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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의 거울, 깨어진 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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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묻은 수술대,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전생의 첫 환자 ‘릴리스’의 차가운 목소리가 레온의 귓가를 찢었다.


“너는 아무도 구하지 못해.”


그 한마디가 도화선이었다.


카일의 무의식을 지배하던 피비린내 나는 전장의 환영이 일순간 유리창이 깨지듯 산산조각 났다. 붉은 모래와 해골 망령들의 비명이 사라진 자리를 채운 것은, 기괴할 정도로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코를 찌르는 매캐한 살탄산 소독약 냄새. 규칙적으로 고막을 긁어대는 전자 기기의 기계음.


“삐이이이- 삐이이이-”


레온은 흠칫 놀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세계의 음침한 지하 감옥도, 카일의 정신 심층부도 아니었다. 사방이 하얗고 차가운 벽으로 둘러싸인 현대 지구의 병실. 그리고 그 중앙에 놓인 철제 침대 위에는 손목에서 붉은 피를 흘리며 차갑게 식어가는 한 소녀의 육체가 놓여 있었다.


소녀의 얼굴은 서준우가 현대에서 정신분석학 전문가로 일하던 시절, 끝내 구하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게 방치했던 그의 첫 환자, 릴리스였다.


“……릴리스?”


레온의 정신체 입에서 서준우 시절의 본명이 튀어나올 뻔했다. 그의 심안(心眼)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언제나 투명하고 단단하게 유지되던 그의 ‘정신 인지 지수’가 순식간에 70% 선을 돌파해 아래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크하하하! 찾았다, 네놈의 가장 약한 고리를!”


허공에서 기생 몽마 그리드의 비열한 비웃음이 울려 퍼졌다. 카일의 마음을 장악하는 데 실패한 그리드가, 레온의 자아를 직접 붕괴시키기 위해 그의 영혼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전생의 죄책감을 역추적해 침투시킨 몽마 ‘릴리스’의 파편이 실체화된 것이었다.


스르륵.


침대 위에 누워 있던 릴리스의 시신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하얀 환자복은 손목에서 흘러내린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고, 초점 없는 그녀의 눈동자가 레온을 똑바로 응시했다.


“선생님. 왜 날 살려두었어요? 어차피 이렇게 버릴 거였으면서.”


“그건…….”


레온은 숨이 막혔다. 현대에서 수많은 환자의 트라우마를 해부하고 치료했던 완벽한 논리가, 정작 자기 자신의 상처 앞에서는 단 한 마디의 변명조차 자아내지 못했다. 이것은 인지 왜곡이 아니었다. 그가 평생을 피해 도망쳐 온 진짜 ‘실패’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또 다른 형체가 걸어 들어왔다.


하얀 의사 가운을 입고 청진기를 목에 건 사내. 하지만 그의 얼굴은 레온의 전생인 ‘서준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의사 가운을 입은 서준우의 환영이 레온을 향해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위선자 놈. 사제복을 입고 장님 행세를 하니까 이세계의 구원자라도 된 것 같더냐? 너는 본질적으로 나약한 도망자일 뿐이다. 눈앞의 환자 하나 구하지 못해 자살하게 만든 살인자.”


“아니야…….”


레온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정신 인지 지수: 52% - 경고: 자아 붕괴 위험 수준에 접근 중]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전생의 죄책감이 해일처럼 밀려오자, 그가 펼쳐두었던 ‘인지 부정 방벽’에 시커먼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외부의 공격이라면 ‘가짜 허상’이라 부정하며 튕겨낼 수 있었지만, 자기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스스로를 향한 징벌적 자책감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병실 바닥의 리놀륨 타일 틈새에서 검은 점액질 촉수들이 솟구쳐 올랐다. 그리드의 어둠에 잠식된 릴리스의 촉수들이 레온의 목덜미와 사지를 옭아맸다.


“컥……!”


목이 졸리는 지독한 질식감이 영혼을 마비시켰다. ‘공감적 오감 공유 규칙’에 의해, 전생의 릴리스가 죽어갈 때 느꼈을 마지막 고통과 절망이 레온의 정신체에 그대로 전이되었다. 그의 다리가 마비되며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레온은 떨리는 손으로 품속의 ‘낡은 은색 청동 종’을 꺼내 흔들려 했다. 정적 주파수를 방출해 이 지독한 환각의 공간을 지워버려야 했다.


딸랑…….


그러나 종소리는 평소의 맑은 울림을 잃고, 마치 깨진 도자기처럼 탁하고 찢어진 소리를 냈다. 죄책감으로 손가락 끝의 감각이 마비되어 힘을 줄 수 없었다. 힘없이 풀린 손가락 사이로 은색 종이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선생님, 같이 가요. 어둠 속은 너무 외로워요.”


릴리스의 피 묻은 손길이 레온의 발목을 붙잡았다. 차가운 타일 바닥이 순식간에 검은 진흙 늪으로 변하며 레온의 하반신을 삼키기 시작했다.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 영혼의 무게는 현실의 그 어떤 중력보다 무거웠다.


그 시각, 현실의 헤이븐 수용소 지하 감옥.


“신부님! 레온 신부님!”


에밀리는 비명을 지르며 레온의 몸을 붙잡았다.


가사 상태로 누워 있던 레온의 전신이 기괴하게 뒤틀리며 발작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의 감은 눈꺼풀 틈새와 코, 그리고 귀에서 검붉은 피가 울컥 흘러내려 사제복 깃을 적셨다. 그가 손에 꼭 쥐고 있던 낡은 은색 청동 종의 표면에는, 꿈속의 균열을 대변하듯 시커먼 금이 가기 시작했다.


“바르가스 간수장님! 이단 주술의 반동입니다! 당장 저 장님 놈의 목을 베어야 합니다!”


부서진 철문 틈새로 횃불을 든 간수들이 소리쳤다. 절대 정적 영역의 시간은 이제 1분도 채 남지 않았다. 결계가 희미해지며 바르가스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밀리는 절망했다. 자신이 가진 2성급 약제 성력으로는 이 깊은 영혼의 상처를 치유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쓰러진 레온의 차갑게 식어가는 손을 필사적으로 움켜잡았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 묻어 있던 월광초의 푸른 미세 가루가 레온의 피부로 스며들었다. 에밀리는 눈물을 흘리며 레온의 가슴팍에 머리를 대고 간절히 기도했다.


“신부님…… 제발 돌아오세요. 저 같은 길거리의 하찮은 수녀도 구해주셨으면서, 왜 스스로를 지옥에 버려두려 하십니까…….”


그녀의 눈물이 레온의 손등 위로 떨어져 정적의 장벽을 적셨다.


그 따뜻한 온기와 간절한 목소리가, 붕괴하기 직전의 벼랑 끝에 서 있던 레온의 무의식 심층부로 아주 가늘고 맑은 은빛 실타래가 되어 흘러들었다.


그것은 몽마의 독기에 휘말려 사그라지던 그의 영혼을 현실과 단단히 묶어주는 유일한 생명선, ‘영혼 인양의 쇠사슬’이었다.


심연의 진흙 속으로 완전히 잠기기 직전, 레온은 자신을 붙잡은 그 따뜻한 현실의 감각에 미세하게 눈을 떴다.


레온의 정신 인지 지수가 급격히 하락하며 현실의 은색 종에 시커먼 균열이 가기 시작하는데, 현실에서 에밀리가 레온의 손을 잡고 부르는 눈물 섞인 기도 소리가 정적 영역을 뚫고 레온의 영혼에 도달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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