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기록관의 몸으로 눈을 뜨다
지독한 한기였다.
허파 허한 곳까지 얼어붙을 것 같은 냉기에 한우진은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거칠게 깎인 석조 천장과 사방을 가득 메운 퀴퀴한 먼지 냄새였다. 수만 권의 오래된 가죽 양피지가 썩어가는 특유의 냄새. 그 뒤를 이어 목을 조여오는 극심한 통증이 뇌수까지 찔러왔다.
“윽……!”
목을 만지려 손을 올렸을 때, 우진은 자신의 손이 깡마르고 창백하게 변해 있음을 깨달았다. 소매 끝은 헤진 회색 사제복이었다. 그리고 목에는 현실의 물질이 아닌, 붉은빛으로 이글거리는 반투명한 사슬이 뱀처럼 감겨 살을 파고들고 있었다. 영혼 구속 쇠사슬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우진은 혼란스러웠다. 분명 그는 대한민국 서초동에서 승률 99%를 자랑하던 엘리트 형사 전문 변호사였다. 재벌가 자제의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던 길에 음주 운전 차량이 그의 차를 정면으로 들이받았던 기억이 마지막이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파지며 낯선 기억들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레오. 에테르나 제국 변두리의 ‘명계 변방 재판소’ 소속 하급 기록관. 그리고 성황청의 역사 왜곡에 맞서 진실을 기록하려다 대역죄인으로 몰려 처형당한 아서의 아들. 가문은 이미 멸문당했고, 여동생 한나는 교단이 내린 붉은 저주로 인해 안개의 마을 네펠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몸의 원래 주인인 레오 역시 방금 전 지하 기록실에서 영혼이 쇠락해 숨을 거둔 참이었다.
그 비참한 영혼의 빈자리에 한우진의 자아가 들어앉은 것이다.
“레오! 정신이 들어?!”
동시에 낡은 나무문이 거칠게 열리며 둥근 안경을 쓴 왜소한 청년이 뛰어들어왔다. 명계 재판소의 하급 서기이자 레오의 유일한 동료였던 시몬이었다. 시몬은 양손에 두꺼운 가죽 장부를 안은 채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시몬……?”
우진의 목에서 쇳소리가 새어 나왔다.
“다행이야, 진짜 살아났구나! 하지만 이럴 때가 아니야! 지금 당장 도망쳐야 해! 하급 사제 안토니오가 기사들을 이끌고 이쪽으로 오고 있어. 네가 법정 사료 검열을 거부했다면서, 재판도 거치지 않고 너를 망각의 강으로 끌고 가 영혼을 소멸시키겠대!”
안토니오. 명계 변방 재판소를 사적으로 지배하며 억울한 영혼들을 노예로 부리던 부패한 사제였다. 그가 레오 가문의 마지막 핏줄마저 지워버리기 위해 초법적인 처형을 집행하려는 것이었다.
‘재판도 없이 영혼 소멸이라고?’
형사 변호사로서 우진의 이성이 즉각 반응했다.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은 공권력의 집행은 명백한 위법이었다. 우진은 본능적으로 소리쳤다.
“형사소송법 제200조의2에 의거, 영장 없는 강제 구인 및 신체 구속은 위법이다! 게다가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 없이 집행하는 형벌은 즉각 무효……!”
웅웅웅!
그 순간, 공기가 일그러지며 머릿속을 도끼로 찍어내리는 듯한 극심한 충격이 우진을 덮쳤다.
“아아악!”
우진은 바닥을 구르며 비명을 질렀다. 코에서 붉은 피가 울컥 쏟아져 나와 석조 바닥의 먼지를 적셨다. 명계의 사법 시스템이 이 세계의 법칙에 맞지 않는 ‘이계의 법률(현대 한국 법학)’을 강제로 인용하려 한 우진의 영혼에 인과의 반동을 가한 것이었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과부하 속에서 우진은 깨달았다. 이곳은 서울이 아니다. 이 세계의 룰을 따르지 않으면 변론은커녕 제 입으로 법을 읊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찢겨 죽으리라.
“레오! 왜 그래? 갑자기 이상한 주문을 외우더니 피를……!”
시몬이 경악하며 다가오려 할 때, 지하 기록실 가장 깊은 벽 너머, 망각의 감옥과 연결된 쇠창살 틈새에서 낮고 거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이계의 법률가 놈이 결국 사고를 쳤군. 사후 세계의 법정에서 살아있는 자들의 조문을 읊다니, 자살하고 싶어 환장했구나.”
우진은 벽을 짚고 간신히 고개를 돌렸다. 어둠 침침한 철창 너머, 온몸이 검은 쇠사슬에 묶여 유폐되어 있는 노년의 영혼이 보였다. 전임 영혼 변호사, 바르도였다.
“당신은…….”
“나는 바르도. 이 썩어빠진 명계 법정에서 진실을 말하다 갇힌 몸이지.”
바르도의 안광이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났다.
“젊은 법률가여, 네 놈의 영혼에서 풍기는 지독한 이성의 냄새를 맡았다. 여기는 무력이 지배하는 것 같지만, 결국 인과율이라는 거대한 사법 체계 위에 세워진 세계다. 네가 가진 그 정교한 논리를 이 세계의 규칙에 맞게 조율해라. 거짓을 말하면 영혼이 타격을 입지만, 진실을 무기로 삼으면 법정 그 자체가 네 방패가 될 것이다.”
