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을 빚어낸 검은 향기
회색 안개 바다를 뚫고 끝없는 심연으로 하강하는 감각은 지독한 이명과 함께 찾아왔다.
현실의 육체가 처한 절체절명의 위기. 간수장 바르가스의 칼날이 목전에서 멈춰 선 절대 정적 영역(Silent Zone)의 유효 시간은 단 3분뿐이었다. 그 시한부의 정적 속에서, 레온의 영혼 정신체는 마침내 카일의 무의식 가장 깊은 곳인 몽마의 기생소 '검은 늪'에 도달했다.
철분 냄새가 섞인 비린내와 검은 점액질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기괴한 공간.
그 늪의 한가운데에 검은 안개와 점액질 촉수들이 뒤엉킨 거대한 곤충 형상의 마물, 기생 몽마 ‘그리드’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녀석의 무수한 반투명한 눈동자들이 침입자인 레온을 향해 기괴하게 번뜩였다.
“또 기어 들어왔구나, 나약한 인간 사제 놈.”
그리드의 목소리는 수만 마리의 벌레가 날갯짓을 하는 듯한 불쾌한 소음으로 울려 퍼졌다. 녀석의 등 뒤에는 사지가 검은 촉수에 결박된 채 늪 속으로 조금씩 가라앉고 있는 검왕 카일의 영혼이 보였다.
카일의 정신 인지 지수는 이미 10% 수준, 완전한 자아 붕괴의 벼랑 끝에 서 있었다.
그리드가 검은 점액질 촉수를 흔들자, 늪의 표면에서 핏빛 모래가 소용돌이치며 환영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과거 전쟁터에서 카일이 구하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어갔던 전우들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카일…… 왜 우리를 두고 도망쳤지?”
“네놈만 살아남다니…… 비겁한 배신자 놈!”
피 흘리는 전우들의 유령들이 카일의 목을 조르며 왜곡된 비명을 질렀다. 카일은 머리를 감싸 쥐고 절망의 비명을 질렀다. 늪의 검은 점액질이 그의 가슴팍까지 차올랐다. 그가 절망할수록, 몽마 그리드의 몸집은 점점 더 부풀어 올랐다. 숙주의 죄책감은 녀석에게 가장 달콤한 양분이었기 때문이다.
‘공감적 오감 공유 규칙’으로 인해 레온의 영혼 정신체에도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극심한 질식감과 편두통이 밀려왔다. 현실의 육체 이마에서 흘러내리던 피가 꿈속의 정신체 어깨 위로 붉은 균열이 되어 퍼져나갔다.
하지만 레온은 흔들리지 않았다. 현대의 수면 장애 치료 전문가로서, 그는 이 기괴한 환영들이 환자의 ‘인지 왜곡’에서 기인한 가짜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레온은 가슴에 품은 은색 청동 종을 꽉 쥐었다. 현실의 마력은 고작 1성이지만, 이곳은 물리적 무력이 아닌 자아의 단단함이 지배하는 무의식의 세계였다. 레온은 회색 안대 너머로 맑게 빛나는 회색 눈동자를 개방했다.
‘심안의 마력 흐름 추적법(Mind's Eye Magic Flow Tracking Method).’
레온의 시야가 기하학적인 마력 선으로 재편되었다. 늪지대의 흐름과 망령들의 오라를 정밀하게 분석하던 레온의 눈빛이 일순 날카롭게 빛났다.
망령들의 텅 빈 눈동자 속에서 꿈틀거리는 보랏빛 몽마의 촉수. 그리고 그 촉수가 카일의 무의식 뇌리에 결착된 지점에서, 자연적인 감정과는 명백히 다른 ‘인위적인 검붉은색 마력 파동’이 감지되었다.
그 파동은 카일의 정신 미세혈관을 강제로 확장시키며 현실의 약물 성분을 끊임없이 활성화시키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전쟁 후유증이나 죄책감이 아니다.’
레온의 뇌리에서 정교한 의학적 분석 회로가 가동되었다.
‘데몬 브레스(Demon Breath). 뇌의 마력 흐름을 폭주시피는 성황청의 금기된 극독. 녀석들은 카일의 트라우마를 이용해 이 독소의 주파수를 계속해서 활성화시키고 있었던 거다. 카일이 미쳐버린 진짜 원인은 그의 무능함이 아니라, 성황청의 인위적인 독극물 투여 음모였다!’
진실을 깨닫는 순간, 레온은 늪의 독기를 뚫고 카일을 향해 소리쳤다.
“카일 경! 고개를 드십시오! 저 망령들이 외치는 비명은 그대의 죄가 아닙니다!”
카일이 떨리는 눈동자로 레온을 바라보았다. 그리드가 분노하며 검은 촉수를 휘둘렀지만, 레온은 ‘인지 부정 방벽’으로 촉수를 튕겨내며 말을 이어갔다.
“보십시오! 저들의 목덜미와 그대의 뇌를 연결하는 저 검붉은 실을! 그것은 그대의 나약함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성황청이 그대를 도구로 쓰고 버리기 위해 주입한 극독, ‘데몬 브레스’의 파동입니다! 그날 그대가 동료들을 구하지 못한 것은, 그대의 검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교단이 그대의 이성을 마비시켰기 때문입니다!”
“……독약? 교단이 나를……?”
카일의 왜곡된 기억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기억 재구성 정화술’의 파동이 은색 종의 미세한 진동을 타고 카일의 영혼으로 스며들었다. 피 흘리던 전우들의 환영이 일순간 흐려지며, 그들의 목덜미에 얽혀 있던 검붉은 독소의 선들이 선명하게 시각화되었다.
자신이 미쳐버린 진짜 원인이 거대한 음모였음을 깨닫는 순간, 카일의 내면에서 굳게 닫혀 있던 인지 장벽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의 정신 인지 지수가 10%에서 40%로 급격히 반등했다.
“크아아아악! 하찮은 인간 놈이 감히 진실을!”
자신의 생존 기반인 죄책감이 흔들리자, 몽마 그리드가 비명을 지르며 폭주했다. 검은 늪 전체가 뒤집어지며 레온의 정신체를 삼키려 들었다.
하지만 레온은 이미 늪의 오염 물질이 자신의 정신체 다리까지 침투해 영혼이 마비되어가는 고통 속에서도, 은색 종을 단단히 쥐고 미소를 지었다.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야말로 치유의 첫걸음이다.”
그때, 분노한 그리드의 몸에서 기괴한 붉은 안개가 피어오르더니 레온의 영혼 깊은 곳으로 역침투하기 시작했다. 녀석은 카일 대신, 레온 자신의 무의식 속에 숨겨진 가장 어두운 기억을 역추적해 들어왔다.
레온의 회색빛 시야가 급격히 왜곡되며, 이세계의 핏빛 전장이 아닌 차가운 현대 지구의 백색 병실 풍경이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피 묻은 수술대,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전생의 첫 환자 ‘릴리스’의 차가운 목소리가 레온의 귓가를 찢었다.
“너는 아무도 구하지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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