만이 보낸 전령을 불러라. 소송 취하는 없다. 한나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상하는 순간, 네놈은 이단심문관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명계 최초로 피고인석에 서서 영혼이 소멸당할 것이라는 기소장을 전해라.”
지하 기록실의 차가운 석벽 사이로 우진의 서늘한 선언이 무겁게 울려 퍼졌다. 절망과 공포로 가득 차 있던 방 안의 공기가, 천재 변호사가 전개한 사법적 역공의 서늘한 투지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한나의 머리핀에 서린 붉은 불꽃이, 이제는 헤르만의 목을 겨누는 차가운 칼날로 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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