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로된 자객, 법정의 판도가 뒤집히다
명계 변방 재판소의 아침은 평소보다 더욱 음산한 냉기로 가득 차 있었다. 천장 높이 솟은 거대한 해골 석상들의 안구에서는 옅은 붉은빛이 흘러나와 법정 내부의 어둠을 기괴하게 밝히고 있었다. 방청객 석에 앉은 망령들은 숨을 죽인 채 법대 위를 올려다보았고, 무거운 침묵만이 사방을 짓눌렀.
기소인 석에 앉은 하급 사제 안토니오는 입가에 번지는 거만한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화려한 보석이 박힌 사제복을 매만지는 그의 손끝은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승리의 희열 때문이었다. 그는 단상 위의 요한 재판관을 향해 은밀하고 비굴한 눈빛을 보냈다. 요한 역시 뚱뚱한 턱을 괴고는 지루하다는 듯 하품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의 무언의 합의는 이미 끝난 상태였다.
안토니오는 확신하고 있었다. 전날 밤, 자신이 보낸 명계 최고의 독약 살수 브루노가 그 건방진 기록관 놈의 영혼을 ‘레테의 눈물’로 흔적도 없이 녹여버렸을 것이라고. 변호인이 사라진 재판은 기각되거나 피고인의 유죄로 자동 종결될 터였다. 폭군 에드워드 4세의 영혼을 강제 소멸시키고, 그가 가졌던 고대의 마력을 흡수해 자신의 신성력을 증폭시킬 생각에 안토니오의 가슴이 가쁘게 들썩였다.
“재판관님.”
펠릭스 검사가 단정한 성황청 검사복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청색 마력이 서류철 주변을 은은하게 감싸고 있었다.
“변호인 레오가 정해진 공판 시각이 지났음에도 입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피고인 측이 변론을 포기한 것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사법령 제45조에 의거, 즉각 선고 재판을 진행하여 피고인 에드워드 4세의 영혼 소멸형을 확정해 주시기를 청구합니다.”
요한 재판관이 기다렸다는 듯 판사봉을 들어 올렸다.
“검찰 측의 청구는 타당하다. 변호인의 무단 불출석으로 인해—”
콰아아앙—!
그 순간, 재판소의 거대한 석조 철문이 굉음을 내며 좌우로 거칠게 열렸다. 들이닥친 차가운 바람이 법정 내부의 촛불들을 일제히 흔들었다. 모든 망령과 사제들의 시선이 입구로 향했다.
뿌연 먼지 안개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깡마른 체구의 사내.
해진 회색 사제복을 입고, 목에는 희미하게 붉은빛으로 타오르는 영혼 구속 쇠사슬 흔적을 남긴 채, 한우진이 법정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의 얼굴은 전날 밤 대역 인형이 파괴될 때 겪은 영적 반동으로 인해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걸음걸이 역시 전신 근육통으로 인해 다소 무거웠다. 하지만 그의 매서운 눈빛만큼은 얼음송곳처럼 차갑고 날카로웠다.
그의 뒤에는 은빛 갑옷 위에 검은 망토를 두른 여기사 발레리아가 장검을 쥔 채 든든하게 호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다른 한 손에는 온몸이 쇠사슬로 꽁꽁 묶인 채 피투성이가 된 사내가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
“……레오?”
안토니오가 벌떡 일어서며 비명을 지르듯 그의 이름을 뱉었다. 그의 탐욕스러운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흔들렸다. 살아 있을 리가 없는 놈이, 심지어 자신이 보낸 일류 자객을 개처럼 끌고 제 발로 법정에 걸어 들어온 것이다.
우진은 변호인석 탁자 앞에 서서 로브 자락을 가볍게 털었다. 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재판관님. 입정하는 길에 쥐새끼 한 마리가 끈질기게 발목을 잡아서 말입니다.”
“이, 이의 있습니다!”
펠릭스 검사가 당황하여 소리쳤다.
“재판의 신성한 법정에 정체불명의 죄인을 무단으로 끌고 들어오는 것은 명백한 법정 모독입니다! 당장 저 자들을 퇴정시켜 주십시오!”
“정체불명의 죄인이라니요, 펠릭스 검사.”
우진이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그는 발레리아에게 눈짓을 보냈다. 발레리아는 주저 없이 쇠사슬을 잡아채며 포박된 사내를 법정 한가운데의 석조 바닥으로 사정없이 내던졌다.
쿠웅!
바닥에 처박힌 사내의 가죽 마스크가 벗겨지며, 온몸에 독약 병을 주렁주렁 매단 음산한 얼굴이 드러났다. 방청객 석의 망령들 사이에서 거대한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
“저 자는…… 명계의 독약 살수 브루노가 아닌가!”
“독약 살인마가 왜 여기에……!”
요한 재판관이 식은땀을 흘리며 판사봉을 다급하게 두드렸다.
“정숙하라! 정숙! 변호인 레오, 당장 이 기괴한 행동에 대해 해명하라! 그렇지 않으면 변호사 자격을 박탈하고 즉각 감옥으로 보내겠다!”
“해명해 드리지요.”
우진은 품속에서 붉은 밀랍으로 봉인된 양피지 서신을 꺼내 들었다.
“어젯밤, 피고인 에드워드 4세의 무죄를 입증할 결정적 증거를 인양하던 본 변호인의 임시 거처에 기습이 있었습니다. 여기 누워 있는 브루노가 치명적인 독약 ‘레테의 눈물’을 들고 제 영혼을 소멸시키려 침투했지요. 하지만 제 호위 기사의 헌신으로 자객을 생포했고, 그의 품에서 아주 흥미로운 물증을 확보했습니다.”
