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의 퇴로와 쥐굴의 등불
감옥 최하층 벽면의 거대한 놋쇠 종들이 일제히 요동치며, 귀를 찢을 듯한 날카롭고 매캐한 경보 종소리가 지옥의 비명처럼 요새 전체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지하 감옥의 눅눅한 공기가 종소리의 진동에 거칠게 흔들렸다. 천장에 매달린 흙먼지가 비처럼 흘러내려 레온의 회색 사제복 어깨 위로 흩어졌다. 현실의 마력을 모두 소진한 레온은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며 비틀거렸으나,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스스로의 정신 인지 지수를 100% 절대 이성 상태로 굳건히 고정했다.
“신부님, 괜찮으십니까?”
어깨에 깊은 자상을 입은 가르시아가 피가 흐르는 어깨를 움켜쥔 채 레온의 앞을 막아서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간수장 바르가스를 배신했다는 공포 대신, 자신을 구원해 준 눈먼 사제를 끝까지 수호하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나는 괜찮다, 가르시아. 네 어깨의 상처가 깊군. 지혈이 우선이다.”
레온은 보이지 않는 눈 대신 예리한 청각으로 가르시아의 거친 호흡과 피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를 짚어냈다.
그때,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던 에밀리 수녀가 고통스럽게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오른쪽 어깨는 바르가스의 폭력으로 인해 검푸른 피멍이 들어 있었고, 옷자락은 흙먼지로 엉망이 된 상태였다.
“신부님……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이미 폐쇄되었을 거예요. 경보가 울렸으니 요새 경비병 수십 명이 철제 갑옷을 입고 이 아래로 밀려 내려올 겁니다. 정면 돌파는 불가능해요.”
에밀리의 말은 정확했다. 레온의 정밀 청각 분석 역시 상부 계단 너머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수십 명의 무거운 군화 소리와 철갑옷의 서슬 퍼런 마찰음을 이미 포착하고 있었다. 사방이 꽉 막힌 지하 감옥에서 마력 1성의 최약체 사제와 부상당한 동료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정면에는 없었다.
“다른 퇴로가 필요하겠군.”
레온이 차분하게 읊조리자, 에밀리가 이빨을 악물며 자신의 주머니 속을 더듬었다. 그녀의 손끝에 닿은 것은 늙은 관리인 조셉이 전해주었던 비밀 놋쇠 열쇠였다.
“조셉 할아버지가 말해준 적이 있어요. 이 최하층 감옥 구석, 무너진 하수관 뒤편에 요새 외부의 하수도로 통하는 오래된 철문이 숨겨져 있다고…… 그곳을 열 수 있는 열쇠가 바로 이거예요. 하지만 그 길은 너무 좁고 복잡해서 길잡이가 없으면 길을 잃고 영원히 갇히게 돼요.”
“길잡이라면 걱정할 것 없다.”
레온이 고개를 나지막이 돌렸다. 그의 심안(心眼)에 좁은 환기구 틈새를 타고 소리 없이 내려앉는 아주 왜소하고 기민한 영혼의 오라가 감지되었다.
탁.
가벼운 가죽 신발이 돌바닥에 닿는 소리와 함께, 주근깨가 섞인 마른 체구의 소년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레온을 친형처럼 따르며 요새 내부의 눈과 귀가 되어주던 고아 소년, 토비였다.
“형! 아니, 레온 신부님! 에밀리 누나!”
토비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영리한 눈망울을 빛내며 일행에게 다가왔다.
“위에서 경비병들이 사냥개들을 풀고 내려오고 있어요! 지하 하수도로 가는 길이라면 제가 전부 외우고 있어요. 좁은 틈새나 무너진 벽도 제가 먼저 지나가서 길을 열어줄게요. 어서 저를 따라오세요!”
“고맙구나, 토비. 앞장서라.”
레온의 지시에 토비가 망설임 없이 감옥 구석의 눅눅한 이끼가 가득한 벽면으로 달려갔다. 무거운 철제 빗장 뒤로 가려진 낡은 철문이 드러났고, 에밀리가 떨리는 손으로 조셉의 놋쇠 열쇠를 꽂아 돌렸다.
철컥, 스으으으.
수십 년 동안 열리지 않았던 오래된 철문이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열렸고, 그 안쪽에서 뿜어져 나오는 축축하고 썩은 하수도의 악취가 일행의 코를 찔렀다. 레온 일행은 신속하게 어둡고 좁은 하수도 내부로 몸을 던졌다. 카일은 거대한 체구임에도 불구하고 소리 없이 움직이며 레온의 바로 뒤에서 보이지 않는 무거운 기세로 사방을 경계했다.
그들이 하수도 안쪽으로 수십 걸음쯤 걸어 들어갔을 때, 뒤편 감옥 내부에서 쾅 하는 폭음과 함께 경비병들이 난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단자 놈들이 하수도로 도망쳤다! 성수 탐지견들을 풀어라! 흔적을 쫓아라!”
