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의 성자와 숨겨진 길
붉은 눈의 기생령이 아늑한 상담실의 하얀 벽을 날카로운 발톱으로 긁어내리며 침투하려 한다.
“끼이이이익—!”
귀를 찢는 듯한 불협화음이 순백의 공간을 흔들었다. 미카의 무의식 속에 구현된 현대식 상담실은 레온의 강력한 이성적 통제로 완벽한 방어벽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벽면 너머에서 꿈틀거리는 검붉은 마력의 기류는 기어코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려 발버둥 치고 있었다. 하얀 페인트 벽면에 길게 패인 검은 손톱자국 사이로 끈적한 절망의 점액질이 흘러내렸다.
레온은 품 안에서 사들부들 떨고 있는 어린 미카를 더 깊이 끌어안았다. 공감적 오감 공유 규칙에 의해, 아이의 심장박동이 레온 자신의 가슴속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공포로 인해 차갑게 식어가는 미카의 체온, 그리고 숨이 막힐 듯 조여오는 폐쇄감이 레온의 신경망을 자극했다.
‘흔들리지 마라. 저 기생령의 실체는 아이가 광산 붕괴 사고 당시 느꼈던 죽음의 강박일 뿐이다.’
레온은 자신의 정신 인지 지수를 100% 절대 이성 상태로 고정했다. 그의 회색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현실에서는 앞이 보이지 않는 장님이었으나, 이 몽환의 세계에서만큼은 그 누구보다 선명하게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미카, 내 목소리에만 집중하렴.”
레온은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아이의 귀를 감싸 쥐었다.
“저 벽 너머에서 긁어대는 소리는 그저 네가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란다. 네가 저 괴물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녀석은 이 방 안으로 단 한 발짝도 들어올 수 없어. 이곳은 네 마음속에서 가장 안전한 방이니까.”
“하지만…… 하지만 너무 무서워요! 저 붉은 눈이 저를 쳐다보고 있어요!”
“눈을 감으렴, 미카. 그리고 귀를 기울여봐.”
레온은 오른손에 쥔 은색 청동 종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정제 마력석의 순수한 푸른 에너지가 종의 테두리를 타고 흐르며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 좁고 밀폐된 꿈속 상담실에서 종소리를 크게 울렸다간 파동이 역류하여 자신과 아이 모두의 영혼에 타격을 입힐 터였다.
레온은 종을 크게 흔드는 대신, 손가락 끝으로 종의 안쪽 추를 아주 미세하게 튕겼다. 아주 미세하고 일정한 주파수의 진동음이 하얀 방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딩— 딩— 딩—
그것은 뇌파를 가장 평온한 상태로 이끄는 알파파 대역의 동조음이었다. 맑고 고요한 종소리가 물결처럼 퍼져나가며 검붉은 균열이 가기 시작했던 하얀 벽면을 은빛 안개로 덮어씌웠다.
동시에 레온은 인지 부정 방벽을 전개했다.
‘저 기생령의 존재를 부정한다. 저것은 생명체가 아닌, 마력 과부하로 인해 왜곡된 인지의 찌꺼기다.’
그의 확고한 의지가 은빛 파동과 결합하자, 벽면을 찢고 들어오려던 검은 발톱들이 일순간 힘을 잃고 흐물거리기 시작했다. 기생령의 붉은 눈동자가 경악과 고통으로 뒤틀렸다. 아이의 마음이 안정을 찾아갈수록, 몽마 유충의 생존 기반인 ‘불안’이 원천적으로 차단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빠…… 아빠 손이 보여요.”
미카가 천천히 눈을 뜨며 중얼거렸다. 검붉은 안개로 가득했던 갱도의 기억이 걷히고, 하얀 방의 벽면 너머로 따뜻한 햇살 같은 빛무리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래, 다 끝났단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야.”
레온이 마지막으로 종을 가볍게 튕겼다. 맑은 공명음과 함께 순백의 상담실이 천천히 부서지며 빛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검은 기생령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하얀 빛 속에서 완전히 산화하여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 * *
“허억—!”
지하 안전가옥의 침대 위에서, 미카가 크게 숨을 몰아쉬며 상체를 일으켰다. 아이의 눈동자는 더 이상 핏빛으로 충혈되어 있지 않았다. 맑고 투명한 갈색 눈동자가 방 안의 풍경을 온전히 담아내고 있었다.
“미카! 내 아들아!”
침대 옆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던 광부 대표 톰이 아이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그의 굵고 단단한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빠……? 나 이제 안 아파요. 가슴이 안 답답해요.”
아이가 맑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톰은 그대로 미카를 품에 안고 꺼느끼며 울음을 터뜨렸다. 철광석 먼지가 가득 묻은 가죽 옷 위로 뜨거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평생을 광산의 가혹한 노역 속에서 굳은살 박인 채 살아온 거친 사내가, 어린아이처럼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모습은 방 안의 모두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안전가옥 문가에서 묵묵히 경계를 서고 있던 검왕 카일의 눈빛에 잔잔한 온기가 감돌았다. 가르시아의 어깨 상처를 치료하던 에밀리 역시 눈가를 붉히며 레온을 바라보았다.
레온은 침대 옆 의자에서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현실 육체는 마력 1성의 최약체였기에, 단 한 번의 몽중 정화만으로도 전신에 극심한 탈진 증상이 밀려왔다. 안대 아래로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으나, 그는 평정심을 잃지 않고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아이가 품고 있던 마력의 왜곡된 파동은 완전히 정화되었습니다. 뇌 신경망의 미세혈관도 제 자리를 찾았으니, 당분간은 무리한 활동을 피하고 안정을 취하게 하십시오.”