우진이 밀서를 높이 치켜세우자, 안토니오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어갔다.
“이 밀서에는 본 변호인을 암살하라는 구체적인 지령과 함께, 거액의 대가 지불 약속이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진은 왼쪽 눈가로 손을 가져가 옷소매 속에 숨겨두었던 ‘정의의 단안경’을 착용했다. 째깍거리는 태엽 소리와 함께 단안경이 활성화되었다. 그의 남은 신성력 수치는 단 1.5%. 뇌를 찌르는 듯한 극심한 두통이 밀려왔지만, 우진은 이빨을 악물고 마력을 쥐어짜 단안경의 스캔 광선을 밀서 표면에 투사했다.
이윽고, 밀서의 붉은 봉인 위로 은백색의 마력 홀로그램이 반사되어 법정 허공에 거대하게 펼쳐졌다. 정교하게 얽힌 신성 마력의 지문과 독특한 주파수 문양이 공중에서 선명하게 빛났다.
“이 밀서에 새겨진 마력 각인은 기소인 안토니오 사제, 바로 당신의 고유한 신성 마력 주파수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법정 전체가 물을 끼얹은 듯 침묵에 휩싸였다.
“안토니오 사제. 당신은 사법적 패배를 감추고 진짜 역사의 기록을 인멸하기 위해, 법정 외부에서 변호인을 물리적으로 제거하려 했습니다. 이는 명계 사법령 제12조에 규정된 ‘재판 방해 및 살인 교사’에 해당합니다. 본 변호인은 기소인 안토니오를 살인 교사 죄명으로 이 법정에 정식 기소합니다!”
“이, 이의 있습니다! 터무니없는 모함입니다!”
펠릭스 검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저 밀서 자체가 변호인 측에 의해 위조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자객 브루노의 증언 역시 협박에 의한 거짓일 수 있습니다!”
“위조라니요.”
우진은 차갑게 웃으며 품속에서 또 다른 두꺼운 장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안토니오가 자신의 비밀 금고에 보관하고 있던 ‘안토니오의 뇌물 장부’였다.
“그렇다면 이 장부도 위조된 것입니까? 이 장부 첫 장에 새겨진 안토니오 사제의 마법 보안 인장과, 저 밀서에 찍힌 마력 각인을 실시간으로 대조해 보십시오. 단안경의 스캔 수치는 소수점 아래 한 자리까지 완벽한 동일성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진이 단안경의 렌즈를 조율하자, 허공의 홀로그램 장부 페이지와 밀서의 마력 각인이 겹쳐지며 눈부신 푸른빛의 정합 반응을 뿜어냈다. 100% 일치한다는 법정 시스템의 신호였다.
“더불어, 이 장부에는 안토니오 사제가 요한 재판관님께 정기적으로 전달한 은화의 액수와 영혼 거래 내역이 아주 상세히 기록되어 있더군요. 거래 날짜마다 요한 재판관님의 개인 마력 수인까지 친절하게 찍혀서 말입니다.”
“끄윽……! 이, 이 자가……!”
요한 재판관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질 듯 흔들렸다. 그의 비굴한 비리가 만천하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쿠구구구구—!
법정 사방의 거대한 해골 배심원 석상들이 분노 어린 진동을 울렸다. 그들의 안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진홍색 안광이 요한 재판관과 안토니오를 매섭게 내리눌렀. 법정의 절대적인 시스템이 그들의 위증과 부패를 공식적인 사실로 인지한 것이다.
“요한 재판관은 사법적 공정성 의무를 위반하고 기소인과 유착했음이 증명되었습니다. 제국 사법 규정 제8조에 의거, 즉각 재판관의 자격 정지 및 탄핵을 요청합니다!”
우진의 단호한 선언에 요한은 더 이상 판사봉을 쥘 힘조차 잃고 법대 위로 엎어졌다. 배심원 석상들의 위압적인 마력 사슬이 요한의 어깨를 짓누르며 그를 재판석 아래로 끌어내렸다.
그때, 법정 구석에 묵묵히 앉아 있던 엄숙한 풍채의 노년 판사, 오스카가 천천히 일어섰다.
“요한 재판관의 사법 비리가 엄격한 물증을 통해 입증되었으므로, 본 법정의 수석 재판관인 내가 이 재판의 대행을 맡아 판결권을 즉각 인수하겠다.”
오스카 판사가 법대 중앙에 서서 묵직한 판사봉을 쥐었다. 안토니오는 사법적, 정치적 목숨이 완벽하게 끊어졌음을 직감했다. 그의 기름진 얼굴이 공포와 광기로 일그러졌다.
“레오……! 네 이놈…… 몰락한 가문의 버러지 같은 자식이 감히 내 평생의 권력을 무너뜨려!”
안토니오는 이성을 완전히 잃었다. 그는 더 이상 사법적인 논리로 우진을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 자신의 화려한 지팡이를 허공으로 높이 치켜들었다. 그의 전신에서 타락한 신성력이 붉고 어두운 폭풍처럼 폭주하기 시작했다.
“사제단! 기사단! 당장 무기를 뽑아라! 저 미치광이 변호인과 배신자 기사, 그리고 법정 안의 모든 영혼을 강제로 소멸시켜라! 단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안토니오의 광기 어린 비명과 함께, 법정 내부의 공기가 붉은 화염의 오라로 뒤덮이며 폭발하기 직전의 일촉즉발의 위기가 닥쳐왔다.
바로 그 순간, 재판소의 거대한 문이 다시 한번 거칠게 열리며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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