지독한 추격의 서막이었다. 하수도의 아치형 천장을 타고 사냥개들의 날카롭고 기괴한 으르렁거림이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성황청이 이단 추적을 위해 특수 훈련시킨 성수 탐지견들은 미세한 신성 마력의 흔적을 귀신같이 찾아내는 괴물들이었다.
“경비병들이 성수 탐지견을 풀었어요! 녀석들의 코는 마력의 냄새를 기억해서 아무리 어두워도 끝까지 쫓아와요!”
토비가 다급하게 소리치며 자신의 가방에서 가루 주머니를 꺼냈다. 그것은 에밀리가 치료소에서 사용하기 위해 건조해 두었던 희귀 약초, 은신초(Silver Shadow)의 가루였다.
“이 은신초 가루를 하수도의 오물과 섞어서 사방에 뿌릴게요! 은신초의 미세한 환각 성분과 하수도의 썩은 냄새가 결합하면, 탐지견들의 예민한 후각 세포가 일시적으로 마비되어 아예 방향 감각을 잃을 거예요!”
토비는 기민한 동작으로 은신초 가루를 벽면과 흐르는 하수 위로 골고루 뿌려대기 시작했다. 특유의 쌉싸름하고 축축한 향기가 하수도의 악취와 뒤섞이며 기묘한 보랏빛 안개처럼 공기 중에 퍼져나갔다. 멀리서 들려오던 탐지견들의 짖는 소리가 일순간 혼란스럽게 깨어지며 엉뚱한 방향으로 흩어지는 것이 청각으로 똑똑히 전해졌다.
하지만 위기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하수도 전방의 교차로 너머에서 성황청이 설치해 둔 미세 마력 탐지 결계의 파동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결계에 닿는 순간, 지상의 경비대 본부에 도주 경로가 실시간으로 송신될 터였다.
레온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심안을 극도로 개방했다.
‘심안의 마력 흐름 추적법(Mind's Eye Magic Flow Tracking Method).’
순식간에 레온의 어둠뿐이던 시야가 회색빛의 입체적인 지형으로 재편되었다. 벽면을 흐르는 축축한 물방울과 아치형 돌벽의 미세한 균열이 정교한 은빛 선으로 그려졌다. 그리고 그 전방의 갈림길 한가운데, 촘촘한 그물망처럼 얽혀 있는 투명한 금빛 마력 실타래들이 보였다. 성황청의 경계 결계였다.
‘결계의 밀도가 가장 낮은 사각지대를 찾아야 한다.’
레온은 청각과 심안을 동시에 가동하여 결계의 진동음을 분석했다. 물이 흐르는 하수구 바닥 쪽, 고농도의 오물과 천연 광물 성분이 섞여 마력 전도율이 극도로 낮아진 지점이 보였다. 그곳은 금빛 실타래들이 닿지 못하고 미세하게 끊어져 있는 결계의 완벽한 사각지대였다.
“모두 멈춰라. 내 지시에 따라 움직여라.”
레온의 차분하고 단호한 목소리가 동료들의 귀에 가 닿았다.
“왼쪽 벽면에 몸을 최대한 밀착시켜라. 그리고 하수구 바닥에서 정확히 한 뼘 높은 돌출된 석축만을 밟고 지나가야 한다. 그 아래로 흐르는 물줄기는 결계의 탐지선이 비껴가는 유일한 틈새다.”
가르시아와 에밀리는 레온의 눈이 멀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그의 정교한 지시를 전적으로 신뢰하며 몸을 움직였다. 카일 역시 레온의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사각지대를 관통했다. 마지막으로 토비가 깃털처럼 가볍게 벽을 짚고 통과하자, 금빛 결계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은 채 고요함을 유지했다. 결계의 탐지망을 완벽하게 기만해 낸 순간이었다.
그러나 하수도 출구로 향하는 마지막 철문에 도달했을 때, 뒤편에서 수십 명의 경비병들이 횃불을 밝히며 무서운 속도로 쫓아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은신초 가루로 마비되었던 탐지견들이 기어이 방향을 다시 잡은 모양이었다.
“젠장, 벌써 저기까지 쫓아왔어요! 이 철문은 낡아서 잠금장치가 부서져 있어요! 뒤에서 붙잡아두지 않으면 금방 따라잡힐 거예요!”
토비가 철문을 밀어 열며 절망적으로 외쳤다.
어깨에서 붉은 피를 흘리던 가르시아가 묵묵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는 자신의 거구로 낡은 철문을 쾅 닫아걸고, 벽면에 돌출된 녹슨 철제 빗장을 양손으로 움켜잡았다.
“가르시아 경, 무엇을 하려는 건가?”
에밀리가 놀라 물었다. 가르시아는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도 비장하게 미소 지었다.
“신부님, 수녀님. 먼저 가십시오. 이 몸은 평생 수용소의 간수로 일하며 이 철문들의 구조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녹슨 빗장을 강제로 비틀어 뭉개버리면, 저들이 지상에서 거대 도끼를 가져오기 전에는 절대로 이 문을 열지 못할 겁니다.”
“가르시아, 네 부상이 깊다. 무리한 힘을 쓰면 상처가 터질 것이다.”