톰은 미카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혀둔 뒤, 레온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차가운 돌바닥 위로 무릎을 꿇었다. 쿵,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고개를 숙인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성자님……!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모두가 제 아들을 미치광이라 부르며 죽여야 한다고 했을 때, 오직 성자님만이 아이의 영혼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저와 우리 헤이븐 광산 노동 조합의 모든 광부들은 이제부터 신부님을 ‘광산의 성자’로 모실 것입니다!”
톰의 목소리에는 신앙에 가까운 절대적인 충성이 깃들어 있었다.
[민중적 신뢰도 급격히 상승 — 헤이븐 하층민 여론 장악력 획득]
레온의 머릿속에서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이성의 연산이 빠르게 굴러갔다. 가난하고 소외받은 광부들의 지지를 얻었다는 것은, 이 요새 도시 헤이븐에서 성황청의 삼엄한 감시망을 뚫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인적 방패를 손에 넣었다는 뜻이었다.
“고개를 드십시오, 톰 경. 저는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레온이 가르시아의 부축을 받으며 톰의 거친 손을 잡아 일으켰다. 톰은 눈물을 닦아내며 품 안 깊숙한 곳에서 가죽 끈으로 꽁꽁 묶인 낡은 양포지 두루마리를 꺼내 레온의 손에 쥐여주었다.
“성자님, 이것을 받아주십시오. 성황청의 주교 바르샤 놈이 요새를 완전히 봉쇄하고 성자님을 사냥하려 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광부들만이 대대로 공유해 온 헤이븐 광산 지대의 비밀 광도 지도입니다.”
레온의 손가락 끝에 낡고 거친 양포지의 질감이 닿았다.
“이 지도의 붉은 선을 따라가면, 요새 서쪽 성벽 아래를 관통하여 외부 산맥으로 이어지는 숨겨진 지하 통로가 나옵니다. 성황청의 그 어떤 마법 결계나 경비병들도 이 깊은 사각지대의 경로는 알지 못합니다. 성자님께서 요새를 탈출하셔야 할 때, 이 길이 유일한 생명선이 될 것입니다.”
레온은 지도를 가만히 쓸어내렸다. 그의 청각과 심안이 지도의 가치를 실시간으로 가시화했다. 요새의 단단한 성벽 아래 숨겨진, 성황청의 눈이 미치지 않는 유일한 퇴로. 이것은 향후 대탈출전에서 자신들의 목숨을 구할 결정적인 열쇠였다.
“소중한 유산을 건네주어 고맙습니다. 이 지도는 우리 일행의 생명을 지키는 데 소중히 쓰일 것입니다.”
레온은 지도를 품에 넣은 뒤, 책상 위에 놓인 양장 심리 분석 노트를 펼쳤다. 그리고 깃펜을 들어 미카의 치료 과정과 무의식 속에 기생했던 초기 몽마 유충의 주파수 반응 데이터를 정교하게 기록하기 시작했다. 사각거리는 깃펜 소리만이 고요한 안전가옥 내부를 채웠다.
하지만 평화는 그리 길지 않았다.
스으으으…….
레온의 정밀 청각 심리 분석이 은신처 외부의 미세한 변화를 감지했다.
조금 전까지 들려오던 빈민가 특유의 불규칙한 밤소음들—부랑자들의 웅성거림, 낡은 지붕 위를 달리는 길고양이들의 발소리, 밤바람에 흔들리는 쓰레기통의 마찰음이 일순간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차갑고 무거운 정적이 안전가옥 주변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소리가 지워졌다.’
레온의 손끝이 멈추었다. 그의 심장이 경고 신호를 보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낡은 나무 창문 방향을 향했다. 눈을 보호하기 위해 쓴 얇은 실크 안대 너머로, 레온은 영혼의 빛을 읽는 심안을 개방했다.
지이이잉.
어두운 밤거리가 은빛의 입체적인 기하학적 선으로 머릿속에 투영되었다. 그리고 안전가옥 맞은편, 낡은 흙벽 지붕 위에 똬리를 틀고 있는 거대한 영혼의 오라가 그의 심안에 포착되었다.
그 오라의 색상은 소름 끼치도록 탁한 핏빛 붉은색(살기)이었다. 게다가 그 붉은 빛무리의 가장자리에는 주교 바르샤의 비밀 온실에서나 느낄 수 있었던 기괴한 검은 점액질(몽마의 영향) 오라가 끈적하게 얽혀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레온의 예리한 후각과 청각이 밤바람을 타고 스며드는 미세한 향기를 잡아냈다. 비릿하면서도 기묘하게 달콤한 쇠붙이 냄새.
‘데몬 브레스(Demon Breath)의 잔여 향기다.’
카일을 폭주시키고 영웅들의 뇌를 파괴했던 그 금기된 약물의 미세한 잔향이 그 거구의 사내에게서 풍겨 나오고 있었다. 주교 바르샤가 보낸 무자비한 암살자, 킬러 고르도임이 틀림없었다.
지붕 위에 거구의 몸을 웅크린 채 앉아 있는 고르도는, 양손 손가락 사이에 붉은색 실을 기괴한 리듬으로 감았다 풀기를 반복하며 레온이 머무는 안전가옥의 창문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덫에 걸린 먹잇감의 숨통을 언제 끊을지 저울질하는 사냥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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