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속의 파수꾼
꿈과 현실의 경계가 찢어지는 감각은 지독한 이명과 함께 찾아왔다.
카일의 무의식 심층부, 기생 몽마 ‘그리드’의 검은 촉수들이 은색 청동 종을 옭아매며 썩은 진흙의 악취를 풍기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쿠우웅—!
레온의 영혼 저편, 아득한 현실의 장벽 너머에서 무거운 쇠사슬이 돌바닥을 거칠게 긁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정신체 상태인 레온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현실의 육체가 있는 곳에 심상치 않은 위협이 닥치고 있었다.
‘현실의 내 몸이 위험하다.’
지옥 같은 늪지대에서 카일의 사지를 붙잡고 있는 검은 촉수들을 바라보며, 레온은 이중 조율의 가혹한 압박감을 느꼈다. 마력 1성의 나약한 육체로 꿈과 현실의 주파수를 동시에 붙잡는 것은 영혼의 내구도를 실시간으로 마모시키는 자폭 행위와 같았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 * *
현실 세계, 헤이븐 요새 지하의 음습한 임시 기도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좁은 돌방 안에는 한기가 서려 있었다. 낡은 짚 침대 위에는 눈먼 수습 사제 레온의 육체가 시체처럼 창백하게 누워 있었다. 그의 감긴 안대 틈새로 붉은 핏물이 가늘게 흘러내려 뺨을 적셨다. 그 바로 옆, 두꺼운 쇠사슬에 묶인 채 가사 상태에 빠진 검왕 카일 역시 가쁜 숨만을 내쉬고 있었다.
그들의 무방비한 현실 육체를 지키고 있는 것은 약제 수녀 에밀리뿐이었다.
철컥, 철커덕!
갑자기 기도실의 두꺼운 철문 너머로 거친 군화 소리와 쇳소리가 복도를 타고 밀려왔다. 요새의 잔혹한 간수장, 바르가스의 쉰 목소리가 문벽을 투과했다.
“이 방이다. 그 눈먼 백작가 쓰레기 놈이 미치광이 검왕을 빼돌려 금기된 이단 주술을 부리고 있다는 밀고가 들어왔다. 소장님의 명령이다, 현장에서 즉시 처형한다!”
에밀리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녀는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손으로 품 안을 뒤적였다. 낡고 투박한 놋쇠 열쇠가 손끝에 걸렸다. 늙은 관리인 조셉이 유배당하기 직전, 자신의 나무 지팡이 끝에서 딸깍 소리를 내며 몰래 꺼내주었던 비밀 열쇠였다.
‘이 열쇠로 안쪽의 비밀 빗장을 걸어 잠그거라. 주교의 사냥개들이 들이닥칠 때 시간을 벌어줄 유일한 방패가 될 테니.’
에밀리는 이빨을 악물고 문고리 아래의 비밀 홈에 열쇠를 밀어 넣었다. 철컥! 둔탁한 금속음과 함께 굵은 철제 빗장이 맞물리는 순간, 문 바깥에서 쾅 하는 거친 발길질이 터졌다.
“안에서 문을 잠갔습니다, 간수장님!”
“가르시아! 네놈의 곤봉으로 이까짓 썩은 철문을 당장 부숴버려라!”
바르가스의 포효에 거구의 간수 가르시아가 앞으로 나섰다. 가르시아는 무거운 철제 곤봉을 치켜들었으나, 그의 눈동자는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얼굴의 칼자국이 흉측하게 일그러졌지만, 그의 호흡은 비정상적으로 가빴다. 레온이 보여주었던 기적적인 영혼의 주파수와, 자신들을 인간으로 대접해주던 은밀한 태도가 가르시아의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무고한 수습 사제와 미치광이 영웅을 무차별적으로 도륙하라는 바르가스의 가학적인 명령에, 가르시아의 손아귀에 들어간 힘이 미세하게 풀렸다.
“뭘 쭈뼛거리고 서 있어, 이 쓸모없는 놈이! 비켜라!”
바르가스가 가르시아를 거칠게 밀쳐내고 직접 쇠사슬 채찍을 휘둘렀다. 3성 무투가인 바르가스의 강력한 완력이 더해지자, 조셉의 비밀 열쇠로 버티던 철문은 비명을 지르며 뜯겨 나갔다.
쾅! 콰아앙!
문이 부서지며 매캐한 돌가루와 먼지가 좁은 기도실 내부로 쏟아졌다.
“쥐새끼 같은 년이 감히 문을 잠가?”
바르가스가 쇠사슬 채찍을 질질 끌며 난입했다. 그의 뒤로 횃불을 든 간수들이 들이닥치며 좁은 방 안이 붉은 화염으로 일렁였다.
에밀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단순히 보호받기만 하는 유약한 수녀가 아니었다. 레온의 곁에서 현대 정신의학의 기초와 특수 약초 조화법을 학습한 최초의 조수였다. 에밀리는 약초 가방에서 미리 빻아둔 ‘월광초(Moonlight Herb)’ 가루를 한 움큼 쥐어 벽면에 타오르던 횃불을 향해 거칠게 던졌다.