바르도가 쇠사슬을 절렁이며 먼지 구덩이 속으로 낡고 묵직한 가죽 책 한 권을 발로 밀어냈다. 표지에는 천칭 문양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바르도의 고대 법전이다. 인류 최초의 법률가들이 신들과 맺은 근본 조약이 담겨 있지. 그걸 받아라. 그리고 네 영혼을 변호해라.”
우진은 기어가듯 손을 뻗어 법전을 잡았다. 책 표지에 손이 닿는 순간, 차가운 에너지가 그의 마나 회로를 타고 흐르며 코피가 멈췄다. 뇌리에 기계적인 시스템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계약 조건 충족. ‘바르도의 고대 법전’의 소유권이 전이됩니다.]
[임시 신분 획득: 견습 영혼 변호인]
[정의의 신성력 수치가 동조됩니다. 현재 수치: 5%]
그와 동시에 지하 기록실의 철문이 거칠게 부서져 나갔다.
쾅!
“기록관 레오! 감히 교단의 검열을 피하려 지하에 숨어 있었구나!”
안토니오 사제가 보낸 험악한 인상의 경비대원 세 명이 철퇴와 구속용 사슬을 든 채 난입했다. 그들의 전신에서는 타락한 신성의 붉은 오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시몬은 겁에 질려 벽 구석으로 물러섰다.
“이 반역자 놈, 안토니오 사제님의 명령이다. 즉각 망각의 강으로 압송하여 영혼 소멸형을 집행한다!”
경비대원이 붉게 빛나는 구속 사슬을 우진을 향해 거칠게 던졌다. 사슬이 뱀처럼 허공을 가르며 우진의 목을 감으려던 찰나.
우진은 차가운 눈빛으로 바르도의 고대 법전을 펼쳤다. 그리고 현대 변호사로서 다져진 완벽한 발성과 논리로, 이 세계의 율법을 선언했다.
“바르도의 고대 법전 제1장 제3조, ‘피고인 변론의 원칙’을 선언한다!”
우진의 목소리가 낡은 기록실 전체에 웅장한 공명을 일으켰다.
두구두구둥!
갑자기 바닥의 석조 타일들이 진동하며, 우진의 발밑에서 눈부신 은백색의 법관 문양이 솟구쳐 올랐다.
깡!
날아오던 경비대원의 구속 사슬이 우진의 몸에 닿기도 전에 은백색의 투명한 사법 장벽에 부딪혀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강력한 반동 마력에 기사들이 뒤로 서너 걸음 물러서며 경악했다.
“이, 이게 무슨 신성력이지?! 기록관 놈이 어떻게 이런 힘을……!”
우진은 피가 묻은 입술을 닦으며 냉혹하게 미소 지었다. 시스템이 그의 변론을 정식으로 인정한 것이다.
“명계 법정의 근본 율법에 의거, 대역죄인이라 할지라도 정식 변호인을 선임하여 변론할 권리가 보장된다. 변호인 선임과 증거 수집을 위해 피고인에게는 최소 3일간의 구금 유예와 변론 준비 기간이 주어져야 한다. 이를 무시하고 정식 판결 없이 영혼을 소멸시키려는 사제 안토니오의 명령은 사법 권한 남용이자 명백한 위법이다!”
[견습 영혼 변호인의 권능 ‘법정의 신성불가침권’이 일시 활성화됩니다.]
[법정 내 무단 집행 시도가 시스템에 의해 차단되었습니다.]
경비대원들의 무기에 감돌던 붉은 오라가 은백색 장벽의 압박에 강제로 꺼져버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이 법의 규칙 아래 봉쇄당했음을 깨닫고 이빨을 갈았다.
“이 쥐새끼 같은 놈이 감히 법 조항을 들이밀어 사제님의 명령을 거역해?”
우진은 법전을 단단히 쥔 채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가서 안토니오에게 전해라. 합법적인 절차를 밟지 않는다면, 교단 본청 사법부에 그의 직권남용을 정식으로 소송 제기하겠다고.”
경비대장 격인 사내가 침을 뱉으며 뒤로 물러섰다. 법정의 절대적인 결계 앞에서는 그들의 무력도 통하지 않았다.
“좋다. 고작 3일이다, 레오. 하지만 공짜는 없지. 네가 변호인의 권리를 주장했으니, 명계 법정의 룰에 따라 정식 피고인의 변호를 맡아야 할 것이다. 3일 뒤 열릴 첫 재판에서 무죄를 입증하지 못하면, 네 놈의 영혼도 그 피고인과 함께 망각의 강에 던져질 것이다!”
그들이 거칠게 문을 닫고 나가자, 은백색의 결계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우진은 안도감과 함께 몰려오는 극심한 피로감에 무릎을 꿇었다.
[사법 유예 3일 획득 성공.]
[대가로 강제 소송 계약이 체결됩니다.]
[첫 번째 변호 대상자: 폭군 에드워드 4세 (Edward IV)]
[기소 죄명: 반역죄 및 대규모 민간인 학살]
허공에 푸른빛의 시스템 창이 떠오르며, 피고인의 이름이 붉은 낙인처럼 찍혔다.
지옥 깊은 곳에서 올라온 잔혹한 폭군의 영혼을 변호해 3일 안에 무죄를 받아내야만 한다. 실패하면 즉시 영혼 소멸이었다.
한우진은 붉게 타오르는 에드워드 4세의 기소장을 응시하며,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고대 법전을 움켜쥐었다. 목의 쇠사슬이 서서히 조여들며 남은 시간을 예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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