레온이 만류하려 했으나, 가르시아는 이미 자신의 전신의 마력을 양손에 집중시키고 있었다.
“신부님. 제 영혼의 죄책감을 씻을 수 있는 기회는 오직 지금뿐입니다. 저의 진짜 주인인 당신을 위해 이 한 몸을 바치게 해주십시오.”
으드드득! 콰아아앙!
가르시아가 포효하며 녹슨 철제 빗장을 자신의 완력으로 강하게 움켜쥐고 비틀었다. 4성급 중장 전사의 무지막지한 힘이 가해지자, 두꺼운 무쇠 빗장이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엿가락처럼 휘어지고 문틀 사이에 단단히 박혀버렸다. 그 과정에서 바르가스에게 입었던 어깨의 자상이 찢어지며 붉은 피가 전신으로 흘러내렸지만, 가르시아는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문을 온몸으로 지탱했다.
“가르시아 경……!”
에밀리가 눈물을 흘리며 그의 어깨에 급히 지혈용 약초 가루를 바르고 붕대를 감아주었다. 가르시아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피 묻은 얼굴로 레온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가자, 가르시아. 네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
레온은 가르시아의 피 묻은 어깨를 가만히 짚어주며 무언의 약속을 건넸다. 문 너머에서 경비병들이 문을 두드리며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려 퍼졌지만, 뭉개진 철문은 흔들림 없이 굳건하게 닫혀 있었다.
일행은 토비의 안내를 받아 하수도의 마지막 출구인 좁은 배수구를 기어 나와, 마침내 요새의 삼엄한 장벽을 완전히 벗어났다.
차가운 밤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뒷골목. 쓰레기와 오물의 악취가 진동하고, 낡은 판잣집들이 기괴한 실루엣처럼 얽혀 있는 치외법권의 거주지. 헤이븐 빈민가 ‘쥐굴’의 초입이었다.
배수구 주변의 어둠 속에서, 가죽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한쪽 귀에 피어싱을 한 날렵한 체구의 청년이 소리 없이 나타났다. 잭이 이끄는 뒷골목 정보망 ‘쥐굴’의 핵심 단원이자 정보원인 잭 본인이었다.
“늦었잖아, 토비. 그리고…… 당신들이 소문의 그 장님 신부와 도망친 전사들인가?”
잭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레온과 피투성이가 된 가르시아, 그리고 묵묵히 서 있는 카일을 차례로 응시했다. 그의 손끝에는 빛을 반사하지 않는 단검 ‘섀도우 팽’이 가볍게 회전하고 있었다.
“상황이 급하다, 잭 경. 경비병들이 하수도 너머까지 추격해 왔다. 은신처가 필요하다.”
레온의 차분한 목소리에 잭은 가볍게 혀를 차며 품 안에서 지저분하고 낡은 평민용 누더기 망토들을 꺼내 던져주었다.
“이걸 걸쳐. 지금 요새 광장 곳곳에 당신들 얼굴이 그려진 벽보가 붙기 시작했으니까. 부랑자 무리에 섞여서 내 안전 가옥으로 이동한다. 허튼수작 부릴 생각은 하지 마라, 사제 나리.”
일행은 잭의 지시에 따라 누더기 망토를 뒤집어쓰고, 밤안개가 자욱한 빈민가의 복잡한 미로 같은 골목길을 소리 없이 관통했다. 잭의 기민한 은밀 이동 기술 덕분에 일행은 순찰 돌던 하급 경비병들의 눈을 완벽히 피해, 빈민가 구석의 허름한 지하 창고를 개조해 만든 비밀 안전 가옥 내부로 은밀히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철제 문이 닫히고 빗장이 걸리자, 비로소 일행은 무거운 긴장을 내려놓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에밀리는 가르시아의 찢어진 어깨 상처를 본격적으로 치료하기 위해 약초 가방을 열었고, 카일은 문 옆의 어둠 속에 서서 묵묵히 칼자루를 쥔 채 레온의 주위를 경계했다.
레온은 가슴팍에 품은 은색 청동 종을 가만히 만졌다. 종 표면에는 지난 사투의 흔적인 맑은 은빛 액체로 메워진 복원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현실의 마력은 방전되었지만, 그의 자아는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게 조율되어 있었다.
바로 그때, 불빛 하나 없던 안전 가옥의 가장 어두운 구석에서 기묘한 마찰음과 함께 작은 촛불 하나가 켜졌다.
스으으윽…….
어둠을 가르고 나타난 것은 화려한 실크 모자를 쓰고, 손가락마다 진귀한 보석반지를 가득 낀 채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50대의 거상이었다. 바르톨로메오 중립 상단의 상단주, 바르톨로메오였다.
그는 촛불 너머로 레온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고도 깊은 울림이 있는 목소리로 미소를 지었다.
“과연, 대륙 최강의 검왕을 맨손으로 치유하고 요새의 감옥을 통째로 뒤흔들었다는 소문이 단 한 자의 허언도 아니었군, 장님 신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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