“대지의 정령이여, 안개로 시야를 흐려주소서!”
화아아악!
불꽃과 접촉한 월광초 가루가 폭발하듯 타오르며, 순식간에 기도실 내부를 짙고 달콤한 은자색 안개로 가득 채웠다. 고농도의 수면 및 진정 성분이 함유된 안개였다.
“콜록! 퉤! 이게 무슨 지독한 냄새야!”
“눈이 안 보입니다!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간수장님!”
간수들이 방향 감각을 잃고 우왕좌왕하며 기침을 토해냈다. 에밀리는 그 안개 속에서 숨을 죽인 채, 침대 위 레온의 현실 육체 앞을 자신의 온몸으로 가로막았다.
하지만 바르가스는 수용소의 가혹한 환경에서 수많은 폭동을 제압해온 베테랑이었다. 그는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은 채, 안개의 흐름을 찢으며 일직선으로 돌진했다.
“하급 이단 주술 따위로 나를 막을 수 있을 줄 알았더냐!”
바르가스의 억센 손아귀가 은자색 안개를 뚫고 에밀리의 멱살을 정확히 움켜쥐었다.
“꺄악!”
에밀리는 필사적으로 손끝에 하급 치유 성력을 모아 바르가스의 가슴을 밀쳐내려 했다. 따스한 빛무리가 흘러나왔지만, 3성 무투가의 단단한 근육 앞에서는 한낱 반딧불이에 불과했다. 바르가스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에밀리를 거칠게 벽면으로 내던졌다.
쿵!
“으윽……!”
차가운 돌벽에 어깨를 강하게 부딪친 에밀리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어깨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극심한 타박상에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바르가스는 쓰러진 에밀리를 무시한 채, 침대 위에서 미동도 하지 않는 레온에게 다가갔다. 레온의 힘없는 손가락 사이에는 여전히 낡은 은색 청동 종이 쥐여 있었다.
“장님 신부 놈, 네놈이 미치광이 검왕을 데리고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이단 심판을 집행해주마.”
바르가스가 허리춤에서 서늘한 강철 칼을 뽑아 들었다. 그의 검붉은 살기가 레온의 창백한 목덜미를 향해 무자비하게 내리눌렸다. 칼날의 차가운 금속성이 레온의 피부에 닿기 직전이었다.
그 순간, 카일의 꿈속 세계에서 그리드의 점액질 촉수와 대치하고 있던 레온의 영혼이 현실의 살기를 영적으로 감지했다.
‘현실의 내 목이 베이려 하고 있다.’
두 개의 세계를 동시에 조율하는 고통에 레온의 정신체 머릿속에서 번개가 치는 듯한 통증이 발생했다. 영혼의 내구도가 깎여나가며 그의 정신체 어깨와 가슴에 가늘고 붉은 균열이 서서히 퍼져나갔다. 하지만 서준우의 절대 이성은 흔들리지 않았다.
‘은색 종의 주파수를 현실로 역류시킨다. 대상의 공격 뇌파를 강제로 이완시키는 절대 정적.’
레온은 꿈속에서 은색 종을 거꾸로 쥐고 미세하게 진동시켰다.
현실의 지하 기도실.
바르가스가 레온의 목을 베기 위해 칼에 힘을 주려던 찰나, 레온의 손에 쥔 낡은 은색 청동 종이 스스로 공명하기 시작했다.
파아아앗—!
소리는 나지 않았다. 오히려 공간에 존재하던 모든 소리가 일시에 증발했다. 타오르는 횃불의 타닥거림도, 간수들의 거친 호흡도, 에밀리의 신음 소리조차 완벽하게 소멸했다. 레온을 중심으로 반경 5미터 이내의 공간을 투명한 은빛 구형 결계가 뒤덮었다.
‘절대 정적 영역 (Silent Zone)’의 현실 역류였다.
“……?!”
바르가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소리가 사라진 것과 동시에, 그의 뇌 신경망을 타고 극도의 나른함과 평온함이 강제로 주입되기 시작했다. 알파파 주파수가 그의 뇌를 지배하며, 공격성을 띠고 있던 그의 전신 근육이 맥없이 이완되었다.
칼을 쥔 바르가스의 손가락에서 힘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강철 칼날은 레온의 목덜미 바로 위, 단 몇 밀리미터의 허공에서 멈춘 채 고정되었다. 바르가스는 마치 거대한 늪 속에 잠긴 것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뒤에 서 있던 간수들 역시 방향 감각을 완전히 잃은 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소리가 사라진 지옥 속에서, 바르가스의 눈동자만이 공포로 격렬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이 절대 정적 영역이 현실에서 유지될 수 있는 시간은 단 3분뿐이었다.
꿈속 세계의 레온은 자신의 영혼이 마모되는 고통을 견디며, 사지가 묶인 카일을 향해 정신적 신호를 송신했다.
‘3분이다. 3분 안에 몽마의 최심부로 진입해 녀석을 정화해야 한다.’
레온의 영혼은 다시 한 번, 검은 늪지대 아래 똬리를 틀고 있는 몽마의 최심부를 향해 강제로 다이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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